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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평 Apr 02. 2020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대한스 민국

불조심합시다

나에게 불이란 향초나 생일 케이크, 따뜻한 찌개 같은 거였다. 말하자면 낭만적인 거. 마음이 뜨끈해지는 그런 거. 뭐 간간히 “ㅇㅇ시 주택 화재로 3명 사상”과 같은 기사를 보긴 했어도 그건 안타깝지만 철저한 ‘남일’이었다.


어제까진 그랬다. 그 기사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딱하게도 남들보다 늦게 알게 되었다. 태어난 지 무려 317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것도 날짜가 딱 좋은 4월 1일, 만우절에 말이다.




사실 날 자체가 여느 때와 같지 않았다. 평일 중의 평일인 수요일이었고 그다음 날부터 재택근무가 배정되어 있었으며 결재서류에 써낸 근무지는 서울 본가였다. 따라서 매우 당연하게 6시가 땡 하자마자 연구단지 근처 간이주차장에서 출발하는 통근버스를 타러 갔다.


그곳에선 통근을 하던 한때 봐온 익숙한 얼굴을 몇몇 확인할 수 있었다.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버릇대로 대충 버스에 몸을 뉘었다. 안 그래도 중요한 짐이, 안 그래도 많았던 탓에 가방과 쇼핑백은 옆자리에 고이 모셔두었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운동화는 아무렇게나 벗어놓았다. 갈길이 구만리- 까지는 아니어도 130km는 되었으므로.


읽어야 하는 참고도서를 무식하게 잔뜩 들고왔다. 도합 10kg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 낮에 알게 된 몹시 마음에 드는 웹툰을 한 시간 정도 정주행 했을 땐가, 갑자기 무슨 냄새가 났다. 흠.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냄새인데 뭔지 알듯도 하다. 날이 너무 더웠던 나머지 노트북에 연결하는 작은 팬(선풍기)에 과도한 업무량을 부여했던 날 났던 냄새와 흡사했다. 겨울왕국의 정육점 같던 파란 조명도 또렷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버스의 커다란 크기에도 불구하고 연기는 삽시간에 퍼졌고 사람들은 “뭐야”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혼란은 그것으로도 충분했지만, 우리의 허둥지둥에 활기를 더해주려는 것인지 양옆 뒤 차들은 열심히 클락션을 울리기 시작했다. 버스는 즉시 갓길로 옮겨졌고 실내는 급속도로 기분 나쁜 따뜻함과 매캐함으로 채워졌다.

“빠앙- 빵빵빵”과 “뭐야 뭔데”의 조화는 새로웠다. 그렇지만 난 언젠가 오늘(2020.04.01)로 죽을 날을 받아놓았던 사람인 것처럼 어쩐지 침착했다. 혼자 양념곱창을 굽다가 냄비 뚜껑에 살짝 기대 놓은 집게가 저절로 떨어지는 소리에도 “엄마 깜짝야!!!(매우 순화한 표현입니다)”를 빼액 시전하며 난리 부르스를 떠는 새가슴 내가.... 사람들 앞에서 발표라면 치를 떠는 탓에 수강신청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 내가.....! 재난 앞에선 일단 강하고 본다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그러나 다행히도 나의 침착함을 발휘할 기회 같은 건 없었다. 스펀지에서 본 것처럼 창문 모서리를 비상용 망치로 깨거나 직접 119에 전화 거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엔 클락션으로 위험을 인지하게 해 주던 차가 꽤 많았고 차량용 소화기는 의무배치였으며 내 앞자리, 그리고 그 앞자리, 그리고 그 앞과 옆 자리에 있던 어른들이 모두 주어진 적도 없는 각자의 역할을 다 했다. 덕분에 침착한 척하지만 힘차게 나대는 심장을 잘 부여잡고 고속도로 위 기다림의 시간을 무사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갓길에 멈추어 있는 버스 옆을 빠르게 지나쳐가는 대형 차량들은 솔직히 쫄렸다. 이러한 쫄깃함은 한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운이 좋았다. 만약 모든 차들이 남일이라며 작은 불을 모른 체하고 각자의 목적지로 쌩쌩 달려가기만 했다면? 차량이 노후화된 까닭에 소화기의 노화도 막을 수 없었다면? 나와 함께 있던 어른들이 각자의 회사와 기타 신고처에 전화해 방법을 물어보지 않았다면?


몹시 큰 일을 당하진 않았을지라도 신체의 평안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이 나던 차 후미에 앉았던 사람들(당시 두 명)은 크게 다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체 차량이 오는 동안 차량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그나마 남아있던 체력이 악화될 수도 있었겠다. 생각보다 더딘 스스로의 위기 대처능력에 탄복할 수도 있었겠지.


이후 어떻게 되었냐고? 보시다시피!

난 홈스윗홈에 잘 도착해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을 수 있었다. 눈이 뻑뻑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띵하긴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연거푸 죄송하다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시는 기사님에게 불평 한 번 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빛이 나는 걸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아- 경제위기와 감염병에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나라. 대한민국이여. (국뽕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커피를 과다 복용해 오후부터 흥분해있던 탓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사회를 목격한 것도 사실이니까. 사람들과 부대껴서 따뜻하게 사는 게 남는 거 아닐까... 하는 어색한 생각을 해본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전원 대피에 성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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