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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프구원자 Jul 11. 2022

[2화] 서울 전세사는 초등학교 남교사 이야기

[2화] 내 삶의 첫 집 : 27평짜리 계단식 아파트


1989년, 인천에서 나는 태어났다.


   지방에 있는 교육대학교에 진학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살던 아파트는 1991년에 준공이 되었다. 준공시기로 보아 노태우정권 하에 200만호 공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건설된 아파트임에 틀림 없다.

후술되는 이야기에서 이 27평 계단식 아파트는 훗날 나에게 애증의 집으로 계속 등장하게 된다.

  

  아버지는 나와 같은 나이인 29살에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그 후 3년 뒤 내가 태어났다. 당시로는 늦은 결혼과 또 더 늦은 출산이였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아파트에 살기 전에 1층에는 집주인이 살고 2층에는 부모님이 거주하시는 형태의 월세방에서 신혼집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아파트로 이사 하기 전까지 약 5년 정도의 시간 동안은 이러한 형태의 집에서 한 두번 정도는 이사를 하시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신 편이다. 잘되는 집일 수록 가족 간의 소통이 많은 편인데 항상 이점이 안타깝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부모님의 역사와 이야기들이 많지 않다는 점은 나에게 늘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정확하게 내가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7~9살 때 쯤 나는 내 방이 처음으로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에게는 나이 차이가 나는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고모들은 부모님께서 대출을 통해 마련한 이 아파트의 중간 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고 있었다. 2022년 기준으로 5만인구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시골에서 상경한 고모들에게 이 아파트가 앞으로의 전진을 위한 전초기지였으리라. 큰고모에 이어 작은고모까지 결혼을 하게 되고 집을 떠나는 날, 작은 고모가 "이제 방이 생겨서 좋겠네^^" 라고 말씀을 하셨었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작은 아파트에서 나의 남동생을 포함하여 6명이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이 넓어진 것 같은 느낌, 내 방이 생겨서 설레었던 마음은 아직도 나의 가슴 속에 각인되어있다.


더불어...내 집 마련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누이들과 함께 인고의 세월을 보내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초등학교 2학년, 나는 제법 인기가 좋았다. 한 번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같은 반 여자 아이가 "집에 가서 혼자 읽어"라는 말과 함께 편지를 주었고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하길에 편지를 뜯으며 읽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나는 널 좋아해. 그런데 나 말고도 너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이 많고 팬클럽도 있어!"(하하^^;;)

(당시 H.O.T 등의 가수들의 팬덤으로 인하여 팬클럽이라는 말이 생기던 시기였고 아이들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나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나는 남자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 표도 얻게 되어 반장이 되었다. 당시 학급의 담임교사는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할아버지 교사였다.(초등학교 2학년의 시선으로는 그가 완벽한 할아버지 선생님으로 보였다.)

 이 선생님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 사건이 있다. 그는 학급에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에게 무릎을 꿇고 책상 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그리곤 반장이라는 이유로 내가 대표로 체벌 막대기로 발바닥을 쎄게 맞곤 했었다.

  고등학생 때 쯤이 되어 어머니가 말씀해주셔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당시 촌지는 학급임원들 위주로는 반드시 주어야하는 관행이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도 학급에 필요한 청소기 등을 사는데 적은 돈을 일부 내셨다고 하셨는데 아마 그 돈이 그 류00 교사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고, 그래서 너를 악의적으로 더 때렸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류00 교사. 지금은 살아있는 지 모르겠다.

  또한 그는 자신이 내준 2학년이 감당하기에는 말도 안되는 양의 방학숙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교사였다. 나는 방학 직전까지 울며 방학숙제를 해갔지만 이를 검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 사회의 부조리를 알려준 교사였다. 그가 나의 자존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나는 모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반장이라는 이유 만으로 종종 발바닥을 수 차례 맞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급의 남자 아이들과 동네 친구들(친구들)을 초대하여 생일파티를 제법 성대하게 열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생일파티를 간소하게 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97년 겨울 IMF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 때 즈음에 아버지는 직장에 얼마간 출근하시지 않는 모습을 보이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회사의 사장은 부도로 인하여 빚을 이기지 못하고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고 나머지 직원들이 십시일반하여 돈을 모아 회사를 다시 매입했다고 한다. 두 번째로 투자금을 많이 낸 아버지는 부사장(이사)정도 되는 2인자의 직함을 받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성적은 평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6학년 때 국어,수학,사회,과학을 시험을 보고 채점된 답안지를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싸인을 받아오라고 했던 기억이 남는다. 나의 평균점수는 88점이였고 왜곡된 기억인지 모르겠으나 40명 중에 약 20등 즉, 중간 정도의 성적이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반 아이들이 서로서로 평균점수를 공유하고 순위를 매겼던 것일까?

  특별히 나에게 공부를 강요하거나 시키지 않았던 부모님, 나는 어머니에게 동네에 아파트 상가에 있는 스파르타 보습 학원에 가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동네에서 같이 뛰어놀던, 사립초등학교에 다니던, 지금은 연극배우가 된 친구가 다니던 학원이였다. 우연하게 방문하게된 이 보습학원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정도까지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우연한 계기로 다니게된 학원.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을까?


  다음화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 말에 우연히 시작된 약 2년 동안의 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며 쉬엄쉬엄 가고자 한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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