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신이 하는 소비에 대한 ‘보여주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중 여자들의 ‘데일리 룩’은 마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루틴처럼 피드에 등장한다. (물론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루틴이겠지만)
본격적인 겨울 시즌은 앞두고 나 같은 소비녀들의 마음엔 불이 붙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외투만큼은 '좋은 옷'을 사 입어야 해서다. 겨울 외투는 거의 가방과 견줄 수 있는 중요 아이템이기 때문에 구매 전 사전 조사는 필수다. '성실한 소비녀'시절, 나도 몇 날 며칠을 인터넷 쇼핑몰과 SNS를 들락거리며 '공부'했고 외투는 역시 좋은 것으로 돈 좀 주고 사야 오래 입을 수 있다는 결론도 얻었다.
하지만 몸은 따뜻한데 통장만큼은 아프도록 시린 겨울을 보내고 난 뒤, 나는 그야말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이제 내가 가진 옷에 대한 결론에 뭔가 허점이 있음이 보이는 게 아닌가.
겨울을 대비해서 버버리패딩을 하나 장만했어요. 버버리패딩은 디자인이 스탠더드 하고 유행을 타지 않아서 몇 년 전 샀던 다른 패딩도 겨울이면 꼭 꺼내 입는 애정 템 이거든요. 이번 패딩도 앞으로의 겨울마다 저와 함께할 거 같아요.
#버버리패딩 #데일리룩 #애정템 #겨울교복
피드의 흐름을 한번 잘 살펴보면 ‘좋은 옷을 한번 사면 오래 입는다.’는 소비녀들의 논리에는 안타깝게도 어딘가 맞지 않는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그 인플루언서의 작년 피드를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고가의 외투를 살 때마다 매번 비슷한 말을 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물론 몇 년 전 샀던 패딩도, 이번에 새로 장만한 패딩도 오래오래 입긴 하겠지만, 옷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코 한 가지 옷으로 겨울을 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스탠더드 한 옷은 옷장 속에 킵해 두고, 기분을 내고 싶은 날 입어야 하는 또 다른 ‘색다른 옷’에도 관심을 둔다. 이렇게 사 모은 옷은 해를 넘길수록 옷장을 꽉꽉 채워 버리고 '좋은 옷'은 세월이 지나 유행을 넘겼지만 당시 지불했던 가격이 아까워 절대 버리지도 못한다. 명품을, 그리고 옷을 좋아하는 사람 중 지금 옷장에 있는 겨울 옷 중 코트 하나, 패딩 하나 이렇게 딱 두벌만 있는 사람 손?
그래서 좋은 옷, 비싼 옷을 오래 입는다는 말은 말이 되기도 하고 안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한 소비생활을 하는 사람은 절대 한 벌로 만족을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아이템을 찾아 기웃거린다. 만일 10년 전 샀던 버버리 패딩 하나로 여태껏 버티다가 올해 하나 장만했어요. 하는 사람 있다면 인정! 깨끗하게 나의 패배를 인정하겠다. 하지만, 당신은 지난 10년간 정말, 겨울옷을 단 한 벌만 구매했을까?
고로, ‘좋은 옷을 사서 오래 입는다’는 논리는 슬프게도, ‘좋은 옷일수록 더 많이 사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는 욕망을 만나 ‘좋은 옷을 많이 사면 오래 입는다’는 자기 합리 화적 결론을 도출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옷을 사면 생기는 문제들
이미지출처 다음 뉴스 - 중앙일보 기사
겨울 패딩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패딩의 충전재인 오리털, 거위 털 채취의 방법도 상당히 비윤리적이라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오리나 거위는 생후 10주부터 6주 간격으로 일생동안 5-15회 털을 뽑힌다. 죽이지 않고 산채로 뽑으면 털을 여러 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 생산성이 중시되는 오늘날의 시스템에서 동물이 인간과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굳이 수치를 인용하여 옷의 생산이 야기하는 환경적, 동물 인권적 문제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내 옷장에 쌓여있는 입지 않는 옷의 양을 생각해 봐도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오기 때문이다. 내 옷장에도 10년 전에 샀던 옷이 아직도 썩지 않은 채 옷걸이에 걸려있는데 화학작용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는 내가 봐도 내가 살아있는 한 썩을 것 같지 않게 생겼으니 말이다. 지난 ‘구두 정리’ 때 버렸던 구두의 양만 해도 엄청나긴 했다. 커다란 마트용 비닐봉지로 족히 5 봉지는 버렸던 것 같으니. 입지 않고 버려두었던 오리털, 거위 털 패딩도 몇 벌이나 되는데 그걸 위해 털이 뽑혔던 불쌍한 동물들은 인간의 옷장 속에 고통을 견뎌낸 보람 하나 없이 자기 털이 처박힐 줄 알았을까?
