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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세흔 Sep 04. 2022

아들과 나의 독립기

아들과 나는 서로 독립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나의 첫째는 아들이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첫아들을 낳아 결혼은 늦었지만 첫아들을 낳아 늦지 않았다.'는 시어머니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귓가에 들린다. 그때는 2대 독자 남편에게 시집와서 며느리로서 할 첫 번째 할 일을 한 것이라는 이 이야기가 요즈음과 얼마나 다른 세상이었나 생각해본다.




나는 첫째에게 많은 정을 준거는 사실이고, 나의 애정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지는 아들도 알고 있다. 한 번은 딸이 오빠에게 "오빠는 누가 가장 오빠를 사랑해?" 그랬더니 2초 뜸을 들이더니 "엄마"라고 해서 모자간에 똑같이 이야기한다면서 딸이 부정하지 말라고 말을 한다. 맞는 말이다. 다들 알고 나 자신도 아는 것은 내가 아들을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던 아들이 군대를 가는데 그때 내가 병원에 입원을 하고 갑상선 쪽에 조직검사를 하고 결과가 기다리는 중에 입대를 하게 되어, 의사 선생님의 배려로 퇴원을 먼저 하고, 입대하는 아들을 데려다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연병장에 서있는 아들 모습을 보면서 애국가를 부르는데 정말 많이 많이 울었다. 

거기에 온 엄마들이 하나같이 울고 있었다. 전시도 아니고 군대에 가는 것을 아는데도 너무너무 서운했다. 

이때가 아들을 품에서 내어놓는 첫 관문이었던 것 같다. 




열심히 면회를 갔다. 처음 계급이 낮을 때는 부모도 같이 계급이 낮은 것 같은 마음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와 아들은 여유를 찾는다. 면회를 갈 때 나는 (생각을 못 했는데) 그렇게 행복한 모습을 보였다고 딸이 말하면서, 이유를 묻는 말에 '이 세상에서 내가 마음껏 계산없이 좋아해도 되는 남자가 오빠라 그런 것 같아'라고 하니까 딸이 어떻게 장가를 보낼 것이지를 걱정을 한다. 




지금 와서 보니 아들이 부모 곁을 떠나는 첫 번째가 군대 가는 일인 것 같다. 그 후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일 년 가면서 조금 더 연습이 되고, 석사 공부를 하러 가서 코로나로 2년 넘도록 집에 못 오면서 연습되고, 지금은 박사생으로서 자기의 삶을 잘 살고 있으니까 더욱 걱정은 사라지고, 서로서로 독립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결혼을 하면 완전히 독립이 되겠지라고 생각을 해본다.




이젠 딸은 엄마의 아들 사랑하는 방법이 많이 어른스러워졌고, 분리를 잘하고 있다면서 다행스러워하고 있다. 앞으로도 자식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진정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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