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결혼한 후 2011년 인도에 가기 전까지 우리 부부가 힘썼던 일은 양가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이었다. 처가는 서울이어서 틈 나는 대로 갔고, 본가는 지방이라 한 달에 한 번씩은 찾아뵈었다. 주일에 교회 사역이 좀 일찍 끝나는 때는 1시간 반 거리를 운전해가서 저녁만 먹고 다시 올라온 일도 있었다. 그 사이 내가 혼자 인도를 다녀올 때도 아내는 처음에는 해언이 나중에는 해언이와 해림이 그리고 마침내는 해언이,해림이, 해린이, 셋을 모두 혼자 데리고 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은 아이들이 생기면서 더 잦아졌다. 첫 아이인 해언이가 태어났을 때 일이다. 시골에서 올라오신 어머니는 이제 갓 태어나 모자동실에 겨우 눈을 뜨며 누워있는 해언이를 보시자마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온돌 바닥에서 갓난쟁이 해언이를 끌어안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하셨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이다.
나는 자라면서 친가 조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년도까지 옆집에 사셨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너무도 생생하다. 그 거칠한 손이며 검은 반점들 그리고 외할머니에게서 늘 나던 지푸라기 같은 마른 냄새. 막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니 내 어머니가 그때의 외할머니 나이가 되셨다. 나는 고국과 고향을 방문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뽀뽀하라고 권했다. 다시 인도로 떠나는 막내 아들네 모습에 끝내 눈물을 보이셨지만 나는 또다시 어머니의 살갗에 우리 기억을 그리고 내 아이들의 살갗에 할머니의 기억을 남기고 왔다.
인도에 있을 때 아이들이 보고 싶으시다며 울먹이시는 장모님 목소리에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러면서 "어머니! 겨울에 한국에 또 가야겠네요." 말씀드리고 얼른 수화기를 해언이에게 넘기곤 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자녀를 보고 자녀의 자녀를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는 큰 축복이다. 그러니 효도는 별개 아니다. 그분들에게 우리 모습을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모습을 더 자주 보이는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와 우리 자녀를 즐거워하시도록 품과 품이 닿고 살갗과 살갗을 비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