내가 행복한 옷이란 무엇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계절마다 늘 내가 손이 가 입는 옷은 항상 한정적이었다. 늦잠 자고 일어나 대충 그리고 재빨리 출근 준비할 때 입는 옷은 인터넷 저렴이 구매 아니면 길거리 노점에서 거져 구매했던 옷이었다. 비싸게 돈을 주고 산 옷은 매일 입기에는 아까워 특별한 날만 입으며 아꼈다. 비싼 가방은 비가 오는 날이면 물에 젖을까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며 가슴에 꼭 품고 다녔다(겁나 없어 보이게). '내 돈 내산' 했던 옷과 가방이지만 입고 나가는 날이면 하루 종일 때라도 탈까, 김칫국물이라도 튈까 신경을 쓰다 보니 활동도 자유롭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나는 모은 것이 없는 깡통 통장을 보며 '그 모든 것이 다 헛되었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썩어 없어지지 않을 옷'을 사는 횟수를 반 이상,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줄여왔던 지난 2년간, 나는 예쁜 옷을 살 쇼핑리스트를 떠올리는 대신 ‘내가 행복한 옷’이라는 주제를 떠올리며 옷을 대하는 기준을 바꿨다.
어디 구멍 나거나 헤진 곳은 없는 온전한 형태의, 입을 때 따뜻하거나 시원하고 내게 불편하지 않으며 깨끗하게 세탁이 된 옷.
이것이 내가 행복한 옷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옷장 안에 처박혀 있는, 나의 과거 소비의 역사를 말해주는 옷들이 원망스럽거나 싫지는 않다. 옷에 담겨있는 그 계절의 추억과 그 옷을 입고 처음 나갔을 때 느꼈던 설렘. 그것까지 모조리 부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악마 편집장’ 미란다의 말처럼 옷은 분명 수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해내는 중요한 산업인 것도 분명하다. 또한, 나는 옷을 참 좋아했던 여자였고 일정 기간 옷 때문에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은 옷에 많은 가치와 미련을 두지 않는 내가 좋다. 예쁜 옷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되었다. 나보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그 옷을 입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때론, 와 내가 입었으면 정말 안 예뻤을 텐데. 옷의 주인은 따로 있나 보다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을 하기도.
그런데, 딱 하나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봄 여름, 청바지에 어울리게 입는 화이트 블라우스였다. 김칫국물에는 쥐약이니까. 그건 두 해마다 한벌은 사기로, 아니 나에게 사주기로 했는데. 이 정도는 조금 괜찮지 않을까? 뭐 이건 소심하게 생각해 보는 소비녀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해두자.
참고문헌/ 1. 여성의류 제조업체의 기본형 패턴에 활용에 관한 연구(20~30대 여성용 바지 패턴을 중심으로) 2003년 강원배
2. 2020년 2월 21일 패션, 환경과 함께 갈 수 있을까 조선일보 기사 참조
3. 2013년 12월 23일 살아있는 상태에서 오리털 뽑기, 인간이 무섭다-오마이뉴스
4. 2018년 5월 22일 패션업계 "살아있는 오리털 뽑지 말자".. 롱 패딩 가격 상승? 김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