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영화 : 달콤한 인생> 잡담 글

by 정민쓰




짧은 영화 잡담글_<달콤한 인생>










예술성과 감성개복치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걸까?


나는 문화예술을 아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런 나 역시 언제나 예술적 자아가 가장 끓어오르는 순간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가장 취약할 때였다.



혼자 살며, 온갖 부정적 감정에 취했던 시기에 본 수많은 영화들 중 대부분은 아직도 나의 황금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내가 대단한 예술가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히스테리, 편집증 등등 예술인들이 시달리던 '그 무언가'가 어떤 건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달콤한 인생>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같다.

내용이 어린 왕자 같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볼 때 다르고, 저렇게 볼 때 다르고, 극 중 누구의 시선에서 몰입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몇 살에 보느냐에 따라 또 느낌이 달랐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병헌의 이병헌에 의한 이병헌을 위한' 영화라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이병헌 배우가 연기무쌍을 찍으며 상당한 기량을 보여주는 영화임에는 확실하다. 하지만 이에만 매몰되서 보기에는 영화의 작품성이 너무나도 아깝다.








배우분들의 이름에 호칭 및 존칭은 편의 상 생략하고...

영화의 시놉은 대략적으로 보스인 김영철과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조직을 함께 이끌어 온 이병헌.

어느 날 김영철에게 생긴 젊은 애인인 신민아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이병헌이 묘한 감정변화를 느끼면서 진행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아주 유명한 대사들이 있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꿈을 꾸었습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몰랐어? 인생은 고통이야' 등등..

공교롭게도 많이 희화화가 되곤 하는 저 대사들은 이후 후술하겠지만, 하나같이 영화의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대사들이다.




극 중 모든 인물들은 큰 틀에서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선형적이지만, 그 디테일한 과정은 퍽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좋은 영화는 확실히 어느 인물들이던 한 명 한 명 허투루 빚어놓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각각 인물들이 감정의 격동을 느끼는 사건들은 짜임새가 있으며, 스파크가 터지는 감정회로들이 주조연급 역할들에서도 모두 흥미롭게 나타난다. 한 명 한 명의 인물을 모두 구구절절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들의 감정변화는 뻔하면서 뻔하지 않다. 무미건조함 속의 생명력과 약동 속의 고독함까지도.




감정적인 생동감이 펄떡펄떡 뛰는 활어 같아서 그야말로 싱싱한 인물들이 영화를 그려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이 영화는 '왜?'라는 의문을 일부러 배제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이래서 이랬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다.'라는 말을 명쾌하게 해주지 않는다. 정답을 화면 속에 나름대로 배치했지만 이게 정답이다라고 말해주진 않으며 심지어 그것이 명쾌한 정답지도 아니다.

영화 내적으로 봤을 때에도 모든 인물들이 크게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본인의 사고체계에서 나름의 합당한 정답을 가지고 움직이기에 그들은 큰 물음이 애당초 필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엄청 쫌스럽지만은 않은 서울깍쟁이 같다.


관객이 유추할 수 있는 나름의 정답은 영화를 쭉 봤다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깔끔하게 도출되지는 않는 넓은 바늘구멍이다. 이 느낌은 상술했듯, 인물들의 싱싱한 감정흐름에서 기인한다.






?? : 나한테 왜 그랬어요?

?? :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나에게 영화 후반부에 터져 나오는 전개는 카메라웍과 액션이 만들어낸 장면의 속도감보다는 터져 나오는 대사와 연기들로 강한 카타르시스를 터뜨려줬다.




이병헌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던 맹목적인 충신이었다. 저 대사는 사실상 그가 그의 보스에게 영화에서 처음으로 가졌던 강렬한 의문이다. '나한테 대체 왜 그런 거야? 진짜 모르겠거든? 진짜 제발 말 좀 해줄래?'라는, 터져버린 감정과 울분을 힘주어 토해내는 짙은 농도의 질문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가장 맛이 입에 퍼지는 순간이다.




