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영화 : 헤어질 결심> 잡담 글

by 정민쓰



짧은 영화 잡담글_<헤어질 결심>


강력 스포주의





싱숭생숭류 영화 갑










타지에 여행을 와서 시간이 남아 보게 된 영화이다.

왜 영화가 그렇게 다들 좋다고 하는지,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왜 박찬욱 감독인지 새삼 느끼게 된 영화이다.



영화나 영상이 주는 아티스틱한 느낌도 당연히 훌륭하지만, 그 이전에 영화는 또 왜 이렇게 재밌음...? 시청하면서 뒤로 가고 일시정지하고 메모하고 별별 짓을 다하며 꼭꼭 씹어먹었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미스터리 한 묘령의 여인이 등장하고 그녀의 존재가 스토리의 주축이 되는 영화는 꽤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영화들은 필연적으로 '묘령의 여인'의 연기기량이나 독보적인 분위기가 아주 중요한데, 탕웨이(서래 역)는.... 역시나 역시였다. 진짜 끝내줌. 이만큼 캐릭터를 표현하는 역량을 가진 배우는 더 있겠지만, 지문처럼 귀속된 그녀만의 느낌을 주는 배우는 없을 것 같다. 그녀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홍콩 로맨스영화의 느낌도 영화에 살짝 묻어있는 느낌이 든다.




난 처음에 박해일(해준 역) 배우의 보이스톤이 다소 거슬렸다. 하지만 이는 아직 영화의 톤 & 무드가 나한테 다운로드되기 전인 초반부였기에 들었던 생각이었고,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긴 후부터는 해준의 대사톤이 오히려 독특한 캐릭터성이나 영화의 분위기를 아주 잘 살려주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상당히 정갈한 수면유도용 asmr 같은 느낌도 주는데, 이는 해준의 독특한 대사톤도 크게 일조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이 영화가 즐거운 이유는 상징적인 말이나 단어, 미장센들이 꽤 있음에도 지나치게 전위적으로 표현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흐름에 있어서도 수사물스러운 전개가 몇 스푼 들어있고 의미심장하지만 이해가 어렵진 않은 대사와 상황들이 계속 즐거움을 주도록 되어 있다. 여주인공 서래와 관련한 사건뿐만이 아니라 병렬적으로 배치된 다른 사건이 함께 진행되는 것도 전혀 산만하지 않고 메인플롯을 오히려 부각해 준다.



스시와 핫도그, 반지, 시계, 바다, 안개, 와이프와 이주임, 곰팡이, 붕괴, 담배, 손가락, 해파리, 신발끈 등등 하나하나 다 너무 아픈 미장센과 상징이 가득하니, 의식하지 않아도 관객에게 싱숭생숭함을 계속해서 학습시키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보는 내내 어찌나 즐겁고 슬프고, 오른손의 메모가 멈추지 않았는지 모른다. (집에서 볼 땐 실시간으로 메모하면서 영화 보는 편) 너무 영화가 알차고 재밌어서 오히려 괴로웠다고 해야 하나. 적고 싶은 게 너무 많았음.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근데 그 여자 남편이 그 여자를 때려.

나도 그 남편새끼 죽이고 싶어 미치겠다.





또한 빈번하게 1인칭의 구도를 짧게 짧게 연출적으로 사용하는 점도 흥미로웠다. 수면장애로 자주 인공눈물을 넣는 해준의 뻑뻑한 눈도 그렇고, 서로를 관음 하던 남녀도 그랬다. 직접적인 '눈'을 통해본다는 것.... 의미심장하게 중간중간 나오는 1인칭의 연출은 여러모로 아주 시너지가 좋았다.



극의 흐름에 따라 해준의 마음상태는 직접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지만 친절할 정도로 잘 표현된다. 화면연출이나 미적심상을 구현하는 것에 도가 튼 감독이다. 해준과 서래가의 유대가 쌓여가는 과정, 비이성적인 마음이 해준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점점 불어나는 과정도.. 그리고 서래에게도 대칭적인 연출이 들어가는 것 또한 두 남녀의 사이를 보여주는 듯했다. (취조할 땐 180도 법칙을 지키다가 cctv화면에선 반대로 깨지는 장면도 좋았다.)


