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겨울 동안 배와 허벅지에 덕지덕지 붙어있게 된 살이 도무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로 긴급 다이어트에 돌입하기로 마음먹고 일단 식단부터 조절해야겠다 싶어서 인터넷 사이트를 뒤졌다.
먼저 인스타 피드에서 많이 보았던 수면 중 다이어트 약부터 샀다. 자기 전에 먹고 자면 마법같이 살이 빠진다는 그 명약. 과연 효과가 있을까? 지난봄에도 살 뺀다고 시켜놓고 먹지 않았던 다이어트 알약이 아직 서랍 속에 반 이상 남아있었지만 그건 효과가 없었으니 이번엔 다른 약을 사 보기로 했다.
단백질 위주로 먹기도 해야 하니, 닭가슴살도 주문했다. 점심, 저녁으로 적어도 하루에 2개씩은 먹어야 하니까 열흘 치를 먼저 시키자 싶어 스무 개를 골랐다. 간식으로는 불포화 지방산이 많은 견과류를 먹어야겠어서 브라질넛이 들어간 견과류 세트도 한 박스 추가했다. 체중 감량 중에는 물도 많이 마셔야 포만감을 유지할 수 있으니 플레인 탄산수도 담고, 어느 연예인이 팥 차를 마시며 살을 뺀 피드가 생각나 팥 차도 추가. 밥을 먹고 싶을 땐 어쩌지 싶어 현미 즉석밥도 한 묶음 담고, 방송에서 보았던 곤약 쌀도 혹 했지만 먹지 않은 것 같아 일단 패스. 인터넷으로 주문할 것은 이제 거의 됐고 내일 퇴근길에는 마트에 가서 방울토마토와 고구마도 사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다이어트라는 것이 식단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이번엔 좀 강하게 해 보자 결심을 하고 운동도 하나 해보기로 했다. 어느 운동이 좋을까 고민하다 친구가 추천했던 회사 근처 필라테스를 떠올리고 내친김에 퇴근길에 들러 등록도 했다. 강습은 회당 6만 원이지만 오픈 특가로 회당 5만 원에 6개월 이상 회원 가입 시 3회 추가 쿠폰을 준다고 했다. 흐흐흐, 나의 다이어트를 온 우주가 밀어주고 있구나! 이번엔 기필코 빼리라. 흐뭇한 마음으로 바로 카드를 꺼내 6개월 강습을 할부 6개월로 결제했다.
필라테스도 시작했으니 예쁜 운동복도 사야 했다. 요즘 핫하다는 기능성 웨어 사이트에 가보니 세상에나, 레깅스가 1+1 행사를 하는 게 아닌가! 기쁜 마음에 레깅스를 담고 브라탑 티셔츠도 두 벌 담았다. 일정 금액 이상 무료배송이라 필라테스 양말을 담았더니 오, 무료배송이 적용된다. 이번 다이어트는 시작부터가 아주 순조롭네. 왠지 살이 쭉쭉 빠질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는 성공할 거 같아?
우리 여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누가 뭐래도 다이어트일 것이다. 선천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여자들은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기적의 몸매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만, 불행하게도 나에겐 그런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이어터 24년 차. 해마다 봄이 오면 정말 꾸준하게 매년 고민했던 고질적인 문제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매년 같은 고민을 24년째 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 또 운동센터 사장한테 전기세 보태주러 또 가냐? 그 사장은 참 좋겠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자릿세까지 내주러 오는 너 같은 애들 있어서.
엄마의 독한 예언은 사실이었다. 결국, 야심 차게 시작했던 다이어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 아파 왔던 필라테스도 다섯 번을 견디지 못하고 발길을 끊게 되었다.
매년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실패할 때마다 엄마가 하는 말이 너무나 ‘진실되고 참된 말’이어서 이번엔 나도 모르게 ‘아멘!’을 외칠 뻔했다. 맞다. 하. 나는 이렇게 빼지도 못할 살을 안고 누군가의 전기세를 보태주러 참 여러 곳을 다녔다.
PT가 유행일 땐 헬스장을 등록해 PT 회원권 10회를 끊어놓고 두 번 밖에 가지 않았고 요가도 등록해 3개월을 결제하고선 고작 3번을 다녀왔을 뿐이었다.
“
바쁘니까 그렇지, 엄마가 직장 생활해봐.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데!
”
그리고 다이어트 실패의 끝은 내 살을 빼게 해 준다며 그동안 남들에게 쥐여준 나의 피 같은 돈 생각을 상기시키는 엄마와의 신경전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렇게 수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성공했다.
