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생물의 하루살이 인생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면 하루살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듣게 된다. 특히 올해 2학기처럼 4단위 수업을 하게 되면 더 그렇다. 교재 연구를 해서 하루에 수업 4개를 하면 또 내일의 수업을 위해 공부를 해서 수업을 하고, 또 학습지를 만들고 수업을 하고...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
매일 퇴근할 때면 '내일 수업 준비 다 했나?' 생각하면서 시간표를 보는데
1. ‘교재 연구가 다 되어 있군.’ - 기분 좋게 퇴근
2. '내일 1교시 수업 준비 안 되어 있잖아ㅠㅠ' - 다시 책상에 앉아서 준비하고 퇴근
3. '아 어쩌지? 내일 2교시 수업 준비 안 했네.' - 에잇 내일 1교시 없으니까 내일의 정생물에게 맡기고 일단 퇴근
상황에 따라 위의 3가지 중 하나를 골라서 한다.
이런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오는 일과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방과후학교 특강이다. 나의 하루살이 인생을 고려해서 금요일에 방과후학교 특강을 개설했는데 미리미리 특강 준비를 못할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금요일은 5, 6교시 수업이 없어서 그때 급하게라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기한이 다 되었을 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일을 처리하곤 했다. 대학생 시절 레포트 쓸 때나 지금 시험 문제를 출제할 때나 미리미리 하면 집중력도 떨어지고, 아이디어도 안 떠오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놀다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시작하면서 '역시 제출 기한이 다가와서 압박을 받아야 집중력도 올라가지.' 생각한다. 교재연구도 미리미리 하면 또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시간이 많을 때는 학습지 만들기 정도를 한다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업 준비를 할 때는 미리미리 풀어놓으면 감이 떨어져서 다시 수업 전에 봐야 하는 일이 생기므로 더욱 임박해서 교재연구를 하게 된다.
뭔가 해야 할 일이 많을 때 하는 딴짓은 참 좋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놓고, 내 책상 옆에 둔 다음 할 일이 많을 때 마치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책을 읽을 때가 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켰는데 처리해야 할 공문이 있거나 업무를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을 때 노트북을 잠시 덮고, 내 옆에 있는 책들 중에 그날 읽고 싶은 책을 슬쩍 가져다가 읽는 시간. 얼마 전에 교무실에서 출근하자마자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친한 선생님 한 분이 다가와서 "오~ 선생님 아침부터 독서를 하시다니 대단해요. 아~ 선생님 작가였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가셔서 같이 한바탕 웃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일하기 싫어서 현실 도피성 독서를 했을 뿐인데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걸 알고 있던 선생님 눈에는 작가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 아침부터 책과 함께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니ㅋㅋㅋ 이제 중간고사 출제를 마쳤으니 약간의 여유가 생겼지만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중간고사 후 수업을 해야하는 단원의 학습지를 아직 안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이제 10년 넘게 생명과학을 가르치고 있으면 교재연구 할 게 없지 않냐고...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큰 틀에서 가르치는 생명과학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학교마다 교과서 출판사도 다르고, 1학년 통합과학 수업할 때와 2학년 생명과학 I, 3학년 생명과학 II를 할 때 수업 준비해야 할 방향이 또 다르다. 가르치는 내용은 바뀌지 않더라도 문제풀이를 주로 하는 수업을 진행할 때는 그 수많은 문제들을 풀어보는 교재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교육과정도 너무 자주 바뀐다. 내년 고1부터 2022 개정 교육과정이 반영되기 때문에 추석연휴가 지나고 나면 내년 고1 학생들이 사용할 교과서 선정부터 해야 한다.
"하루는 열심히, 인생은 되는대로"라는 책 제목을 본 적이 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참 마음에 드는 책 제목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단위수 높은 과목을 혼자 하느라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을 수많은 교사들을 응원한다. 거창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목표 없이도 하루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되는 것이니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매일매일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