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무리하게 맨 앞자리에서 좋아하는 배우의 뮤지컬을 보고, 읽고 싶었던 책의 양장본 세트 10권까지 구매하자 당장 그다음 달 카드 값이 폭탄이었다. 얼굴은 당연히 초주검이었고 얼굴이 왜 그러냐는 친구의 걱정에 나는 돈이 없다며 투덜댔다. 친구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나에게 뾰족한 말 한마디를 뱉었다.
“
너는 꼭 돈이 없어 죽겠다면서 핸드폰은 늘 최신 기종이야. 가방도 옷도 그렇고. 사람들이 안 믿을 거 같아 네가 돈 없다는 말.
”
친구의 말에 창피함이 발끝에서 머리끝으로 벌겋게 전해졌다. 나는 늘 외적 요소에 집착하며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이 어느덧 습관화된 사람이었고 반면 통장은 늘 가난했지만 이런 나를 보는 누구도 나를 가난하게 보지 않았다. 친구의 말로 발가벗겨진 나의 창피함과 부끄러운 감정이 뒤섞여 어찌할 줄 몰라 나는 입을 비죽거리며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역시 이런 내가 사용하는 핸드폰은 언제나 최신 기종이었고 2년 약정만 겨우 채워 당시에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다.
고객님, 아니 호갱님!
새로운 핸드폰이 출시될 무렵이면 참 기가 막히게도 기존 핸드폰의 약정기간도 마무리가 되었다. 24개월 약정이 끝나면 또 새로운 약정을 시작하고 요금제는 통신사가 정해주는 가장 최고가의 요금제 사용해야만 했다. 핸드폰의 기계 값은 카드로 선 결제를 하고 카드 사용금액만큼 포인트 할인을 받아 사용하는 조건도 함께. 30만 원 이상 카드를 사용해야만 요금 할인도 받고 핸드폰 할부금도 차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핸드폰만 바꾸고 숙제처럼 30만 원을 넘겨 카드를 쓰다 보니 카드 값이 더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은 정해진 바 다름없었다.
새로운 아이폰이나 갤럭시가 출시되면,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 몇몇이 꼭 핸드폰을 교체한다. 그중 단연코 1등은 올해 24살인 막내 신입이었다. 어린 친구들은 꼭 최신 아이폰으로 바꾸는 경향이 있었다. (어리지도 않은 나는 뭐냐고) 이른바 콩나물이라고 불리는 아이팟도 꼭 세트로 샀고 아이팟을 담는 케이스도 색 색깔로 예쁘게도 장만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막내가 새로운 기종의 아이폰으로 핸드폰을 교체하자, 직장에서 구두쇠로 소문난 선배가 이렇게 물었다.
“
그래서, 핸드폰 기계 값은 얼마인 거야?
”
신입은 말하지 못했다. 나이 많은 이의 자린고비 마인드로 정곡을 찔러 불편하다는 표정이 한눈에 나타났고 ‘요금제 어떤 걸 쓰면 얼마예요’라고 얼버무리며 새 핸드폰의 개통식은 어정쩡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신입 역시 막상 자신이 내야 하는 핸드폰의 원가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 말을 들으며 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나도 내 핸드폰의 정확한 가격이 헷갈리긴 마찬가지였다.
영화 월-E, 내가 지구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최신 휴대폰이 왜 필요하겠어.
편리함을 위해 내가 지금 버리고 있는 돈은 얼마?
새로운 핸드폰으로 교체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속도가 더 빠르다’였다. 인터넷이나 앱 설치 등의 속도를 느낄 수 있는 것을 사용할 때 좋은 핸드폰은 그만큼 더 빠른 속도를 내주었다.
그렇게 빠르고 편리한 것은 비단 핸드폰뿐이 아니다. 굳이 직업적으로 전문가다운 작업이 필요하지 않는데도 간단한 인터넷 서치, 영화나 미드 감상 등의 용도로 쓰는데도 가볍고 빠른 최신형의 노트북이나 패드 등을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좋은 IT 기계를 구비하는 이유를 찾아보려 해도 가볍고 빠르고, 셀카가 예쁘게 나온다, 음질이 좋다 등의 이유 빼고는 내가 그것들을 꼭 사야 할 필수적인 이유를 말할 수가 없다.
그저 내가 원하는 새로운 기기에 대한 욕심, 나도 ‘신제품’을 사용한다는 허울 좋은 변명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빠른 속도의 핸드폰을 사용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음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좋은 귀를 가지지도 못했고 가벼운 노트북으로 여기저기 이동하며 일을 해야 하는 처지도 아닌데. 너무 편안한 것에 젖어버려서 그런지, 나는 항상 빠르고 편리한 것에 길들여져 내 통장을 텅 비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취향을 아는 줄 알았더니 유행을 따랐더라.
일상적인 공간에서 다른 행위자나 집단과 차별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내면화된 가치체계로서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취향’이라 부른다. 새롭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빠르고 편리한 휴대 가전 기기의 구매도 어찌 보면 나의 취향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비용의 문제와 직결된다. 아무리 편리를 위한 소비라도 내 소비의 한도를 넘어선 ‘과소비’를 한다는 것, 빠르고 편한 개인 휴대 기기 사용이 좋다 하더라도 아직 쓸만한 휴대폰을 굳이 최신 핸드폰으로 얼마인지도 모른 채 카드 할부에 약정까지 걸어가며 구매하는 것. 나는 다른 이들처럼 빠른 세상을 알아간다는 ‘변명’을 만들어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다 찢어질 지경에 처했고, 그저 ‘유행’을 따라갔다는 내 안의비난에 가슴이 쓰렸다.
진정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 먼저 해보기
나는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들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신형 핸드폰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만큼은 그걸 광고하는 연예인처럼 보일 거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의 손안에 있는 것과 같은 물건을 사용하며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쩌면, 흙 수저인 내가 통장을 탈탈 털어, 카드 한도를 꽉꽉 채워가며 했던 ‘환상 체험’은 마치 합법적인 마약과도 같은 게 아니었을까? 카드 한 번만 긁으면, 약정 24개월만 채우면 나도 그들과 같은 것을 소유할 수 있었기에.
그런데 조금 다른 방향에서 나를, 내 현실을 생각하자 싶었다. 나는 그 대단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계들을 내 손안에 들였을지 몰라도 내 통장은 텅텅 비어있다. 내 현실을 잠시 환상이라는 환각으로 채웠을 뿐이지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핸드폰은 고장 나면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은 이제 고장이 나면 바꾸는 것이라 단정했다. 환각으로 채워버린 내 삶이 그러한 장치가 없더라도 통장이라는 나의 내적 공간이 좀 더 안락 해 질 때까지, 나는 참고 또 참으리라 다짐했다.
-이제 다음 편부터는 소비라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우리들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참고문헌
문화예술상품 속성 및 문화 소비성향이 고객 만족과 행동 의도에 미치는 영향 연구 2015 최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