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적막이 내리 찬 한 밤 중. 가뜩이나 서늘한 온도에 여느 때 같아서는 담요를 휘감아야 적절했겠지만 예쁘게도 자고 있는(잠들기 직전까지 나에게 끊임없이 노동거리를 던져 준) 꼬마 덕분에 한껏 달아 오른 기초 체온은, 아이가 깊은 잠에 들어선 후에도 수이 돌아오지를 못 한다. 이제는 모든 신체 반응 속도가 시골 할머니들 노랫 가락처럼 한 템포씩 늘어지는 건가 하는 서글픈 생각을 하며, 차분함을 애써 장착하고 승무원 콜을 눌렀다.
“죄송하지만, 저 얼음물 한잔만 주시겠어요?”
“그럼요, 힘드셨죠? 애기 이제 자나 봐요. 땅콩이랑 간식도 같이 좀 드릴까요? 혹시 맥주도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체면치레 하느라, 시침을 뚝 떼면서 부탁한 얼음 물 한잔이건만 훅 들어온 예쁜 언니(아마도 동생이겠지만, ‘예쁘면 다 언니다’가 필자의 신조)의 야무진 배려와 맥주 공격은 도통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그렇게 얼음 물 세 잔을 생맥주 들이켜듯 연거푸 원 샷. 혹여 흐름을 놓칠세라 재빨리 이어서 맥주 한 캔 투여. 틈새 지원으로 간간이 땅콩과 주전부리들을 털어 넣고 있자니, 딱 밭일을 마치고 새참 먹는 농부의 모양과 닮았다. 아이와 단 둘이 하는 첫 장거리 비행에서의 엄마는 그냥 1초 대기 조 이자, 시녀라고 보면 딱 맞겠다. 아이는 역시, 언제나 예쁘지만 자고 있을 때가 제일 예쁘다.
잘 때 제일 예쁜 쪼꼬미 아들래미 (리아, 32개월)
내 손 안의 우주(I’m using Galaxy; TMI 송구합니다), 핸드폰을 들어 곤히 잠든 아이 사진을 찍어 본다. 아기 시중 들다 탈진한 주제에 그 노동이 잠시 멈추자 마자 또 다시 아이 사진을 찍으며 예뻐 죽는 신종 변태는 이억 만리 타향으로 떠나는 비행기 내에서도 출몰하고 만다. 약도 없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죽지는 않을 건가 보다. 그러는 찰나, 예쁜 그 승무원 언니가 다시 한번 다가온다. “혹시 더 필요한 건 없으실까요? 맥주 더 드릴까요? 그래도 아기가 금새 잠 든 것 같아요.” 하, 정말 반할 거 같다. 뭘 좀 아는 언니다. 이건 제대로 된 위로다. 암만. 빨리 잠 들었지. 한번 보채지도 않고 밥 먹고 놀다 세시간 만에 잠들긴 했으니까. 이 정도면 정말 선방이다. 그리고 육퇴(육아 퇴근) 후에는 시원한 맥주 만한 보약이 없다. 말로만 듣던 고객의 니즈(needs)에 철저히 부합하는 서비스다.
그러고 보면,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 어찌나 혼이 나가 있었던지, 비행 전 기장이 인사 하시느라, 우리 곁에 서서 한창을 기다린 인기척 조차 느끼지 못 했다. 예견되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여 나는 탭 북(각종 종류의 동영상 수록), 젤리 등의 간식, 공룡, 자동차, 퍼즐, 스티커 북 등에 이르기까지 대략 7가지에 이르는 무기를 든든히 장착하여 기내에 탑승한 후, 32개월 큰 어르신이 “엥” 소리라도 내시려나 싶으면 시의 적절하게 준비한 무기를 돌려가며 사용하도록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꽤나 안정적이고 수월해 보이겠지만, 그 날의 가장 큰 복병은, 리아가 제 엄마를 닮지 않아 빛나는 친화력을 보유한 아기라는 점이었다. 주로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하는데 “안녕” 손을 열심히 흔들어대며, 눈 마주치는 모두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의 “안녕”은 무한 반복 재생되고 보통의 경우 데시벨은 점점 더 높아지곤 한다. 이러한 대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4세 아기의 애미 된 입장으로서, 아이가 안녕을 건네는 순간을 포착하는 즉시 다른 곳으로 관심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 때때로, 자연스러운 관심 돌리기에 실패하는 경우에는 육신을 사용한다. 튀어 나가고 싶어 하는 아이를 힘으로 꽉 붙들어 안고 달래면서 관심 우회가 가능할 만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속해서 대입시켜 보는 것이다.
