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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생물 선생님 May 18. 2024

정생물의 얼토당토않은 요구

생물 신규 교사의 창체 수업(독서 교육) 이야기

현재 교육과정에서는 교과목명이 생명과학이지만 내가 신규 발령받았을 때는 생물이었고, 아직도 교원 자격증에 적혀 있는 과목명은 생물이다. 신설 학교로 발령받아서 첫 해 그 학교에는 고1 재학생만 있었고, 원래 생물은 순회 자리여서 기존에 있던 선생님들이 선호하지 않았던 탓인지 내가 배정되게 되었다. 순회를 받고 싶어 하던 실업계 학교에서 갑자기 순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졸지에 나는 과학 수업 8시간, 창의적 체험활동, 줄여서 창체 수업 8시간을 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신규에게 저런 꿀 시간표를 주다니 ㅋㅋㅋ


내 바로 위의 나이 선생님이 30대셨으니 24살에 신규 발령받은 나로서는 17세 고1 학생들이랑 제일 가까운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친구처럼 대했는데... 그래서 아이들도 날 친구처럼 대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 일단 정생물이라는 것부터가 애들이 날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ㅋㅋㅋ 정생물선생님, 정생물 ㅋㅋㅋ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샌가 아이들이 정생물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여기서 만난 친한 선생님들 몇 분은 아직도 나를 정생물이라고 부르신다 ㅋㅋㅋㅋㅋ


신규 교사라 열정만 가득하고, 뭘 잘 몰랐으니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많이 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아이들에게 과학 수업을 하고 나면 학습지에 있는 내용을 노트에 그대로 옮겨 쓰며 공부하라고 했다고 ㅋㅋㅋ 그리고 그 시절 하던 싸이월드 대문을 보면 '졸업하고 일촌 하자'라고 적혀 있는데 얼마 전에 복구된 싸이월드에 들어가 보고 졸업을 했는데 왜 일촌을 하겠어하는 생각에 빵 터진 적도 있다.


그 당시 내가 힘들었던 수업은 1학년 과학 수업이 아니라 창체 수업이었다. 1학년 과학 수업에는 생물과 지구과학 파트를 맡았는데, 어차피 공통과학 복수전공을 했었고 지구과학은 내가 이해하는 데까지 성실히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습지를 만들거나 할 때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창체 시간에는 독서교육을 했어야 하는데 생물 선생님에게 독서 교육이라니 ㅋㅋㅋ 은사님이셨던 교감 선생님은 주변 국어 교사에게 여쭤보고 하면 된다고 하셨고, 국어 선생님께 참고할 만한 책자 하나를 받은 나는 단편 소설을 읽히고 그 소설과 관련된 네 컷 만화 그리기, 시를 읽고 모방 시 작성하기 등의 학습지를 만들어야 했다.

 


창체 수업은 아이들이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생물 선생님이 들어와서 단편 소설 읽어라, 학습지 작성해라 이런 요구가 얼토당토않은 요구였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열정 가득한 신규 교사였고, 그 당시에는 이 쉬운 활동 하나를 못한다고 버티는 몇몇 아이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아이들이 대입과 관련된 수업을 대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시간의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온전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그때는 '애들이 왜 창체 수업은 열심히 참여 안 하지?' 하면서 슬펐던 기억 ㅋㅋㅋㅋㅋ 1학년 7반으로 기억되는데 하루는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잔소리하다가 속상해가지고 조용히 앞 문을 열고 나와서 복도에서 울었던 기억 ㅋㅋㅋ 그 후에도 열정만 가득하고 노하우는 1도 없었던 신규 교사는 창체 수업을 하다가 종종 울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내가 과학 수업에서도 좌절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샘은 생물선생님인데 지구과학 수업을 더 잘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뭐라고? 생물교육과 출신의 생물 선생님이 지구과학 수업을 더 잘한다고? 부산 생물 임용 1등인데 내가? ㅋㅋㅋㅋㅋ 이러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생물은 잘 아니까 아이들에게 이것도 말해주고, 저것도 말해주면서 수업했던 것 같고, 지구과학은 아무리 복수전공을 했어도 잘 모르니까 내가 온전히 이해한 핵심 내용만 깔끔하게 전달했던 것 같다. 아~ 수업은 처음에는 가장 기본적인 핵심 내용만 하고, 그다음에 보충 심화된 내용을 다루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학교에 근무한 후배 교사에게 내가 만든 학습지를 공유했는데, 학원에서 만난 다른 학교 아이가 거의 비슷한 학습지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날 어떤 아이가 나에게 "OO학교 과학 학습지랑 샘 거랑 거의 똑같아요. 어떻게 된 일이죠?" 하는데 그 질문의 뉘앙스는 뭔가 너 신규 교사가 학습지 어디서 들고 온 거야? 이렇게 따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학습지 내가 만든 거고, 그 학교 선생님이 내 후배라 내 학습지 받아가서 거의 똑같이 사용하나 본데 그거 내가 만든 거 맞으니까 그 학교 애들한테 똑바로 말하라고 ㅋㅋㅋ 당당하게 소리친 기억이 있다.


신규 교사라 나도 나 자신의 수업, 생활 지도, 업무 수행 모든 면에서 확신이 없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아이들도 나를 신뢰하면서 오롯이 따라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신규 교사 정생물은 아이들에게 얼토당토않은 무리한 요구를 많이 했을 것이고, 이제 정생물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게 서툴렀던 내 첫 학교에서의 4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서 생물도 잘 배웠고 즐거운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말해주는 몇몇 제자가 있어 첫 학교에서의 그 4년이 내 기억에는 행복했던 시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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