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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30화

티끌

4부. 잊히지 않는 것들

by 융 Jung

9월 19일, 월요일. 일어나자마자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6시 12분.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정확히 그 시간에 눈을 떴다. 마치 어떤 시스템이 내 내부에서 사전에 정의된 시간에 맞춰 부팅된 것처럼. 시야는 조금 흐릿했지만, 머릿속은 맑았다. 어젯밤까지의 모든 기억이 한 줄의 텍스트처럼 선명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USB는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외장 SSD도, 종이 한 장도. 어제의 우리를 증명하는 조각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아직은 시스템이 전부를 삼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천천히 옷을 입었다. 오늘은 월요일. 평소라면 회사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니, 가서 할 일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실장은 어제 그 장치를 잠근 순간, 이미 모든 절차를 끝낸 것이다.

거실로 나가자 하연이 앉아 있었다. 머그잔을 양손에 감싸 쥔 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늘이야?”
“그래. 오늘이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눈빛은 맑았고, 어제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그럼, 어디부터 갈까?”
“우리가 처음 만난 곳.”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연은 웃었다. “시뮬레이션의 균열이 처음 시작된 자리네.”

우리는 작은 가방 하나만 챙겨 집을 나섰다. 더는 백업도, 로그 복사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시스템 바깥으로 남기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오래전 폐쇄된 공용 열람실이었다. 도심 재개발 이전, 몇 개월간 임시 기록센터로 활용되던 건물. 바닥은 먼지에 덮여 있었고, 천장 일부는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엔 책상이 있었고,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 하나가 미약하게 깜빡이며 켜졌다.

하연은 가장 안쪽 책상으로 다가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거기, 오래된 모니터 하나가 남아 있었고, 누군가 정리한 듯 전선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원을 연결하자, 화면엔 오래된 시스템 부팅 로고가 떠올랐다.

“이건…” 내가 입을 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게 우리가 처음 실험했던 단말기야. 시뮬레이션의 첫 로그가 여기에 기록됐었지.”

하연은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리를 꺼냈다. 손가락보다 작은 칩. 우리가 지금껏 남겨온 모든 경로의 미러링 결과였다.

“이걸로 돼?” 내가 물었다.
“응. 이 안엔 우리가 누구였는지, 어디까지 닿았는지,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가 전부 담겨 있어.”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 기록은 시스템에게 들키지 않은 마지막 잔여였다. 그것을 여기, 우리가 처음 흔들렸던 자리에서 ‘종료’시킨다는 것. 그건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우리 존재를 이 세계에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하연이 조심스럽게 칩을 장치에 연결하자, 화면이 깜빡였다. 그리고 한 줄의 텍스트가 떴다.

> “기억 데이터를 확인했습니다. 종료하시겠습니까?”

나는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아직 엔터를 누르진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그녀와 이 장면을 공유하고 싶었다. 기억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여 있는 시간. 그렇게 존재로 남는 감각.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기억이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여기서 다시 시작되기를.”


나는 키보드 위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하연을 바라봤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각을 잠시 꺼둔 것처럼.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화면 위 문장을 다시 되뇌었다.

> “기억 데이터를 확인했습니다. 종료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은 항상 우리에게 질문의 형식을 빌려 명령을 내렸다. 그동안 나는 그 구조를 수없이 되짚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프레임 안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또렷해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내리는 선택은 과연 자유의지일까, 아니면 시스템이 허락한 마지막 환영일까? 나는 조용히 Enter를 눌렀다.

화면이 꺼졌다.

아무 알림도, 확인 메시지도 없이 모든 것이 종료되었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떠밀리던 기억의 파도에서 빠져나와 스스로의 숨결을 되찾은 것처럼.

하연이 눈을 떴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지금 막, 우리는 어떤 세계와 작별했다는 것을.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흐려져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잿빛의 가장자리만이 남아 있는 시각. 우리는 열람실을 뒤로 한 채 천천히 걸었다.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로 향하든 결국 이 날의 끝은 같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하연이 갑자기 멈춰 섰다.

“기억이… 하나 더 있어.”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흔들리면서도 또렷하고, 무서우면서도 미련이 남은 듯한 얼굴.

“언제?” 내가 물었다.

“너와 내가… 이 모든 걸 처음 시작하기도 전.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 시스템이 내게 주입한 첫 번째 꿈.”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게 아직… 여기 어딘가에 있어.”

