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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녕그것은 May 12. 2020

중요한 건 당신이 아니다

[편의점에서 유럽까지] #3. 상남치즈의 라끌렛과 체다



먹고 싶다고 언제든 주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내에 치즈를 만드는 농가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한동안 블로그 파도타기를 즐겨했다. 숨겨져 있는 농가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떤 곳은 게시물이 꽤 쌓여있었는데 가장 마지막 글이 3-4년 전인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아예 잠시 쉬어감을 공지해둔 농가도 있었다. 그들의 치즈를 하나하나 시켜봐 맛보고 싶었지만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가 텅 비어있는 곳들도 많아 운영 여부조차 알 수 없었었다. 정보의 한계를 느끼던 도중 만난 곳이 상남치즈다.




 다소 투박한 이름에 처음엔 '상남'이라는 지역에서 만드는 치즈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블로그를 몇 분 정도 탐색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은 사장님과 사모님의 이름 한자씩을 딴 이름이 '상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로맨틱한 네이밍의 비밀 다음으로 또 알게 된 것이 상남 치즈는 산양 치즈를 다루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우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산양 치즈라니, 예전 유럽여행을 하던 중 잊고 있었던 어느 지점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런던인가 파리인가. 작은 치즈샵에서 고트 치즈라고 추천을 받아 맛을 봤는데, 절대 한국에서는 만날 수 없는, 청국장과는 또 다르게 후각 세포를 찌르는 향이었다. 살짝 베어 물었을 뿐인데 입안에서 순식간에 나의 미뢰를 지배해버린 그 치즈. 생전 처음 염소라는 동물을 눈이 아닌 입으로 접해본 나에게 '만만치 않지? 내가 염소다'라고 자기주장을 쩌렁쩌렁 펼쳐줬다. (지금도 상상하니 혀 뒤쪽이 들썩들썩하다) 당시 숙소로 돌아와 조식으로 나오는 바게트와 함께 먹어보려 시도했지만 두입 째 이 조합은 도저히 페어링이 되고 있지 않다고 판단됐다. 미각이 온통 고트 치즈에 지배되어 조식 내내 커피만 홀짝였다. 이 뿐인가, 숙소를 이동해 캐리어를 풀 때마다 종이 포장지를 뚫고 나온 고트 치즈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그 강렬한 맛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당시 내가 가진 것 중 하나밖에 없다고 판단됐다. 버리고 싶진 않았다. 이 상태라면 한국에는 가져가지 못할 거고, 언제 내가 얘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떻게든 어울리는 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나는 최후의 보루로 캐리어에서 하나 남은 신라면 작은 컵을 꺼내 들었다. 염소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신라면의 분말스프 msg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같이 간 친구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나는 "오 괜찮은데?"라며 고트 치즈와 신라면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분명 나에게 나쁜 기억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치즈였을 뿐이다. 염소는 아니지만 산양이라면 분명 소와 다를 것이라는 호기심에 참을 수 없어 다짜고짜 블로그 게시글에 댓글을 달았다. 다행히 블로그 관리자인 상남 치즈 사장님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셔 얼마 지나지 않아 답글이 달렸고 전화번호를 주셔서 조금은 어색한 문자를 보냈다.





 주문 방식부터, 양치기라는 멋들어진 소개까지. 단 몇 줄 속에 양을 직접 길러 미생물을 연구해 발효 숙성시키는 치즈에 대한 사장님의 자부심이 물씬 느껴졌다. 그제야 상남 치즈라는 브랜드가 단순한 로맨틱 그 이상의 가치로 다가왔다.





노란 체다치즈와 부드러움의 극치 라끌렛 치즈


[라끌렛과 체다치즈]


 가장 마지막에 주문해서 먹은 건 산양 요거트와 라끌렛 치즈, 그리고 체다 치즈다.


체다 치즈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쨍한 노란색을 띠며 약간 큼큼한 향이 났다. 인공 색소는 아닌 것 같고, 저절로 발효되며 만들어질 수는 없는 개나리 빛깔이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바로 여쭤봤더니 단무지의 재료가 되는 치자 열매를 활용했다고 하셨다. 사장님의 크리에이티브인 것.







 체다치즈는 그냥 먹었을 때는 쫀쫀한 식감과 함께 아주 미세하게 시큼함이 느껴져 조금 갸우뚱했는데 오븐에 들어갔다 나오니 같은 치즈라 믿어지기 힘들 정도로 호밀빵과 함께 훌륭한 맛을 냈다.


요즘은 익숙해진 치즈폭포. 이 치즈가 라끌렛치즈인 동시에 라끌렛 조리법


라끌렛치즈는 굳이 익혀 먹지 않아도 향이나 맛 자체가 강렬하다. 체다치즈와는 반대인 것이다. 라끌렛은 스위스에서 생겨난 치즈이며, '긁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다.(Racler) 스위스의 라끌렛 치즈를 반으로 갈라 단면을 불에 쬐고 녹으면 칼로 긁어먹는 조리법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녹여먹으려면 사실 라끌렛 그릴도 따로 있어야 하고, 구례에서부터 온 한 덩어리밖에 안 되는 이 치즈를 처음부터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기엔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산양유 치즈 특유의 깊고 부드러운 맛을 그냥 머금고 싶어 이틀에서 삼일 정도는 한 조각씩 잘라 간식처럼 생으로 먹었다. 오래 보관할 경우 곰팡이가 가공치즈들보다 확실히 빨리 생기기 마련이다. 약 5일쯤 되는 날에는 향도 서서히 짙어지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다. 아쉬움을 머금고 전날 먹다 남은 떡볶이에 얹어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었는데, 확실히 이 치즈는 그렇게 먹기엔 아깝다는 게 최종적 의견. 라끌렛을 제대로 깊게 음미하고 싶다면 아직까진 호밀빵 정도가 가장 잘 어울리는 조합이며, 조금 오래된 라끌렛은 끓는 수프에 넣어 먹어도 좋고, 양념이 강하지 않아 부드럽게 녹아들 수 있는 음식이라면 뭐든 좋을 것 같다.






서울에서 295km 떨어져 있는 구례라는 곳은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도시에 산양 컨디션을 살피며 이 먼 곳에서 치즈를 택배로 받아보고 있을 줄 알았겠는가.




 인연과 기적.

따라 쓰기만 해도 벅차고, 기쁘고.

설렘이 가슴 아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만 같은 말이다.

수많은 인연 중 치즈로 만나는 인연은 나에게 언제나 반갑고 또 무조건적이다.

그래서 올여름휴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 동네에 서울의 치즈를 갖고 가볼 생각이다.






구례의 산양 소식이 궁금하다. 새끼는 이름을 뭘로 지어줬을까. 지금은 몇 개의 치즈가 준비돼 있을까.








상남치즈의 '라끌렛' 치즈력 88%

상남치즈의 '체다' 치즈력 91%

[치즈력]은 치즈의 정령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가격과 맛 식감 유통기한을 포함해 평가하는 지표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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