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필요 없는 옷들에게 이별을 고함

그동안 입을 만큼 입었다.

by 단팥
이미지출처-다음 영화



옷은 그냥 단순한 ‘옷’이 아니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블루 스웨터를 껴입고 대단한 지성이나 갖춘 양 잘난 척을 하는데, 넌 자기가 입은 게 뭔지도 모르고 있어. 그건 그냥 블루가 아니야. 정확히 세룰리안블루야. 또 당연히 모르겠지만 2002년엔 오스카 데라렌타와 이브 생 로랑 모두 셀룰리안 컬렉션을 했지. 셀룰리안 블루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백화점에서 명품으로 사랑받다가 슬프게도 네가 애용하는 할인매장에서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수백만 달러의 수익과 일자릴 창출했어. 근데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거 중에서 고심해 선택한 그 스웨터를 입고 있으면서 자신은 패션계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다니 그야말로 웃기지 않나?


베스트셀러 소설 원작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화려한 패션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최고의 패션 매거진 ‘런웨이’에 입사한 앤드리아는 자신의 복장을 이상하게 여기는 직장동료들의 시선이 불편하기만 했고 원래의 꿈은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기에 딱 1년만 런웨이에서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까다로운 44녀들이 가득한 직장에서의 삶은 숨통이 막힌다. 하지만 영화 초반부에 그 명품들 속에 끼어서 예쁜 몸매와 얼굴을 촌스러운 옷 속에 가두고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여주인공을 보는 ‘소비녀’들의 마음은 더 숨통 막힐 일이었다.

나 같으면, 저 명품들을 모조리 다 걸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위해 내 모든 것을 걸어버릴 텐데. 프라다를 입기 위해 악마와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옷, 옷, 옷

옷을 사랑하는 내 성향은 아마도 우리 엄마의 유전자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엄마는 아빠의 사업이 잘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백화점을 다니며 참 부지런하게도 옷을 ‘사 날렸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한 가지는, 바지를 좋아하는 엄마의 ‘바지 옷장’이다. 흰색의 바지에서부터 노랑, 초록 계열, 그리고 붉은 계열에서 검정으로 넘어가는 갖가지 색색의 바지가 일렬로 걸어져 있던 그 옷장. 우리 엄마는 바지에 특히 집착하는 ‘바지 러버’였다.

그런 엄마의 영향으로 나도 옷을 참 좋아했다. 하긴. 소비녀가 뭔들 좋아하지 않을까만은. 겨울이면 봄 시즌의 유행하는 컬러와 소재를 일찍부터 연구하기 시작해 다가오는 해에 나와 가장 잘 맞는 것을 골랐다.

여름은 역시 원피스였다. 시원한 자연소재 리넨이 많이 섞인 베이지색의 단정한 원피스들은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땀에 쉽게 오염이 되고 구김이 없어지지 않아 그것을 핑계로 해마다 사들였다. 가을엔 브라운 계열의 모카, 베이지, 오트밀 등의 색으로 울니트를 다채롭게 모았고 겨울이 되기 두 달 전부터 코트를 한 벌씩 장만했다. 동물 털이 충분하게 섞인 따뜻한 모직 코트에서부터 알파카, 라마, 캐시미어까지.

내가 좋아하는 고급 코트의 백미는 겉감의 소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값지고 비싼 옷일수록 안감이 고급스러웠다. 소매의 안 단과 몸에 닿는 부분의 안감에는 꼭 실크가 있었다. 그것도 이탈리아 수입의 최고급 원단으로.

색상과 소재만큼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패턴이었다. 의복에 있어서 패턴은 디자인한 스타일 화나 도식화를 인체에 맞는 3차원 형태의 의복으로 제작하기 위해서 2차원의 평면으로 표현한 일종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의상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의상과 관련 없는 업계의 종사자지만 늘 옷을 고를 때 패턴이 훌륭한 옷을 골랐다. 고급 의류 브랜드의 능력 있는 디자이너가 선택한 패턴을 믿었다. 옷을 입었을 때 내 몸에 착 감기는 그 짜릿한 느낌. 그것은 훌륭한 패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행복이었다.


그들만의 세계


나는 비싼 옷을 그나마 싸게 입기 위해 그 브랜드의 매니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시즌오프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 나와 친한 매니저는 꼭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주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세일 상품을 골라오고 결제한 뒤, 일주일 뒤 카드를 취소하고 다시 결제하는 방식으로 나는 세일 상품을 선점했다. 브랜드의 포인트에 관심 없는 할머니나 선물용 구매자인 남자 고객들이 놓치는 포인트도 매니저가 나에게 몰아주기도 했다. 나에게 은혜를 베풀기 마다하지 않는 착한 매니저를 위해 난 백화점에 가는 날이면 커피나 쿠키 등을 준비해서 갔다. 백화점에서 그렇게 우리만의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가며.

그러던 어느 날, 나보다 한 수 위인 소비 고수에게서 VVIP들의 백화점 구매방법을 듣게 되었다. 백화점의 구매 담당자가 신상품을 집으로 갖다 주고 백화점 세일 전 미리 문을 닫고 그들을 위한 세일 행사를 먼저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매니저에게 조공을 바쳐가며 세일 상품을 먼저 선점한들, VVIP들을 따라갈 순 없었고, 그들이 사지 않은 ‘남은 상품’들을 마치 내가 처음인 듯 착각하며 입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자, 뭔가 허탈함이 밀려왔다. 월급을 쥐어짜며 좋은 옷을 입어야 하는 나의 행동에 무언가 고장 난 부분이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대견한 내가 되어간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야말로 ‘로또’를 맞지 않는 이상, 나는 그들이 하는 소비 세계에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예쁜 옷을 사랑하긴 했지만 내가 버는 소득 수준에서, 내가 정한 범위에서 ‘행복한 옷의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닌 ‘도박’을 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위험한 소비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옷을 사는 것이 재미있고 설레지 않았다. 예쁜 옷을 보면 여전히 예쁘다고 생각하는 나의 뇌는 살아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줄어들었다. 마치 ‘내가 입으면 예쁘겠지?’에서 ‘아 예쁘네. 끝.’이란 명령어가 뇌 속에 입력된 듯했다. 순간의 구매 충동을 억누르고 며칠이 지나면 기억에서 잊혔다. 무엇보다도 ‘옷’이라는 것에 해방이 되자 당장 다음 달 카드값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카드 고지서를 보면 ‘하나의 할부가 끝났으니 이제 다른 할부를 시작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부가 끝났네. 이제 이 카드 없애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참 대견한 내가 되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옷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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