이번에는 나도 엄마에게 무언가 보여주리라 다짐했던 어느 날 문득. 수영을 배워보자 싶었다. 어렸을 때 수영을 가르쳐 주지 않아 물에 빠지면 영영 엄마 얼굴 못 보게 될 거라고, 여름이 오면 늘 엄마 탓을 하곤 했다.
수영을 배우는 거야. 그리고 살도 빼고 수영도 배워서 엄마에게 꼭 큰소리를 칠 것이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복수에 활활 타는 마음으로 수영장을 등록했다. 호기로웠던 수영장에서의 첫날, 의욕은 개뿔, 나는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이 날 만큼 ‘극한의 공포’ 속에서 첫 수업을 마쳤다. 물속에 5초만 얼굴을 담갔을 뿐인데 마치 5분을 물속에 있었던 것처럼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절대로 돌이킬 수가 없었다. 헬스, 요가, 필라테스. 더 새롭게 시작할 운동도 없었기에. 하지만 신기하게도 새벽이면 눈이 떠졌고 수영은 꼭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만두지는 않았다.
수영강습 시작만 되면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아프길 두 달여. 이것도 내 운동이 아닌가 싶어 그만두어야 하나 생각하던 차에 드디어 내가 물에 뜨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25미터 풀을 처음으로 완주하자 수영에 재미가 생겨났다. 그런데 재미도 재미였지만 꽉 끼고 불편해서 옷장 속에 깊숙하게 박아놓고 입지 못했던 비싼 바지가 몸에 쏙 들어맞아 어느새 편안하게 꺼내 입게 되었다. 어떤 다이어트 음식을 먹어도 빠지지 않던 뱃살들이 정리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이 가슴을 꽉 채웠다.
아침잠이 많던 내가 새벽에 알람 한 번에 일어나 수영장을 갔으며 퇴근 후 친구들과 모임이나 약속도 줄여가며 집에 일찍 들어와 저녁을 간단히 과일로 때우고 서둘러 잠을 잤다. 몸무게 또한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사상 최저치의 수치를 기록했다. 자유형, 배영, 평영을 지나 접영에 이르며 수영 실력도 나날이 나아지기 시작하자 ‘운동의 맛’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피곤한 날도 다음날 시작될 새로운 수영강습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는 내가 만난 새로운 수영의 세계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너희들도 수영을 해봐, 수영하면 어떤 게 좋은가 하면...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모습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수영의 좋은 점을 설명하는 내가 우습기도, 대견하기도 했다.
아차.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수영 실력이 늘어날수록 다른 사람의 ‘영법’을 보며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 소비녀의 눈에는 이제 예쁜 수영복이 보이기 시작한 거다.
어서 와, 수영복은 처음이지?
그동안 나는 백화점에서 구매한 평범한 수영복을 입었지만, 수영장을 다닐수록 다른 수영 고수들의 수영복은 내 것과는 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의 수영복은 뭐랄까, 색상이 매우 다채롭고 가슴선과 허벅지 라인이 독특하다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어, 저건 뭐지? 재빠르게 그들의 수영복을 스캔한 나는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핸드폰을 켜 수영복을 검색하기 시작해 기여코 찾아냈다.
호주에서 만들어진 수영복은 과감하게 낮은 가슴 라인과 허벅지의 컷이 매우 예쁘고도 ‘부담스러운’ 수영복이었다. 해외 직구를 해 사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내가 그것을 입을 수 있느냐였다. 평소 노출을 하지 않던(자신이 없어 못 하던) 비교적 단정한 류의 옷을 입던 내가 과연 저 수영복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고민은 잠시였다. 어느새 나는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내 카드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
또 뭘 샀냐? 이제 엄마 알아보지도 못하게 영어로 된 걸 시키네. 어이구, 누구 탓을 하겠어 내 탓이지, 내 탓이야.
”
도착 알림보다 빠른 엄마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퇴근 후 재빠르게 집으로 달려가 포장을 뜯었다. 역시 예상대로 수영복은 매우 과감했다. 분명 외국 언니들이 입었을 땐 예뻤는데, 수영장의 인어 언니가 입었을 땐 멋있었는데. 시 착을 해본 결과는 대실망이었다. 나 같은 토종 조선 여인의 몸엔 전혀 맞지 않는 어찌 보면 예상된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소비녀가 아니었다. 분명 나에게도 맞는 수영복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수영복의 세계로 더 깊게 빠져들었다. 나는 수영인들이 사랑하는 모든 디자인의 수영복을 섭렵하고 예쁜 수경과 수경 끈과 수영장에 가지고 다닐 백 팩, 향기가 좋은 샤워용품, 운동 가는 티가 풀풀 나는 ‘수영장 출근용’ 운동복도 구매하느라 바빴다.
