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면,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원시키고 돌아와 먹일 음식 좀 하고, 집 청소를 했을 뿐인데, 40분 뒤면 아이 하원 시간이다. 운동을 하러 나가기도 애매하고, 어디 가서 뭘 하기도 참 난감한 시간이다.
어이쿠, 그러고 보니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네?
그제서 깨닫고, 그대로 아일랜드 식탁에 몸을 기대고 서서, 대충 우유나 한잔 들이켜면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목록을 적다 말고 부동산에서 전화가 온다. 두 시간 뒤 집을 좀 볼 수 있겠느냐는 전화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 부탁할 것들을 물어보며 전화를 끊고 보니, 벌써 시간이 또 왜 이렇게 됐어!!! 후다닥 놀라 아이 등원시킬 때나 별 차이 없는 몰골로 아이를 하원 시키러 간다.
아이를 집에 모셔와, 씻기고 먹이고 집을 다시 한번 대충 정돈한 후 친절한 집주인 모드로 변신해 연달아 열심히 집을 보여주고 나면, 이야 벌써 저녁 시간이다. 조금 늦은 저녁을 해 치우고, 뒷 마무리를 하고 보면 진짜 놀랍네.
시곗바늘이 여념 없이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누가 내 시간에 가속 장치를 몰래 장착해 둔 것이 틀림없다.
회사를 그만 두기 전 나의 소박한 꿈은 이랬다.
두 달 동안, 인도로 갈 준비는 순서대로 착착하면서, 중간 중간 짬을 내어 가족, 친구들을 만나 여유롭고 충분한 시간을 보내거나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
상상만 해도 행복에 겨워 짜릿하다던 퇴사 전의 나를 찾아다 혼 줄을 내고 싶다.
‘어이, 이 보게 자네, 이 멍텅구리 같은 사람아.’
국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해외로 세간 살림과 필요한 물품들을 구비하여 이삿짐을 바다에 띄우기까지 두 달의 시간이 충분하리라 여겼던 오만 방자함을 이제는 반성한다.
홀로 먼저 인도로 넘어가 업무 인수인계에 우리가 살 집까지 알아보느라 마찬가지로 정신없는 남편과도 도대체 여유가 없어 서로‘업무상’(전세 계약서 작성 서류 확인 및 기타 등등의 작업) 연락을 겨우 하는 수준이었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쓰다시피 했고, 없는 체력을 쥐어짜 내어 잠을 줄이고, 어지러운 집을 눈 딱 감고 일정 부분 포기하기로 타협했다. 30 넘게 인생을 살아봤으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무언가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쯤은 경험치로 알고 있었던 덕분에, 결국 목표를 이루기는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스케줄 한번 참 눈물겨웠다. 지방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틈틈이 지인들을 만나 가면서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국내 이사, 해외 이사를 순식간에 그야말로 뚝딱 해 치운 듯 보였을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엄마가 매일 옆에서 도와주셨기에 가능했겠고 그 과정에서 내가 수 차례 히스테리를 부리다 안정을 찾기를 반복했다는 사실도 아마 엄마만 아시지 않을까 싶다. 뒷 손이 가도 너무 많이 가는 딸을 두셨다 우리 엄마는.
“어디로 가? 얼마나 있다 오는 거야?”
“인도로 가. 뭄바이라고. 그나마 거긴 도시라 외국인들도 많이 살고 해서 치안도 좋고 괜찮다나 봐. 기간은 글쎄.. 전임 법인장이 5년쯤 계셨다니 엇비슷하지 않을까?”
몇 단어면 심플하게 끝낼 수 있을 것을 중언부언 길게도 대답하고는 했다.
‘인도’라는 단어가 출연함과 동시에 모두가 “인도????”라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기 때문이다.
“인도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막 똥 누고 그런다며!! “
“인도는 여자 인권이 바닥이래 너 정말 조심해”
“꼭 가야겠어? 남편만 우선 먼저 보내보고 한 6개월이라도 지켜보지… 회사 그만두는 거 아깝잖아”
“그렇게 더럽다는데, 육교 같은 데에는 사방에 똥이 널렸다며. 아기도 아직 어리고, 병원은 갈 만한 데 있대?”
기타 등등 수많은 부정적인 걱정들이 줄줄이 비엔나였다.
그중에서도 그놈의 ‘똥, 똥, 똥!!!!’
“오빠, 진짜 사람들이 막 해변가에 똥을 누고, 똥이 널려있고 그래??”
말 그대로 똥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물어보고 또 물어보는 나를 안심시키던 남편은 결국 짜증을 냈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여기서 굳이 해변가에 갈 일이 없다고! 어차피 너 여기 오면 길거리 못 걸어 다닌다니까??? ”
이 문제의 똥의 정체는 추후 밝혀진다. (그리고, 남편이 나를 띄엄띄엄 봤다는 사실도 함께 밝혀진다.)
아무튼,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살 집에는 화장실이 무려 5개라는 사실 따위를 계속해서 떠들어대는 것과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며, 좋은 일로 가는 것임을 그리고 옴짝달싹 못 하고 답답해하고 있던 내 삶에서 나도 이참에 한번 남편 인생에 편승해서라도 내 삶의 판을 뒤엎어보는 변화가 너무 필요했노라고 열심히 설명하고 반복해서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떠남’이란 참 묘한 일이다. 일상 속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거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단기간 내에 아주 ‘찐하게’ 상기시켜주곤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용돈을 내 주머니에 쑤셔 넣어 주시며, 이제 언제 보겠냐며 나를 꽉 끌어안아주시던 우리 할머니 품이 그랬고, 내가 훌쩍 가 버리기 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더 보겠다며, 몇 번이고 불쑥불쑥 나타나 ‘야, 우리 오늘은 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 너 뭐 먹을래? 거기 가면 한국 음식 구경하기 어렵다며’하던 친구 녀석들이 그랬다. 보고 싶어도 지금 당장 볼 수 없는 거리에 있다는 물리적 한계는 꽤나 드라마틱한 울림을 주는 모양이었고, 나는 그 드라마가 퍽이나 좋았다. 충분히 감정적이어도 좋고, 이성 같은 건 잠시 한켠에 비켜 세워 두어도 괜찮은 그런 시간과 그런 사이. 낯 간지러워 한 꺼풀 덮어 두었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순간.
문득, 언젠가 나도 죽는 날이 오겠지. 그렇다면 그 날이 임박한 시간들은 꼭 이것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는 천금 같은 이들의 사랑을 이렇게 담뿍 담아 갈 수 있다면, 정수리 끝에서 새끼발가락 끝까지 행복할 수 있겠다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다다르고 보니, 어라? 내가 미국이나, 유럽으로 간다고 해도 다들 지금만큼 울어 젖혔을까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소중한 이를 똥 따위가 널려있다는 인도로 보낸다는 느낌이 마치, 사지에 보내는 그런 감정이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말이라도 해 본다. 안 가면 안 되겠니?”라고. 순간 아차싶어 콧잔등이 간질간질 하다 실소가 재채기와 함께 터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