그녀의 손등이 내 손바닥을 스칠 때, 미세한 떨림이 퍼졌다. 그 떨림은 곧 뜨거운 열로 번졌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연의 이마가 내 가슴에 닿자마자 심장이 조여들었고, 그녀의 숨결이 내 목을 간질였다. 나는 그 떨림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고, 그녀는 내 턱을 따라 올라와 입술을 포갰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입맞춤이 곧 격정으로 번졌다. 입술이 닿고 떨어질 때마다 맥박이 요동쳤고, 서로의 숨이 점점 짧아졌다. 목덜미와 어깨, 쇄골을 지나며 입술은 흔적을 남겼고, 우리는 마치 서로를 기억하려는 듯 더 깊이, 더 뜨겁게 얽혔다. 셔츠의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그녀의 시선은 더욱 선명해졌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하연의 옷을 벗겨냈다. 하얀 속살이 서서히 드러나자 숨이 멎었고, 그녀는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숨죽이며 서로를 마주했고, 눈빛으로만 수없이 많은 말을 나눴다. 이윽고 하연이 내 허리를 끌어당겼고, 나는 그녀의 온기 속으로 천천히 몸을 기댔다. 뺨과 입술, 가슴과 배, 모든 감각이 겹쳐졌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그 순간, 세상의 소음은 사라졌고, 남은 건 고동치는 심장과 터져나오는 숨뿐이었다. 우리는 부서지듯 밀착했고, 터질 듯 얽혀들었다. 피부에 스치는 땀과 숨결은 아프도록 아름다웠고, 시간이 무너지는 그 끝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낮게, 뜨겁게, 간절하게. 그 순간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하연의 이마가 내 가슴에 기대었고, 나는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내 품에 안겨 있었고, 우리의 심장은 서로의 리듬을 따라 조용히 진정되어 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오랫동안 엉켜 있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이 감각을, 이 시간의 조각을 최대한 길게 붙잡아두려는 듯. 밤은 깊어졌고, 창밖의 어둠 속으로 바람 한 줄기가 스며들었지만, 우리의 온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녀가 아주 낮게,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순간은 잊히지 않을 것 같아. 그렇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녀도 내 가슴으로 더 파고 들었다. 대답 대신, 기억으로 남기기로 했다. 새근 새근 잠이든 줄 알았던 하연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그때 나는 꿈을 꿨어. 이름 없는 세계, 하늘도 바닥도 없이, 그냥 기억만 둥둥 떠 있는 곳. 거기서 네가 나를 불렀어. 이름 대신… 어떤 숫자였어.”

나는 숨을 삼켰다.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던, 잊힌 조각이 물처럼 퍼졌다.
“0210.” 내가 말했다.
“맞아. 왜 기억하고 있었어?” 하연이 눈을 떴다.
“그게 네 파일명이었으니까. 네 로그의 고유값.”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연은 웃었다. 눈물이 맺히지도 않은 웃음. 고요하고, 완전한 정리의 순간.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네가 기억해 줘서 존재할 수 있었어. 그게 전부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누군가의 존재를 나 혼자 품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억이야말로 세계를, 우주를 버티게 하는 마지막 변수라는 것.

하연이 내 손을 잡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첫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 하나, 둘, 셋. 흩어지고, 번지고, 사라지는 티끌처럼.
우리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건물도, 시스템도, 기억도 모두 흐릿해지고 있었지만, 단 하나—그녀의 손의 감각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소리도, 빛도, 감정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시스템이 리셋되었다는 것을.

그러나 이번에는, 완전히 초기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작고 하얀 방 안, 아이 하나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여섯 살, 혹은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1986년 6월 11일. 오늘은 유치원에서 소방차를 그렸다. 빨간색 크레파스로 진하게 칠했는데, 차 바퀴는 까맣게 다 번져버렸다. 선생님은 멋지다고 했지만, 엄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밤에 잠들기 전에, 나만의 비밀노트를 꺼냈다. 그 안에 이렇게 썼다.

2025년 9월 19일 02:41:16 시스템 종료됨.

rollback 완료됨.

새 세션 시작됨.

나는 이 문장을 써놓고 내가 왜 그걸 아는지도,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그냥 떠올랐고, 써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천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태호’인데, 엄마는 오늘도 날 '재영'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귀한 이름이라면서. 내 이름을 왜 다른 사람이 짓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중에 아이를 가지면 네 이름은 네가 지어라— 라고 할 테다. 그리고 할머니는 오늘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니는 으데서 온 알라고?"

몰라요!—하고 소리쳐버리고 싶지만 꾹 참았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방에 바람이 스쳤다. 천장이 파랗게 일렁이는 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건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아니면… 끝나지 않은 첫 번째인가.’

꿈은 기억되지 않고, 기억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세계는 기록이며, 누군가의 마지막 호출이었다는 것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말했다.

"…티끌."

시스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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