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서로를 믿고 함께 하기로 약속하는 날. 의기투합하고 서류를 꺼내 피처럼 붉은 약속의 도장을 찍는 날. 하지만 남의 마음은 남의 마음일 뿐인지라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도 있다. 약속을 믿고 온 마음으로 노력하던 나는 그 순간 한없이 못난 사람이 되어버린다. 도장 찍고 일해도 을의 입장에서 일하면 갑의 온갖 변덕과 그야말로 말릴 수도 없는 갑질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니 많은 프리랜서님들아, 특히 작가님들! 도장 안 찍고 일 시작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짓입니다. 도장 찍어도 작가는 빼앗길 게 많은 입장이라는 것만 기억하시면 되겠다.
그래서 그런 날은 단순히 힘이 빠지는 걸 넘어서서 갑질하는 갑이 참 미워진다.
그리고 이해관계 때문에 쉽게 헤어지는 것조차 어렵다면, 그 상한 마음으로 다시 얼굴을 붉히며 일을 도모해야 한다면, 난처하기까지 하다. 그런 일은 우리의 삶에서 참 흔하게 일어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나는 좀 미련한 성격이라 혼자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 쌍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내 일을 한다.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리라 믿으며. 대수롭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으로 나와 빛을 봤던 나의 작업물들은 대부분 그런 과정을 견뎌서 겨우 나왔던 것 같다. 혼자서 기분 좋게 썼더니 꿈같이 좋은 일이 일어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여되어 있는 프로덕션에서 일할 때, 작가는 정말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이는 입장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동네북이 되더라도 너무 상처받지 않는 게 중요하다. 물론 성격에 따라서 대처법은 다를 것이다. 주변 작가님들을 보면 갑질이나 괴롭힘 앞에서 본때를 보여줘서 다시는 못 건들게 하는 파이터형도 있고, 또 뛰어난 사회성으로 능숙하게 주변인들을 대해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끔 잘 단도리치는 정치인형도 있고, 걍 더러운 상황이 되면 관둬버리는 쿨한 분들도 계시다. 어떤 대처여도 자기답고 어색하지 않다면 그 방법이 좋을 것이다. 대신 어떤 선택을 하든 가장 중요한 건 너무 상처받지 않는 것이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큰 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까 너무 힘들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참 어렵다. 내 맘 같지 않은 남, 그것도 갑과 함께 하기란…! 미워하기 보다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나에게 좋은 쪽으로 선택해나가야 한다.
미워하는 것도 뜨거운 감정이다.
그런 감정까지 약속도 안 지키는 수준낮은 갑을 위해 쓰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