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철학자인 칸트는 매일 오후 3시 30분이면 산책을 했다. 칸트가 얼마나 시간을 잘 지켰던지 산책하는 칸트를 보면 사람들이 이제 3시 30분이구나 하고 시간을 맞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배드민턴 클럽에서 내 별명이 칸트가 되었다. 배드민턴 클럽이 오픈하는 시간이 18시 30분인데, 두 딸을 데리고 클럽에 도착하는 시간이 그쯤이다. 클럽 회원분들에게 레슨을 해주시는 여자 코치님도 18시 30분경에 오시는데, 코치님과 함께 두 딸도 같이 분주히 움직이며 회원들이 운동을 할 수 있게 네트를 치고 여러 물건을 세팅한다.
18시 30분까지 가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건가 싶을 수 있지만 어제도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정말 분주히 움직였다. 15시 30분까지 출장을 갔다가 1시간 남짓 간담회에 참여하고, 출장지 건너편에 있던 홈플러스에서 저녁거리를 구입했다. 홈플러스 입장 시간은 4시 45분. 밀키트 형태의 된장찌개와 부대찌개를 구입해야지 하고 머릿속으로 미리 생각해 두었다가 홈플러스에 들어서자마자 지하 1층 식품 코너로 직진했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물건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배경화면일 뿐이었다. 원하던 밀키트를 구입하고 계산대로 향하던 중 통닭 9900원에 잠시 마음이 흔들려 결국 구입하긴 했지만. 홈플러스 출차 시간은 4시 57분.
그렇게 장을 봐서 집에 왔는데 집 앞에 택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5시 37분. 어제는 아내가 회식을 하고 늦게 온다고 미리 말해놓은 상황이었기에 '택배 언박싱 후 정리'라는 새 미션이 급히 추가되었다. 원래 아이들에게 밀키트 된장찌개를 끓여 치킨과 함께 저녁으로 준비해 줄 계획이었지만 급히 계획 수정. 된장찌개는 빼고 아이들은 치킨만, 나는 택배 정리를 시작했다.
택배 상자를 열어 냉장실, 냉동실로 갈 것들, 베란다 서랍으로 갈 것들, 아내 방으로 갈 것을 분류했다. 둘째를 위해 구입한 배드민턴 신발도 마침 도착했기에 상자를 열어 아이에게 신어보길 권했다. 발에 딱 맞는다며 신나 하는 둘째의 모습을 보니 얼른 정리하고 배드민턴 클럽에 가야겠다 싶어 정리 속도를 더 높였다.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치킨 한 조각을 먹고 돌아서서 미리 준비해 둔 수박을 아이들에게 후식으로 내어 주었다.
'얘들아, 다 먹었으면 이제 양치하고 민턴 가자'. 18시 20분.
내 민턴 가방에 아이들 신발 2개와 물통 2개를 추가로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많은 아이들을 지나 두 딸의 손을 잡고 배드민턴 클럽으로 향하는 그 발걸음은 매번 가볍고 경쾌했다.
체육관에 도착하니 여자 코치님이 이제 막 도착하셨는지 체육관 불을 켜고 계셨다. 함께 네트를 치고, 물품을 세팅하고 그렇게 저녁 운동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한 분이 오고, 또 한 분, 이번에는 서너 분... 그렇게 체육관이 조금씩 채워져 갔다.
한창 즐겁게 운동을 하다 보면 어느덧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온다. 20시 20분. 우리가 집에 갈 시간이다. 어제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경기가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운동 인원이 적었다. 그래서 운동을 마치고 집에 나서려는데 한 게임만 더 치고 가라는 제안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애들 숙제도 해야 하고 목욕도 시켜야 해서요..'
'에이.. 그래도 조금만 더 치고 가. 얘들아, 조금만 더 체육관에서 놀다 가도 괜찮지..?'
'저희... 집 가서 숙제해야 해서요....'
'.........'
그렇게 우리는 20시 20분에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칸트 부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