해준의 심리상태나 캐릭터성을 보여주는 건지, 어떠한 허망함과 멜랑꼴리 한 분위기를 부각하려는 건지 종종 보이는 배경비율을 과하게 많이 주는 구도들 (계단, 고깃집, 화장실 등등)도 참 좋았다. 꼭 이것이 아니어도 전반적으로 카메라웍이 재밌어서 영화가 더 즐거었던 것 같다.










이 산의 봉우리는 깊이 감추어져,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

더러운 세상은 멀리 떨어져 있다.
이렇게 죽어도 좋다.




이 영화는 본격적인 에로티시즘 자체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지만 나에겐 묘한 야릇함을 줬다. 무언가 조마조마함과 위태로움, 금기가 난무하고 그런 듯 아닌 듯 줄을 타는 일탈적인 상황들에서 기인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냥 내가 변태인가 싶기도 하고.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처음만 어렵다.




사람이란 입체적인 존재니까, 모두 표면적으로는 절대 보여주려하지 않는 이면을 가지고 있고 그 이면은 음침하고 음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사람의 마음이므로 천박하고 변태적이고 도착적인 이면일 수도 있다. 수면 밑에 꾸역꾸역 잠재워놓고 사는 정욕들은, 그 소유자의 각자의 신념에 따라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되는 어두운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계기로 음습한 욕망이 살짝 수면밖으로 나와 한번 산소를 삼키고 햇빛을 쬐어버린다면? 제 아무리 현자여도 한 번 달콤함을 맛본 욕망의 고삐를 제대로 움켜쥐긴 어려울 것이다. 점점 수습할 수 없는 방향까지 치닫는 해준의 영화 속 행보는 나도 덩달아 미칠 노릇이었다.



이미 많은 것이 잘 못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관객들의 찝찝함과 해준으로부터 전이된 죄악감이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거기에 절절할 정도로 꿉꿉한 습도를 자랑하는 이상한 사랑의 모양까지.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붕괴'는 정말 많은 걸 담고 있는 단어이다. 나 또한 '붕괴'되어 봤던 기억에 함께 아팠던 걸까, 아니면 해준의 붕괴를 뒤숭숭한 마음으로 바라봤을 뿐이었을까.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피냄새가 많이 나서 당신이 생각났어요.

졸지 말아요. 여기는 안개 없어요.




너무 가지고 싶은데 도무지 닿을 듯 닿지가 않아 가슴이 미어지게 애달픈 사랑.

'가지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이 방법뿐일까.'라는 사고에 도달했을 서래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녀는 사랑하나 만 맹목적으로 추구하여 자신의 다른 모든 마음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서래가 시종일관 건조해 보인 것은 어쩌면 잃을 게 없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섬뜩함이다.



내가 서래 씨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죠?
아니 안 궁금하댔나?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요.
난 그게 서래 씨에 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이포에 가득한 안개가 서래에게는, 눈에 보이는 해준의 숨결 같았을 수도 있었겠다.

서래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해준을 사랑한, 심하게 '사랑스러운' 여인이었겠다. 영화의 내용을 차치하고 마음만을 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순도 높은 사랑이었겠다.




이포에는 어쩐 일로...?


서래 : 안개가 좋아서요.


안개는 떠나게 하는 이유지,
오게 하는 이유는 아닌데?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

붕괴 : 무너지고 깨어짐



난 항상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서움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이상하게 만드는지, 구축하고 붕괴시키는지. 무시무시할 정도의 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 영화에서 더없이 강렬하게 표현된다. 이건 결코 1차원적인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 주는 '무너지고 깨어짐' , 무지막지한 '붕괴'의 형상화이다. 남녀는 붕괴한다. 다른 방식으로.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오래전, 내 슬픔은 파도처럼 들이쳤었고, 물에 잉크가 퍼지듯 퍼졌다. 잉크를 가득 머금은 파도였을 것이다. 서래 씨의 슬픔은 잉크처럼 퍼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높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해일과도 같았기에, 근시안적으로 보면 잉크가 풀어진 물 정도로 보였으리라.





<사진출처 : https://blog.naver.com/modum-sari/223808974508>









난 해준 씨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왔나 봐요.

