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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Mar 23. 2020

사표를 쓰면 속이 시원할까.

헤어짐 제 1번 - 회사 편

가을 하늘 청명하던 날 점심.

“넌 그럼, 거기 가서 뭐 할거냐?” 회장님이 말씀하셨다.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수많은 말을 묻어두고, 아주 심플하고 맹랑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저는 가서 요가를 한번 해 보려고요.”

스스로가 한 대답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가끔 이렇게 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순간이 더러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나의 첫 회사이자 지난 8년의 시간과 헤어졌다.






남편의 주재 발령. 이보다 더 깔끔하고 아름다운 이별 사유가 있을까.


“아직 내 나이 창창하고 앞 길이 구 만리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이게 끝이겠어? 또 다른 기회가 오겠지. 변화가 없이 어떻게 새로운 일이 생기기를 바라냐고. 내가 그만둘게. 오빠한테 먼저 새로운 기회가 왔으니 같이 가자!!” 하며, 위풍당당하게 쓴 사표에 걸맞지 않게, 마지막 출근 날은 볼썽사납게 질척였다.


각 팀마다 마지막 인사를 한답시고, 사무실을 3분의 1쯤 돌았을까 누군가 “울지마” 한다.

예리하다.

그리고 밉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눈물 방울이 더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지 못 하고 후두두 우박처럼 떨어졌다. 자고로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했는데, 옛 말이 어째 살아갈 수록 더, 그른 것 하나 없다.

다 큰 어른이 질질 울고 있다는 것과 그 실없는 어른이 나라는 팩트에 현타(‘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가 제대로 온 나는, 순간적으로 인사를 모두 마쳤다고 착각한 나머지 그 길로 엘리베이터로 직진했고, 인사를 기다리고 계시던 분들을 엉겁결에 우르르 따라 나오시게 만들었다.


거기다 대고 심지어 “따라오지마!!! 아 왜 따라와요. 제가 피리 부는 소년도 아니고 !!!” 하며 몇 번을 누른들 같은 값을 도출 할 엘리베이터 버튼을 최소 초당 5회 수준으로 타격하다가 궁지에 몰린 쥐새끼 마냥 쏘옥 엘리베이터로 숨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그제야 차가운 쇠를 타고 울리고 있는 사람들의 '그야말로' 빵 터진 웃음 소리가 인식 된다. 아하, 내가 마지막에 또 빅 웃음을 선사했구나. 성질이 난다. 아니다, 회사 그만 둔다고 돌아가며 얻어 마신 술이 얼마인데, 술 값 했다고 치자. 아…정말 이렇게 모양 빠지는 퇴사자가 또 있을까.

다시 한번 퇴사한다면 그 때는, 결단코. 반드시. 우아한 퇴사자가 되리라.

인생은 대체 왜 대본도 없는 생방송인가.






퇴사를 한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남들 다 일하는 평일에, 혼자서 독립 영화 보기! 사실, 이것 보다 더 하고 싶었던 것이 있기는 했는데 내가 퇴사하던 시기가 그 유행의 끝물이라 의욕이 한 풀 꺾이기도 했고, 그렇게까지 유치한 장난을 내 마지막 인상으로 남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한 때 마음에 품었던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출처 : 네이버 홍여랑님의 블로그 / 퇴사 필수템이라고 까지 불리우며 인기몰이를 했던 데스크탑 바탕화면 "Doby is free"



회사 바로 지척에 독립 영화관이 널렸는데, 그 긴 세월 동안 한번을 보지 못 했다. 퇴근 시간 자체가 늦어 불가능했고, 연차까지 써 가며 회사 근처로 나오기는 더 꺼려지고 뭐 그랬기 때문인데, 마지막 출근한 날, 나에게 주는 선물로 그깟 작은 소원 정도는 시원하게 이루게 해 주고 싶었다.


소원은 이루어진다.


소원 성취에 너무 기뻤던 탓인지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진다.

‘아하, 콧물이 가득 찼구나’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잰 걸음으로 화장실부터 찾아 갔다.

‘오늘 아주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하며, 거울 앞에 서 고개를 드는 순간 금붕어 눈을 한 코뿔소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친다. 맙소사. 눈은 그렇다 치자. 아니 대체 코는 왜 커지는 건가. 이건 어떻게 바로 수습이 어렵다.

감정은 제대로 터트리지도 못 하고 꾸역꾸역 참았는데도 툭 눈 코뿔소가 등장하다니. 예상보다 치명적이다.  

뭐, 하는 수 없지. 최대한 다른 사람들이 내 얼굴을 마주하지 못 하게, 고개를 푹 숙이고 티켓 부스로 가서는 “지금 바로 볼 수 있는 걸로 한 장이요” 그랬다.

받아 들었던 티켓에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이라고 쓰여 있었고, ‘오~ 폴란드?’ 하며 왜인지 모르게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재 빨리 영화관에 착석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깨달았다.


‘오늘은, 망했다.’


출처 : 툭눈코뿔소가 직접 촬영한 퇴사 당일의 영화 포스터


1951년,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진 한국 전쟁 고아 1,500명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였고, 울음의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러닝타임 1시간 20분 내내 거의 오열했고 이게 영화 때문인지, 지난 8년을 내 손으로 끊어내고 나온 사람의 지극히 이기적인 억만가지 감정 때문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렇게 남은 감정을 시원하게 풀어냈다.


그 날, 나는 왜 그렇게까지 울어댔을까. 헤어짐이 아쉬워서? 지난 내 8년이 서러워서? 속이 시원해서? 허무해서? 나름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던 23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이렇게 혼자서도 요란한 퇴사 세레모니는 끝이 났고, 괜히 오른손을 들어 왼쪽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세상 안 무너졌어. 짜식 고생 많았고, 잘 했어. 너는 앞으로 더 잘 할거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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