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소비를 단박에 끊어버리는 것은 정말 어렵다. 매일 하루에 한 개씩 사탕을 먹던 어린아이에게 ‘이제 사탕은 없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울고 불고 난리가 날 것이다.
예전의 당신은 일주일 모두를 ‘소비하는 날’로 살았다면 처음에는 5일을, 그리고 3일을, 그리고 나중에는 1일로, 한 달에 한 번으로 이렇게 줄이며 조금씩 소비와의 이별에 다가가야 한다.
퀴블러 로스라는 의사는 자신이 지켜본 말기 암 환자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5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정리하였다. 첫 번째 부정의 단계, 두 번째 분노의 단계, 세 번째 타협의 단계, 네 번째 우울의 단계, 마지막 수용의 단계다. 이 이론은 비단 죽음뿐이 아닌, 인간이 겪는 여러 가지의 상황에 대입되며 소개되기도 한다.
뭐 쇼핑이라는 것이 ‘뭣이 중헌데’ 이 심오한 이론까지 갖다 붙이냐 한다면 송구하기 그지없지만, 쇼핑으로도 자칫 인생이 망가지고 패가망신할 수도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쇼핑을 중단하려는 금단현상을 겪고 받아들이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나와 같은 과정을 겪고 있을, 혹은 겪어야 하는 독자들을 위해 퀴블러 로스의 이론을 쇼핑 금단현상에 대입해 보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이 속한 단계는 지금 어디쯤인지 생각해 보고 마지막 단계까지 좀 더 힘을 내보길 바라며.
소비 중단의 5단계
1. 부정의 단계- 내가 가방이 많다고? 아니야, 이 가방은 나에게 꼭 필요해.
2. 분노의 단계- 내가 나를 위해 이렇게 예쁜 가방도 사지 못한다면 뭐 하러 힘들게 돈을 벌어!
3. 타협의 단계- 그래도 저축이 중요하니까 이것과 비슷하지만 저렴한 가방을 찾아봐야겠다.
5. 수용의 단계- 내가 그동안 쇼핑하느라 버린 돈이 얼마인데 이깟 가방에 쓸데없는 쇼핑을 끊겠다는 나의 결심을 중단할 수는 없어. 더 참아보자. 할 수 있어!
그래도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당신에게
만일 당신이 5단계의 수용까지 이르지 못하고 4단계의 우울에서 멈추어 있다면 지금이 당신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우울한 기분은 자칫 과소비를 부르기 때문이다. 쇼핑 중독은 신체적으로도 의존되어 있어 쇼핑을 중단하는 상황이 되면 불안,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등의 신체적인 금단 증상이 생기며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쇼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상태가 나타나는 등 심리적, 육체적 부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이 우울하고 불안한 이유는 당신 탓이 아니다. 오랫동안 당신이 쇼핑에 두었던 습관과 의존과 쾌락이 한데 뒤섞여 당신의 마음을 꽁꽁 싸매고 놓아주지를 않는 것뿐이다.
Here and Now의 소비
소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를 위해 심오한 심리학 이론을 하나 더 갖다 붙여보자.
심리 상담에서 상담자가 내담자의 모든 문제를 현재로 가져와서 다루는 용어를 ‘here and now’라고 한다. 즉, 지금 내담자에게 진행되는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보다는 내담자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과 정서에 주목한다. 과도한 소비를 부르는 과거의 우울하고 불안한 정서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비생활이 과연 지금, 여기에 맞는지를 생각한다면, 나의 ‘소비 정서’는 아마 이전보다 더 건강하고 튼튼하지 않을까?
나는 의류회사에 다니는 '좋은' 친구가 가끔 옷을 준다. 나의 소비생활을 줄여주는 효녀 같은 친구이기에, 회사 생활이 힘들다는 푸념을 늘어놓으면 자칫 회사를 그만둘까 봐 앞장서서 말리는 중이다. (제발 그만두지 마!)
친구는 의류업계 종사자지만 옷을 사는 거에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옷을 주며 우스갯소리로 ‘너는 의류 쪽에서 일했으면 망해도 진즉 망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자기같이 입고 걸치는 거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가끔 동료들이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주눅이 들 때가 있는데 물욕 많은 너는 정말 심했을 거라고도. 덧붙여 친구는 별로 사고 싶지 않은 옷이라 하더라도 회사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것도 있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말을 듣고 소비가 마냥 즐겁지 않은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일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소비가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고 인정받기 위해 하는 ‘필수 불가결한 소비’를 말하는 것이다.
타인을 대면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외모를 깔끔하게 가꾸기 위해 하는 소비도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비에도 적당함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소비의 바탕에 ‘나의 경제적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과거의 소비생활을 반성하고 Here and Now 속에 나만의 적당한 그 접점을 찾아야 한다.
쇼핑도 일하듯이
꾸준하게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보통 아침에 출근해 점심을 먹고 저녁 시간에 퇴근한다. ‘루틴’한 일상을 갖는 것이다. 일할 때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한다. 만나는 사람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보기 싫은 상사 앞에서도 최대한 나의 감정을 숨기고 대한다. 회사에서 화가 난다며 소리를 지르며 악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집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친구나 연인과 싸움을 했다 하더라도 회사에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쓴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해서 돈을 벌고 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쇼핑도 그렇다. 당신이 물건을 산다는 것에 당신의 욕망, 감정을 집어넣지 않아야 한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물건을 과도하게 사거나 기분이 우울하다며 아무거나 사버리는 것은 나를 지키는 행동이 아니다. 돈을 벌려 일할 때는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어렵게 번 돈을 쓸 땐 우린 왜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았던 걸까?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먼저 그것에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지 3번 이상 생각해 보고 그래도 사야 한다면, 핸드폰 메모장에 그 물건의 이름과 브랜드, 가격을 적고 내가 그 물건을 사야 할 이유를 써보라. 아마도 10개라는 물건이 있다면 그중 9개는 아무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쇼핑에 어떠한 참견도 하지 못한다. 그저 내가 그동안 걸어온 소비의 길을 보여주고 물건에 대한 덧없는 욕망과 욕심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는가를 알려주기만 했다. 적당한 소비도 나는 당신의 기준에서, 당신의 삶에서 그것이 어디 즈음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소비와의 거리를 최대한 ‘적당하게’ 유지하면 된다. 가까워질 필요도 없고 너무 먼 것처럼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적당한 소비란 지금 내가 속한 이 자리에서 나의 필요와 불필요를 구분하는 ‘나를 지키는 소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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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 '소비와 기꺼이 사랑하는 방법'을 말해보려 합니다. 그동안 쓰지 마라고만 해서 많이 슬프셨죠? 이제는 좀 쓰는 법도 알아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