수영을 잘하면 잘할수록 수영 물품에 대한 나의 욕망도 커져만 갔다. 수영장은 지자체 운영 기관이라 한 달 강습비는 5만 원 미만이니 대신 수영복에 그까짓 것 좀 투자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닭이 먼저야, 달걀이 먼저야?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위해 온갖 물건을 사들이고 무리하게 비싼 돈이 들어가는 운동을 시작했던 나와 운동에 성공해 새로운 소비지출을 세워버린 나. 둘 중 누가 더 잘못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는 것같이 애매한 문제였다.
살이 빠지기 전에는 몸을 가리기 위해 어둡고 루즈한 핏의 옷들을 사들였고 살이 빠진 이후에는 자신 있게 몸을 드러내기 위해 타이트한 핏의 옷들을 사들였다. 이러나저러나 돈을 많이 쓰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나는 늘 ‘동기’라는 것을 ‘수단’이라는 포장지로 그럴듯하게 감싸서 표현해 왔다. 다이어트라는 동기도 ‘다이어트 식품’이라는 수단을 이용했고 거기에는 또 엄청난 지출이 따라왔다. 수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멋지게 수영을 잘하는 것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지만 나는 돋보이는 나의 수영을 위해 또 엄청난 지출을 감행하며 ‘수영복’이라는 수단을 이용했다.
한 연구자는 나와 같이 ‘제품’을 이용하여 외모를 관리하는 것은 자존심을 높이는 수단일 수 있고 자기 만족감이나 자기 개성의 실현 또는 자아 감각을 높여서 이상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외모의 관리는 늘 외부적인 것에서부터 연결이 되었다. SNS 피드에서 보았던 여성들의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보다는 그들이 사용하는 무언가에 더 집중했던 것이며, 나 또한 그 제품들을 사용하면 그들처럼 날씬하고 예뻐질 수 있다는 ‘이상적인 이미지’만 지나치게 추구했다.
내가 수영을 잘할 수 있게 된 다음에도 나는 내가 무언가 성취했다는 만족감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새로운 소비 세계에 발을 들이며 한 단계 더 나아간 ‘나의 모습’을 원했다. 자신감이 생긴 만큼 더 프로다운 옷을 입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이길 바랐다.
나다운 모습을 찾아
수영을 시작한 지 고작 2년이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수영복을 다 꺼내어보니 세상에나 10개도 넘었다. 처음 시작할 때 멋모르고 샀던 반바지가 달린 수영복은 나에게 전도되어 수영을 시작한 회사 동료에게 선물로 주었다. 맞지 않는 펑키 트렁크의 수영복은 아깝지만 나보다 더 잘 입어줄 분에게 중고거래를 통해 정말 저렴하게 판매한 뒤 감사 인사도 받았다. 등 부분이 예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등 살이 튀어나와 입지 못했던 수영복은 나보다 날씬한 친구에게 선물했다. 수모와 수경까지 어찌어찌 정리하니 내가 자주 입던 두 개의 수영복만이 남게 되었다.
치열했던 수영복의 세계에서 발을 빼자, 수영한다는 것의 의미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물속에서 느끼는 고요한 침묵과 부드러운 물살의 느낌이 발바닥에서 온몸으로 전해져 올라왔다. 한 시간의 수영을 위해 투자했던 그 많은 돈을 물을 젓는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며, 가쁜 숨을 물 밖으로 내뱉었다. 집착하던 것들을 떠나보내자 나는 더 나다운 모습이 되어가는 듯했다. 여전히 다른 영자들의 수영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영법을 보는 것이었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였다. 살이 빠지는 데 도움이 되는 데엔 어떤 음식이 좋다더라. 검색하고 구매할 시간에 짐을 싸 수영장에 다녀오는 것이 훨씬 더 현명했다. 20년이 넘게 온갖 다이어트와 음식 지출에 정말 많은 돈을 쏟아붓고 나서야 깨닫게 된 소중한 성찰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쓰고, 모으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씩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분명 더 행복해져 가고 있었다. 소비를 줄이며 생긴 내 삶의 자리에 작은 행복들이 오히려 하나씩 차곡차곡 더해져 가기 시작했다.
참고문헌/여성의 외모 관리 행동에 대한 자아존중감과 정보탐색에 관한 연구 (2012 이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