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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오 Sep 20. 2022

2005년과 2019년에 만났던 학생들

수업일지


2005년 봄.


군대를 가지 않은 채 대학을 졸업 후 합격했던 대학원이 있었다. 봄이 되기 전 입학을 앞두고 미리 서울로 올라와 연구실에 출근을 하며 공부를 하다가 입학 직전 등록을 취소하고 전주로 내려왔다. 학사장교 시험을 준비하기로 생각하고 대학은 이미 졸업한 신분이었으니 백수가 되어버린 거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전주와 붙어있는 봉동 읍내의 한 어린이집에서 초등학생들 방과후 클래스를 운영하는데, 거기서 방과후 지도교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점심시간 쯤 도착해서 구내식당에서 주는 밥을 먹고난 뒤, 나에게 할당된 교실에서 1시쯤 부터 저학년부터 순차적으로 오는 아이들을 맞이한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에게 교부된 학습교재로 아이들이 각각 개인학습을 하는 것을 봐주는 일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평일 그렇게 4시간 정도 일을 하고 한달에 70만원 정도를 받았다. 정확히 기억은 아니지만 두 달정도 일했던 것 같다.  



출근할 때는 시내버스를 타고 봉동 읍내에서 내려 음악을 들으며 걷다보면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시내버스 기사일을 하시던 시기였고, 가끔 우연히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버스를 타게 된 적도 있다. 퇴근할 때에는 어린이집의 스쿨버스를 아이들과 함께 탈 수 있었다. 전주에서 가장 가까운 용진읍에서 내려주면 거기서 시내버스를 타고 전주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스쿨버스는 읍내의 여러 동네를 돌며 아이들을 내려다주었는데, 어떤 복지기관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공동주거시설 같은 곳에도 항상 들렀다. 스쿨버스가 그곳에 멈추면 항상 내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지도를 찾아보니 어딘지 찾을 수 있다. 그곳을 특정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밝히지 않는다. 기관의 홈페이지를 가보니 입소대상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한부모가족복지지원법 제4조에 따른 母가 배우자와의 사별,이혼,장기복역 등으로 만18세 미만(취학시 만22세 미만) 자녀를 양육하는 무주택 저소득 모자가정. 

미혼모자시설(또는 미혼모자 공동생활가정)퇴소자 중 스스로 아동을 양육하는 미혼모


처음 그곳을 알게 되고난 뒤, 어린이집의 다른 선생님께 그 복지기관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중에는 현실적으로 유흥업소에 종사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편견에 사로잡힌 확인되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당시엔 그것을 그대로 믿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너무나 편견에 갇힌 시선이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린이집에서 방과후 교사를 한 것이 어쩌면 나의 첫 직장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그냥 방과후의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특별한 사전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통해 배운 공감력으로 별 탈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힘들었던 건 그냥 퇴근 전 교실을 쓸고 닦는 일이었다. 



2019년 가을.


영상제작일을 하며 강사로도 생계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성북구 어떤 동네의 학생을 만나러 갔다. 그곳은 어떤 주택처럼 생긴 미혼모가정 복지기관이었다. 미혼모 가정이 살 집을 제공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나의 학생은 그곳에서 두 갓난 아이를 키우고 있는 20대의 미혼모였다. 그는 직업도 없고, 개인적 사정으로 누군가에게 쫓겨 지내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꿈을 갖고 뭔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영상편집도 배우고 싶어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갓난 아이들을 돌봐주는 선생님께서 와 계신 시간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책상도 없이 밥상위에 컴퓨터를 올려 놓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는 영상편집 프로그램을 돌리기엔 부족한 성능이었다. 나의 수업 방향은 툴을 익히기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하는 과정을 돕는 것으로 정했다. 첫 만남에서 내가 내 준 숙제는 한 주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보라는 것이었다. 


두번 째 만남에서 그는 적어온 자신의 글을 보여줬고, 나의 마이크를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로 그 문장들을 담았다. 함께 음악을 고르고 음악과 목소리가 잘 어울리게 섞는 것을 보여줬다. 목소리에 맞게 자막을 넣는 것을 함께 해봤다. 까만 화면에 글자가 나타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시간을 위한 숙제는 까만 화면에 넣을 사진들을 준비해 오는 것이었다. 


세번째 만남에서 사진들을 넣고 영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인생을 포기하고 싶고, 절망에 빠져있지만 아기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아기들은 나처럼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것을 위해 나의 꿈을 찾고,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시작하면서 스스로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가 했던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대략 그랬다. 개인의 문제를 담은 것들이기 때문에 영상은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지만, 한편의 동화같았다.


이후 그의 삶은 나아졌을까? 더 절망에 빠지진 않았을까? 알 수 없다. 행복을 바라는 것도 쉽지 않다. 2005년 그 복지기관에서 살던 꼬마들은 지금쯤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들이 삶이 어떻게 되어야 다행 또는 불행인지 내가 함부로 정의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겠다. 




2022년 가을에 기억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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