김영철은 이 대답마저 삐진 애인같이 두루뭉술한 대답을 한다. 재밌게도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그의 대답은 두루뭉술하지만, 파고들어 가면 생각보단 정직한 답변이다. 이 대답의 저의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영화가 주는 가장 큰 숙제이며 이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속된 말로 이병헌을 담그려고 하는 김영철의 행동은 얼핏 엄청나게 납득될 만한 당위성이 있진 않다고 보일 수도 있다.




이병헌은 보스의 애인에게 품은 연정을 드러내도 않았으며 그녀와 야반도주를 하지도 않았고, 반대파에 붙지도 않고 끝까지 김영철에게 충직했다. 우리는 관객으로서 이병헌의 스토리텔링을 알 수 있기에 김영철이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품게 되고 그와 함께 이병헌이 느끼는 감정 또한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투영된다.



'저 진짜 생각 많이 해봤는데, 도저히 모르겠거든요.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가질 수 없는 것을 열망해 본 적이 있습니까?,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하려 해 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해보고 싶다.




인간은 나이가 들며 감정이 농익어 성숙해지고 맷집이 생기지만, 본질은 더 복잡해진다. 해답에 도달하는 현명함이 커진다는 것은 동시에 경험의 풀이 넓어지며 그만큼 더 많고 깊은 골이 파여있다는 뜻이다.

나이 들면 쿨해지면서도 동시에 쪼잔해지는 이유일 듯하다.




김영철은 높은 위치에 서 있는 본인이 무슨 짓을 해도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을 것 같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곳에 한 치의 의심도 해본 적 없는 충실한 사냥개가, 자신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손에 쥔 채, 자신의 역린 위에서 춤을 추는 걸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명예와 이름, 세월이란 물속의 탄탈로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었을 테고, 더할 나위 없는 쓴 맛이었을 것이다.




스크린을 통해 멀찍이 제삼자로 그들의 서사를 보는 게 정말이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달콤하지 않은 인생사네.... 분명 달콤했는데.... 왜 점점 뒷 맛이 써지는 건지.


샷을 많이 넣은 라테 같았다. 무슨 원두를 넣었을까.



샷(shot)을 많이 넣은 쇼트(shot)라니








예술에 대해서는 어지간한 모든 감상들을 존중하는 입장으로서 항상 내 감상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왜인지 어느 쪽도 완전히 밉지 않은 영화일 거라는 점은 말하고 싶다.



1차원적인 눈으로, 액션영화로 영화를 볼 때는 이병헌의 서사에 집중하고 은연중에 그의 편을 들었지만, 나이를 더 먹고 차분히 영화를 다시 보니 김영철의 모습에 훨씬 마음이 갔다. 그가 느낀 공허함과 상실감은 이병헌을 더없는 악역으로 보이게 했을 것 같다.

시기/질투는 바빌로니아, 이집트부터도 문화예술에 끊임없이 등장해 온 소재이고, 이는 곧 이것이 시공간을 초월하도록 강력한 인간적 감정인지에 대한 방증이다.


그리고 김영철도 그저 보스란 감투를 쓴 인간일 뿐이었다.








'라 돌체 비타', 그들은 너무나도 달콤했던 각자의 무언가로 인해 당뇨병에 걸려버린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나친 달콤함이 씁쓸함을 낳았다.

너무 달콤했기에 누리고자 했고, 누리지 못했고, 혹은 너무 누려버린, 꽤 유치한 인간들의 씁쓸한 난장이었다.




구구절절 감상을 이야기할 만한 구석이 너무 많은 영화였지만 과감히 베어내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들로 겨우 채워 넣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돌려 말하기만 하는 깍쟁이 같은 영화에서 그래도 가장 직접적이었던 마지막 내레이션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깬 제자가 울고 있었다.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3화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