/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나도 누군가의 미결사건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 한 공간에 내 사진을 박제하여 자나 깨나 내 생각만 하게 만들고 싶었었다. 사진 속의 나라도 그녀의 마음속 공간을 비집고 시선을 박아두어, 그녀의 마음을 한시도 빠짐없이 관음 하고 싶었다. 지독하게 갖고 싶었다.




지나친 사랑이 이렇다. 주인만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설계된 반려동물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랑이 롱런하기 위한 비결은 아이러니 하게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왜 그런 남자랑 결혼했습니까?

다른 남자랑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내 마음 여기저기 마구 옮겨 붙은 사랑은 그 어떤 물세례에도 꺼지지 않았기에, 난 그저 내 모든 것이 타버려 더 이상 탈 것이 남지 않을 때까지 불에 마음을 지지며 기다렸었다. 서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뜨겁게 몸과 마음을 좀먹어오는 사랑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단적인 조치들이었을 것이다. 위험한 말이지만 난 서래가 너무 가엾어서 많이 아팠다. ('사랑'에 집중해서 보았을 때)




해준 : 두 남편이 한 형사의 관할지에서 자살하거나 살해됐어요.
누가 이렇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난 이럴 것 같아요.

'거 참 공교롭네?'

송서래 씨는 뭐라 할 것 같아요?



서래 : 참 불쌍한 여자네?












서래 : 잠은 좀 잡니까?

해준 : 병원에서 검사했는데,
내가 한 시간에 47번 깬대요.
믿어져요?

서래 : 내 잠을 빼주고 싶네요.
건전지처럼.

해준 : 숨을 입으로 쉬어서 그렇다고,
잘 때 코로 숨 쉬게 해주는 기계를 쓰래요.
그런 기계가 있대요.

이상해요.
깨어있을 때 땐 코로 쉬는데.



나도 궁금하다.

모두들, 잠은 좀 잡니까?


또 마찬가지로 묻고 싶다. 나를 핥듯이 훑고 간 인연들에게. 잠은 잘 자냐고.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난 아직도 그렇지 못하다고, 죽은 사람처럼 잠들거나, 죽은 사람이고 싶지 않아 잠들기를 거부한 지 꽤 오래 지났다. 신경쇠약이 올 듯 스트레스 가득한 환경에서도, 난 대견하게도 제법 무탈한 사람으로 보여지며 살고 있다. 파고에 비해 무던하고 덤덤해 보이던 서래 씨가 그래서 너무 사랑스럽고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이제 내 손도 충분히 부드럽죠?




사랑으로 인해 깨어지고 무너졌으니, 사랑을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버리면 다시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쉬웠으면, 사랑이 좀 더 편했을 텐데.


요컨대 붕괴는 통각이다. 통각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듯이, 붕괴됨은 '이 위험한 사랑을 더 하지 말라'라고 사랑이 보내는 강력한 면역적 반응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붕괴되어 가는 걸 알아도 멈출 수 없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른다. 내 손이 실시간으로 녹아내리는 걸 보면서도 기꺼이 불 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꼴이라니! 부드럽던 내 손은 오히려 이젠 굳은 살만 가득하다. (헬스에 미쳐서 그럴 수도 있고.)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글을 마치며, 꽃밭 마냥 사람을 예찬하고 사랑을 예찬하는 나일지라도 오늘은 조금 방어적인 말을 하고 싶다.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진 말라고. 너무 아플 거니까. 어떻게 아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음 ㅎ.ㅎ


상술했듯, 어떤 사랑은 롱런의 비결이 '너무 사랑하진 않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이 목을 조여 오고 잠을 못 들게 한다면, 위험신호를 빨리 인지하고 붕괴되지 않게 대들보를 꽉 붙들고 있는 걸 추천한다. 깊은 내상과 함께 평생 청승꾼의 저주에 걸릴 수도 있다.






아무도 못 찾게 바다 멀리 던질 사랑이 아니라, 바다 같은 사랑을 하기 바라며.


결국 사랑은 그릇싸움이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막 그렇다... 바다가 어찌 비에 젖으리~ (아무 말)

아무튼 나도 상념들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자 바다나 한 번 보러 가려고 한다.




다들 오늘 밤은 잘 주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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