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의 영화 ‘블루 재스민’은 상위층 1%의 삶을 누리다 남편의 사업 부도와 이혼으로 하루아침에 하층민으로 전락한 재스민의 삶을 자조적이고 풍자적인 시선으로 담은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이 주인공 재스민의 연기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하기도 했고 여성의 허영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잘 그려내서 나 같은 소비녀의 현타용 영화로 적극 추천한다.
영화는 재스민의 완벽한 삶부터 보여준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에 돌아버린 재스민의 실수로 그녀는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 무시하던 동생의 집에 얹혀살며 돈이 궁한 재스민은, 부자였을 때 사놓았던 예쁜 옷들로 멋지게 치장하고 거짓 속에 자신을 담아 새로운 남자와의 로맨스로 현실 탈출을 꿈꾸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 예쁜 포장지로 감싼 여자의 민낯의 말로. 그것은 우습고 비참했다. 껍데기로 감싼 자신의 실제는 허상뿐이었다.
내게는 재스민과는 다르게 겉모습은 수수하지만, 속이 꽉 찬 지인이 한 명 있다. 그녀는 먹는 것과 배움에는 늘 돈을 아끼지 않지만, 자신이 쓰는 모든 물건은 정말 오래된 것들이 많다. 처녀 적 스물다섯에 쓰던 선풍기를 20년이 지난 아직도 쓰는가 하면 낡은 지갑은 결혼할 때 남편에게 선물 받은 것 그대로다.
짠순이로 유명한 그녀가 오랜 고심 끝에 최신 공기청정기를 장만했다.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고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정말 큰 결심이었다.
그녀를 만났던 날, 나는 얼마 전까지 아이 둘이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가는 중고등 학생이라 한 달에 들어가는 학원비만 해도 엄청나다며 한숨을 쉬었던 그녀인데 어떻게 그 큰 결심을 했는지 웃으며 물었다.
내 주변 사람들도 너처럼 내가 돈을 잘 안 쓴다고 생각해. 정말 나의 외모에 가꾸는 지출은 거의 없는 편이거든. 화장품도 늘 친구에게 샘플을 얻어 쓰고 지금 입고 있는 외투도 한 10년은 되었는걸. 그런데 우리 가족이 먹는 것에는 단 한 번도 돈을 아껴본 적이 없어. 소고기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늘 정육점에서 고기를 대 먹다시피 하고 유기농 채소 배달도 받아서 아침마다 녹즙을 갈아 마시지. 그런데 요즘 미세먼지도 그렇고 코로나도 걱정이잖아. 그래서 큰 맘먹고 공기청정기를 들인 거야.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옷에 들어가는 지출이 넘치자 당장 기본적인 생활비부터 아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가 좀 더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출보다 남들에게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한 지출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가 보았던 영화 속 ‘블루 재스민’의 모습이 꼭 나인 것 같았다. 문득, 콩나물 값 100원은 유난스레 아끼면서 샤넬 가방은 몇 개라던 몇 다리 건너 누군가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그동안 재스민처럼, 100원씩 아껴 샤넬 가방 산다던 여느 여자처럼, 나를 감싼 껍데기에만 충실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마치 내가 몇십만 원짜리 커피잔에 담긴 인스턴트커피 같은 느낌으로 살아왔던 것 같이 느껴졌다.
영화 블루 재스민 스틸컷. 출처 다음영화
우리의 생활이 윤택해진다는 것
‘윤택’이라는 뜻은 반질반질하고 윤이 나다는 뜻도 있지만 ‘살림이 풍부함’이라는 뜻도 있다. 요즘 광고에서 우리의 살림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는 가전제품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공기청정기와 식기 세척기, 건조기 등이 이에 해당하는 제품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지만 있으면 좀 더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물론 과도한 소비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은 소비라고 하더라도 이런 가전제품까지 모두 섭렵을 마쳤을 수도 있다. 대형 가전 구매를 위한 무이자 장기 카드 할부와 카드 선결제 후 사용금액만큼 포인트로 차감하는 등의 카드를 이용한 구매 프로그램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잘 알고 컨트롤할 수 있는 소비자가 이런 윤택함을 낳는 소비를 하는 것은 꾀나 적절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평소 천식으로 고생했던 사람이 의류 건조기를 들이고 드디어 편안한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경우나 손에 습진이 심한 사람이 식기 세척기를 들이고 드디어 습진에서 해방되었다는 경우도 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퇴근 후 집에 들어와 쌓여있는 설거지를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남편과 많이 다투었는데 식기 세척기를 들이고 나서 부부의 사이가 드디어 평화를 되찾았다는 말도 했다.
내가 행복한 소비가 정답일 수 있다.
우리의 삶에는 정답이 없다. 그저 매일 바뀌는 새날을 살아가며 오늘도 내가 살았던 시간을 돌이켜 볼 때 후회가 많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나는 내가 하는 소비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옷과 구두, 가방에 집중했던 지난날을 문득 돌이키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통장을 볼 때마다 한숨이 쉬어졌다. 소비를 할 때 행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진짜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욕망’을 충족시키며 순간의 만족이 행복이었다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행복을 위해 ‘기꺼이 하는 소비’를 생각한다. 가족의 맛있는 저녁 식사를 위해 품질 좋은 소고기를 사 먹고 건강을 위해 공기청정기를 들여놓고 건조기를 구매하는 짠순이들에게 소비의 후회는 없었다.
만일 당신이 ‘그래도 나는 맛있는 그 어떤 음식보다, 깨끗한 공기보다 옷이 더 좋고 행복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 소비를 기꺼이 지지한다. 누구도 나의 행복을 가로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자신이 있다면 더더욱 그 소비를 지지한다. 우리 삶의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