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평 Aug 22. 2020

사랑과 이별을 대하는 적절한 자세

사모곡 아니고 사동료곡 정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한 인간을 마음에 담게 되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이는 크게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나뉜다.


외적인 부분은 시청각적이거나 측정 가능한 정보의 형태로 전달되는 것들이다. 외모를 빼놓고 이야기하면 섭섭하다. 자연스럽게 끌리는 생김새라든지 선호하는 옷차림이나 스타일, 호감 가는 말투,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등이다. 이는 매력이라는 말로도 표현되곤 한다.


물론 외적인 요소에는 경제 사회적 조건도 포함된다. 소위 말하는 학벌, 직업, 능력, 집안, 재력 같은 거 말이다. 이런 것들은 커피숍에서 30분, 아니 10분만 같이 있어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내적인 부분은 보다 깊고 넓다. 취향이 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악, 책, 정치가, 문화, 예술가, 유머 코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단숨에 "어머 저돈데!"의 늪으로 초대하고, 때때로 인연으로 둔갑시키기까지 한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더하다. 세 음절로 이루어져 있어 단순하게 느껴지고, 눈에 보이지 않아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생각보다 웅장하고 끝이 없다. 이를테면 삶의 방향과 지향점, 자신과 타인의 삶을 대하는 자세, 본인의 삶을 이끌어갈 때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가치와 그 가치들의 우선순위가 있겠다.


이는 매우 복잡하고 섬세하여 타인과 잘 맞기 어려울뿐더러, 맞는지 아닌지 단숨에 확인할 길도 별로 없다. 해서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삶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는 꽤 오랜 시간을 요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생각처럼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현실 속에서 사랑을 원하는 이에겐 절대적인 시간보다도 파바박 튀어버리는 스파크 따위가 더 크게 와 닿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개 외적인 요소와 취향이라는 아주 표면적인 기준으로 쉽게 소통하고, 쉽게 평가하며, 쉽게 마음을 주고받는다. 다만 예상한 것처럼 쉬운 마음은 쉽게 끝나버린다. 외모와 매력, 조건, 취향 같은 것들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엔 무척 의미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절대적으로 변화하며, 상대적으로 가치를 잃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대의 외모가 마음에 들어 그 외의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 묵인하며 이어간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사랑에 대한 외모의 작용(비중)이 점점 줄어들어 0으로 수렴할 때쯤, 깃털 같은 사건에도 금방 한계가 드러나 결국 없던 것이 되고 만다. 반면 누군가의 마음-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마음-에 담긴 가치를 사랑한 관계는 쉽사리 끝을 볼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후자에 관한 것이다.


아, 물론 연애 얘기는 아니고.




생각보다 속상했다. 매일 보던 사람이 없어지는 일은 종종 겪는 일인데도 괜히 낯설다. 저 앞의 빈자리를 보자니 아련하다.


사실 처음 연구원에 와 그를 보았을 때엔 나와 몹시 다르다, 맞지 않겠다 생각했다. 무심한 말투는 날 머쓱하게 했고, 똑똑한 말들은 날 되돌아보게 했다. 쉽사리 터지지 않는 그의 웃음이 때때로 반가울 뿐이었다. 다시 말해 나 좀 쫄았다.


점심을 먹고 방에 돌아와 동료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일상에서 좀 더 깊은 것으로 문득 옮겨갔다. 나는 나에게 죽음이 얼마나 특별한 개념인지에 대해 말했고, 그는 우파니샤드와 채사장에 대해 이야기하며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아니 책장에서 당장 그 책을 꺼내와 빌려줬다.


선물처럼 찾아온 책은 예상보다 많은 해답을 주었다. 3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꾸준히도 어지럽히던 철학적 문제들이 그 책 속에 적절히 언어화되어 있었다. 크게 반가웠다. 덕분에 아주 힘들었던 한 해를 홀가분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일을 기점으로, 책을 추천해준 그가 평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겪어 보니 의외로 귀엽다. 그 사람의 딥한 분위기는 간간히 나오는 엉성한 행동 그리고 말투와 엄청난 시너지를 창출했다. 또한 그는 때로 진지한 눈을 하고 삶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고, 가끔은 나의 몹시 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공감하며 한껏 신난 눈으로 나를 대신해 시원하게 욕을 해줄 때도 있었다.


또한 진취적이었다. 노력의 값어치라는 단어를 의인화한다면 이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성공과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뚜렷한 목표를 위해 행동했으며 알지 못할 치열한 괴로움의 시간을 거쳤다. 그 결과 본인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거머쥐고 저기 먼 나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매일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쉽게 꺼내 나누는 일은 사이를 가깝게 만들지만,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나는 그가 가진 다양한 면면이, 특히 성향과 삶의 태도 같은 내면에 탑재된 것들이 좋았던 것이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는 아무리 친해봤자 동료일 뿐이라지만, 내 경험상 직장동료만큼 쉽고 빠르게 친밀해질 수 있는 관계는 없었다. 사회경제적으로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매일 같은 환경에 놓여, 일상의 작은 것들까지 공유하고 공감한다. 게다가 종종 깊어지는 대화에서 상대가 가진 내면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의 장점을 발견하는 것이 특기인 나는 이 일에 있어 특히 운이 좋은 편이었고, 이곳에서도 좋은 친구이자 존경할만한 선배 여성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아마 내가 경험하지 못한 끈기와 열정을 그에게서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경과 존경, 존중, 부러움의 감정으로 그를 바라봤을 것이다. 가지지 못한 걸 좇는 일은 아주 기초적인 행동방식이니까. 떠나간 책 전도사는 더 이상 직장에서 볼 수 없지만, 그가 전수한 고유한 삶의 태도는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그가 없는 동네에 남아 그를 따라 해볼까 싶다. 좋은 이별이니 아쉬움을 털어내려 한다. 적절한 이별의 자세란 이러한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집 떠난 그가 먼 곳에서도 건강하길 바란다. 힘든 순간에는 자신을 지지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의 마음을 하나씩 되짚으며 극복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온 지구의 행운이 당신을 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 작가 되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