그냥 아이가 인사하는 것인데 좀 내버려둬도 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안락한 비행을 하고자 돈 더 들여 비즈니스까지 탔는데, 아이가 ‘안녕’을 계속 요구하고, 남발해댄다면? 누군가에게는 소음이고, 짜증 유발원으로 간주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과할 정도로 아이를 단속할 수 밖에 없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내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짜증 유발원이 되거나, 화의 대상이 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날, 비즈니스 석에 아이라고는 리아가 유일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인도 뭄바이 행’ 비행기라 ‘아니 저렇게 어린 애를 데리고 굳이 왜 그렇게 멀리 놀러를 가?’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들 으레 인도 행 비행기에 오른 32개월 꼬마가 분명 피치 못 한 이유가 있어 그 비행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 여기는 듯 했다. 국적을 불문하고 근처 자리에 앉아 있던 대부분 이들의 질문이 “뭄바이 어디에 살아?”였던 것을 보면.
고된 노동에 머리 속이 희뿌옇도록 피곤한데,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는 정신은 맥주로도 잡히지 않는다. 아이와 동행하지 않는 장거리 비행에서 나는 보통 맥주보다는 와인을 몇 잔 홀짝 마시고는 취기에 잠을 청하는 편인데, 가뜩이나 피곤한 몸에 와인을 마셨다 잘못 걸려 두통이라도 오는 날에는 아이를 제대로 케어할 수가 없을 것 같은 무거운 책임감에 저 멀리 떠나간 잠을 그냥 가게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모니터를 켜 지도를 바라보다 ‘아니, 모니터를 이제서야 켜 보다니!!’ 하고 자뭇 놀란다.
리아 눈치보며 한 컷 겨우 찍어 둔 아마도 조식 서비스 시작 중일 때의 모니터 사진
비행기는 벌써 내 몸을 한국 땅에서 한참이나 떨어트려 놓았다.
아, 정말 먼 길을 떠나고 있구나. 이 조그만 아이까지 데리고.
혈기왕성하던 20대에 혼자서 하던 장거리 비행의 그 설렘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제서야 좀 실감이 나려는 모양이다.
몇 시간만 더 가면 오매불망 보고 싶었던 남편 얼굴이 눈 앞에 있을 텐데도, 낯선 곳에서의 나와 아이의 모습이 괜히 덜컥 겁이 난다.
아니야 아니야 생각을 하지 말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도 뭘 좀 볼까, 지금 라면을 시켜먹으면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민폐일까. 잠시라도 눈을 좀 붙여야 할까. 고민하기가 무섭게 아이가 잠결에 스르르 일어나 내 좌석으로 넘어왔다.
아이를 토닥여 안고 온 몸으로 테트리스를 구현해낸다. 아이를 깨우게 되는 불상사 없이 좁은 좌석에 구깃구깃 아이와 나를 끼워 맞추어 눕는데 성공한 보람을 느낄 새도 없이, 시원하게 텅 비어있는 아이의 좌석이 한없이 얄밉다.
이쯤 되자 “비즈니스 클래스가 다 무슨 소용이냐, 이 놈아” 하는 마음의 소리가 끝내 입 밖으로 가출했다.
라면은 무슨.
그 와중에 남겨둔 식사 사진이 있다. 장하다 리아 애미!
식사 제공시의 뽀얗고 우아한 테이블 보는 행여 아이가 잡아 당겨 식기를 통째로 엎을까 위험했고, 승무원이 ‘맛 선정 우선권’을 주어 떨리는 마음으로 골라 둔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은 인도 땅에 당도할 때까지 결국 먹지 못 했다. 아, 나는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가.
아이가 아직 어리고, 아이 생애 첫 장거리 비행이라는 핑계로 한 비행기 좌석 업그레이드는 정말 그저 아이를 위한 비행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문득 그 옛날 20대의 내가 생각나 속으로 과거의 나를 호되게 꾸짖어 본다.
‘이 인정머리 없는 기집애야. 너는 10년쯤 지나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을 것이고, 공공장소에 가면 온갖 눈치를 보며 아이 시중 드느라 온 몸에 진이 다 빠질 것이다. 다리 꼬고 앉아 시끄럽네 마네 인상 찌푸리고 앉아있던 네가 하긴 뭘 알았겠냐 만은 그래도 너 눈길이라도 좀 따뜻하게 보낼 수는 없었냐 나쁜 놈아.’
착륙 전 마지막 얼음물을 나누어 마시며 쓰라린 속을 달랜다.
내 생에 첫 비즈니스 클래스 비행은 단연 얼음물로 기억될 것이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며 32개월 인생사 첫번째 장거리 비행을 잘 완수해 낸 리아에게 건배를 !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뭄바이 차트라파티쉬바지 국제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저희 000team의 00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