아마 15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문학을 좋아하던 내가 잘 따르던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짧은 커트머리에 툭툭 내뱉는 무심한 말투를 가졌던 선생님.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소설을 쓰겠노라 열심인 나를 예뻐해 주셨다. 스무 살이 넘고 대학을 다닐 무렵까지 선생님과 연락이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락은 끊기고야 말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선생님과의 몇몇 추억 중에 내 기억에 콕하고 박혀 떠나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다. 그 장면은 평소에는 거의 떠오르지 않는데 어쩌다 한 번씩 지하철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남자를 보면 떠오르곤 한다. 정말 이상하게도 말이다. 한 번은 선생님의 딸아이와 놀다가 밥을 먹고 온 적이 있는데, 내가 이젠 제법 컸다 생각하셨는지 선생님이 당신의 남편에 대한 하소연을 하셨다
"우리 남편은 말이야, 신혼시절 시작할 때부터 이불을 자기 양쪽 팔에다가 딱 끼고 잠을 자더라. 난 그게 참... 뭐라 해야 할까. 자기만의 영역에 들어오지 말라는 그런 신호 같이 느껴졌어..."
지금이라면, 세월이 흘러 그때의 선생님과 같은 나이가 된 나라면, 세월의 바람을 잔뜩 맞은 나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땐 몰랐다. 팔짱을 끼는 남자라. 그게 왜 그렇게 느껴졌을까? 자기만의 영역에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라니. 알 수가 없었다.
폴 세잔의 '팔짱을 낀 남자'라는 작품을 보면, 중년의 남자 한 명이 무심한 듯 팔짱을 낀 모습으로 어딘가를 응시한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는 약간 비스듬히 몸의 무게를 자신의 오른편에 실어 나무 의자에 기대어 있다. 팔짱을 끼고 오른편의 무언가를 쳐다보는 그의 왼편 얼굴은 조금은 일그러져 있다. 어쩌면 일그러져 있다기보다는 무너져 내린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세잔은 평생 우울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성격이 수줍음이 많았지만 타인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인 탓에 대인관계도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반대로 미술 공부를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포기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별다른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탓에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팔짱을 낀 남자를 보면 마치 그런 성격의 세잔을 보고 있는 듯하다. 남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태도의, 그러나 매우 섬세하고 다치기 쉬운 그 마음을 가진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세상과 자기 자신 사이의 경계를 굳건히 세우고 삐딱한 눈으로 사물을 응시하는 그 모습이 말이다.
팔짱을 낀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 어떤 걱정이나 근심이 있을 때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질 때 종종 팔짱을 끼고는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근데 하필이면 왜 팔짱을 끼는 것일까. 아마도 팔짱을 끼는 그 행동에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이기적일지도 모르는 생각이지만 그 팔짱을 끼는 모습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보고 싶지는 않다. 무심히 지나치는 전철 안에서의 누군가가 팔짱을 끼고 앉아있거나, 커피숍에서 긴 줄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나와 가까운 사람의 그 모습은 너무 서글프고 또 무서운 일일 수도 있다.
친구 한 명은, 엄마의 팔짱 낀 모습이 제일 무서웠다고 한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거실의 무거운 공기 속에, 엄마가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날이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고등학생인데 남자 친구를 사귄 것을 들켰던 날, 시험성적이 엉망이었던 날, 동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른 차를 들이박아 사고를 친 날에도. 친구의 엄마는 거실 한가운데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는 엄마에게 다가가 따스한 위로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팔짱을 낀 엄마의 그 딱딱하고 차가움. 다가서 위로하기에 엄마는 자신의 벽을 너무나도 높게 치고 있었다. 그렇게 회복되지 않은 모녀 관계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나아지지 못했다. 이제 나이를 들어버린 엄마는 더 이상 팔짱을 끼고 앉아있지 않지만 이미 굳어버린 둘 사이의 관계는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다.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기 가장 쉽다는 생각이 든다. 난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이가 팔짱을 낀 그 모습을 보기가 싫다. 나 또한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의 사이에 그 벽을 만들어 우리를 구분 짓는 것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려고 한다면 나는 응당 그 공간과 감정을 지지해 줄 것이다. 나 또한 존중받고 싶기 때문에. 우린 그렇게 서로에게 벽을 세우고 또허물기를 반복하는, 관대하고도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