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어요.
당신도 보고 있겠죠.
당신은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했죠.
저도 그래요.
젖은 흙은 무르고, 진흙물에 몸이 더러워지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좋아했던 당신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전 지금도 느리지만 꾸준하고 확실하게 당신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화창하게 햇빛이 비치는 날씨는 저에겐 정말 끔찍해요.
쨍한 햇살은 너무나도 뜨겁고, 여기저기 보이는 벌레들은 징그럽죠.
아시잖아요. 전 벌레들을 무서워해요.
제가 벌레를 보고 무서워할 때면 당신이 나서주곤 했죠.
이제는 당신이 곁에 없어, 벌레들이 코 앞에 기어다녀도 전 손 하나 까딱 못하고 무기력하게 떨 뿐이랍니다. 고작 벌레 몇 마리에도 당신의 빈자리가 느껴지는게 참 웃기네요.
그래서인지 이제 저는 그저 비 내리는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후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계절은 많이 변했지만, 제 마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당신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 덕분일까요. 당신 때문일까요.
정말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사실 이제 당신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시간이란건 많이 무거운 것 같아요.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니 말이에요.
그래도 제 손목에 당신이 사준 시계를 여전히 차고 있어요.
무거운 시간들이 담겨있어서 그런지 작은 시계지만 참 무겁게 느껴집니다.
전 점점 야위가는지 .. 왜 시계끈이 점점 헐렁해질까요.
시계에 약이 다 떨어져 시계바늘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때, 전 더이상 당신을 그리는 날들을 세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전 당신을 반드시 알아볼 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말 보고 싶어요. 얼마 지나지않아 제 오랜 기다림이 결실을 맺을 거라 믿어요.
사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제게 주었던 그 마음을 꼭 보답하고 싶어요.
비가오니 제가 많이 감상적이게 된 것 같아요.
당신과의 마지막 날이 생각이 나네요.
당신은 착한 사람이었죠.
가끔 스스로 화를 못이겨 크게 목소리를 높히곤 했지만요.
그 날 당신은 제가 많이 미우셨나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빨간장미가 심어진 화분을 제게 던지셨잖아요.
봉오리도 다 피지 못한 꽃이었는데....
빨간 장미는 애꿎은 제 관자놀이에 피어났죠.
흩날리는 꽃잎들이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어요.
함께 돗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던 집 뒷뜰에 이번엔 처음으로 혼자 눕게 됐어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려 하늘을 올려다보려는데 절 내려다보는 당신의 모습이 보였어요.
그날도 비가 조금 떨어지더라구요. 빗방울치곤 조금 따뜻했지만요.
저와 눈이 마주친 당신은 꽤나 놀랐나보더라구요.
첫만남 때, 당신은 저의 가는 목에 반했다고 했었죠.
그래서 제 가는 목을 당신의 두 손아귀로 안아준걸까요?
가까이서 본 당신의 눈에 담긴 제 모습이 빨간 장미꽃밭 같았어요.
그렇게 당신은 뒷뜰에 큰 꽃을 하나 심었죠.
그래요.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어요.
당신도 보고 있겠죠.
당신은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했죠.
저도 그래요.
젖은 흙은 무르니까,
이런 날은 조금씩 당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어요.
아, 지긋지긋한 벌레들이 또 제 앞에 기어가네요.
제 몸 속에서 기어나온걸까요?
저의 두 눈이 있던 곳은 텅 비어버려 더이상 당신을 담을 순 없지만, 전 그래도 반드시 당신을 알아볼 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무거운 시계를 차고 있는 왼손이 드디어 땅 밖으로 나왔네요. 그 바람에 시계가 벗겨졌어요.
시계는 헐렁거려서 이제 찰 수가 없겠어요.
아무튼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곧 보겠네요.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 당신에게 보답하러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