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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정 Nov 25. 2020

을의 처세법



그런 날이 있다. 서로를 믿고 함께 하기로 약속하는 날. 의기투합하고 서류를 꺼내 피처럼 붉은 약속의 도장을 찍는 날. 하지만 남의 마음은 남의 마음일 뿐인지라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도 있다. 약속을 믿고 온 마음으로 노력하던 나는 그 순간 한없이 못난 사람이 되어버린다. 도장 찍고 일해도 을의 입장에서 일하면 갑의 온갖 변덕과 그야말로 말릴 수도 없는 갑질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니 많은 프리랜서님들아, 특히 작가님들! 도장 안 찍고 일 시작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짓입니다. 도장 찍어도 작가는 빼앗길 게 많은 입장이라는 것만 기억하시면 되겠다. 


그래서 그런 날은 단순히 힘이 빠지는 걸 넘어서서 갑질하는 갑이 참 미워진다. 


그리고 이해관계 때문에 쉽게 헤어지는 것조차 어렵다면, 그 상한 마음으로 다시 얼굴을 붉히며 일을 도모해야 한다면, 난처하기까지 하다. 그런 일은 우리의 삶에서 참 흔하게 일어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나는 좀 미련한 성격이라 혼자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 쌍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내 일을 한다.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리라 믿으며. 대수롭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으로 나와 빛을 봤던 나의 작업물들은 대부분 그런 과정을 견뎌서 겨우 나왔던 것 같다. 혼자서 기분 좋게 썼더니 꿈같이 좋은 일이 일어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여되어 있는 프로덕션에서 일할 때, 작가는 정말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이는 입장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동네북이 되더라도 너무 상처받지 않는 게 중요하다. 물론 성격에 따라서 대처법은 다를 것이다. 주변 작가님들을 보면 갑질이나 괴롭힘 앞에서 본때를 보여줘서 다시는 못 건들게 하는 파이터형도 있고, 또 뛰어난 사회성으로 능숙하게 주변인들을 대해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끔 잘 단도리치는 정치인형도 있고, 걍 더러운 상황이 되면 관둬버리는 쿨한 분들도 계시다. 어떤 대처여도 자기답고 어색하지 않다면 그 방법이 좋을 것이다. 대신 어떤 선택을 하든 가장 중요한 건 너무 상처받지 않는 것이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큰 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까 너무 힘들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참 어렵다. 내 맘 같지 않은 남, 그것도 갑과 함께 하기란…! 미워하기 보다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나에게 좋은 쪽으로 선택해나가야 한다. 


미워하는 것도 뜨거운 감정이다. 


그런 감정까지 약속도 안 지키는 수준낮은 갑을 위해 쓰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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