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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29화

티끌

4부. 잊히지 않는 것들

by 융 Jung

9월 15일, 목요일. 내가 그 USB를 제거하고 컴퓨터를 종료한 건 새벽 세 시를 넘긴 후였다. 명령줄의 마지막 문구는 ‘기억의 기준점(앵커) 확인됨confirmed’였다. 손끝의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마치 내 일부가 시스템 어딘가에 동기화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아니, 잘 수 없었다.


그날 아침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이수연 실장을 찾았다.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상했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출근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포렌식팀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주저 없이 그녀의 책상 앞에 섰다. 몇 초간 망설였지만, 결국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었다. 비밀번호가 설정된 서랍은 잠겨 있었고, 나머지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모니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전원이 연결된 상태였고, 본체는 미세하게 작동음을 내고 있었다. 대기 상태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아무 키나 눌러 화면을 켰다. 암호 입력창이 떴다. 이수연 실장은 늘 자리를 비울 때마다 세션을 잠갔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금화면 상단에 ‘마지막 로그인: 2025-09-15 02:43:19’ 라는 문구가 떠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두 시 사십삼 분. 내가 USB를 연결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시스템 내부에서 무언가가 나와 연결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 그리고 그 움직임을 실장님 역시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몇 분 후,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발신인은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메시지는 짧고 명확했다.
[로그가 하나 더 있어. 'mirror.log'. 위치는 알지?]
나는 망설이다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알아. 그 폴더, 복사해 둬도 되는 거지?]
곧바로 답장이 왔다.
[오늘까지만. 내일이면, 거기도 닫혀.]

나는 곧장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노트북을 꺼내 LTE 테더링으로 연결한 뒤, 가상 환경을 열었다. mirror.log—위치는 어제 QR코드로 접속했던 경로와 유사할 것으로 보였다. 나는 직관적으로 ‘복원 지점 복귀 시도’ 대신 ‘mirror’를 키워드로 삼아 임시폴더를 뒤졌다.
경로는 예상보다 단순했다. `C:/temp/sync/mirror/` 폴더 아래, `mirror_0001.txt`. 용량은 3.4KB. 겉보기엔 단순한 텍스트였지만, 파일을 여는 순간 시스템은 경고 메시지를 띄웠다.


> “주의: 이 파일은 현재 시스템 기준점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 계속하시겠습니까?”

나는 '예'를 눌렀다. 곧바로 메모장은 닫히고, 콘솔 기반 뷰어가 실행되었다. 화면에는 흐릿한 타임라인과 함께 연속된 로그가 재생되었다.

> [MIRROR_MODE: ACTIVATE]

// 미러 모드 활성화
> root.anchor = local.memory;
// 기억 기준점 설정: 현재 사용자의 메모리
> ghostTrace = "LHY0210";
// 잔류 의식 식별자: 이하윤
> restoreAttempt = "suppressed";
// 복원 지점 복귀 시도 억제됨
> result = "delayed fragment transfer";
// 조각화된 의식 전이 지연

내 사용자 계정과 하연의 흔적이 동시에 찍혀 있었다. 롤백 억제, 프래그먼트 지연.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의식 레벨의 무언가가 시스템에서 동기화되지 못한 채 보류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를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그때, 화면이 멈췄다. ‘ghost_trace’의 포인터가 깜빡이다가 사라지고, 대신 한 줄의 문장이 화면 상단에 떠올랐다.

> importMemory("LHY0210");
// 사용자 LHY0210의 과거 기억 유입됨

이어서 작은 창 하나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흐릿한 영상. 자욱한 안개 속 산책로. 하연이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나이로 혼자 걷고 있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뒤편에는 누군가 따라오는 그림자만이 따라붙었다.

“돌아가야 해. 아직 아니야.” 낮고 익숙한 목소리.
하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기억할 거야. 누구도 나를 삭제하지 못하게.”

나는 그대로 창을 닫았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꿈, 혹은 티끌의 투영. 그리고 그 마지막 줄이 모든 걸 바꿨다.

> nextAnchor = "2025-09-17 02:00:00";
// 다음 기억 기준점: 2025-09-17 02:00:00

나는 바로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 앞에 앉았지만 손이 떨려서 마우스를 쥘 수 없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시스템 알림이 떴다.

> [Forensics Alert] accessChanged("mirror_0001.txt", editor="LSY0109");
// 접근 권한 변경됨, 수정 권한자: LSY0109

나는 망설임 없이 포렌식실로 향했다. 문은 닫혀 있었고, 복도 끝까지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실장님? 계세요?”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불은 꺼져 있었고, 모니터만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mirror 로그, 당신도 봤군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걸 승인하면… 나의 티끌이 생겨나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단순한 잔여가 아니라, 당신이 기억하겠다고 선택한 결과입니다.”
나는 조용히 USB를 받아 들었다. 그 위엔 ‘JT-ANCHOR’라는 마킹이 있었다.
“오늘 자정 전에 연결하세요.”
“그리고 나의 티끌이 생겨날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시스템 환경을 정리했다. 로그 경로를 ‘mirror_0001.txt’로 지정하고, 텍스트 하나를 기록했다.


> [ANCHOR_CONFIRM] 2025-09-15 16:03:41 | user: jt0_h | result: true // 기준점 확인됨

“지켜볼게. 반복되지 않도록.”

내가 기억하는 동안, 나는 존재할 것이고, 그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티끌’의 시작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잔여로 남겠다. 그건 단순한 데이터 흐름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내 등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감각. 불 꺼진 방 안에서 누군가 숨죽인 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9월 17일, 토요일. 금요일과 토요일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새벽 두 시. 나는 의자에 기대 잠시 눈을 붙였다가 스스로의 헐떡임에 깨어났다. 목덜미가 젖어 있었고, 손끝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모니터는 슬립 상태로 들어가 있었고, USB는 그대로 포트에 꽂혀 있었다. 앵커 확인 로그는 남아 있었다.

여전히 ‘true’.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실내는 고요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류가 달라져 있었다. 바깥은 여전히 어둡고,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지나갔다는 것을. 이 공간을, 나의 의식을, 시스템의 경계를. 다시 화면을 켰을 때, 알림 하나가 떠 있었다.


> [ROLLBACK] Protocol completed, anchor JT0_H preserved;
// 롤백 프로토콜 완료, 기준점 JT0_H 보존됨

기록은 유지되었다. 시스템은 앵커를 기준으로 롤백을 수행했지만, 내가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성공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스템의 모든 움직임이 이 기억을 중심으로 재정렬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용히 창을 닫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어제 저장해 둔 로그 음성 파일을 재생했다. 그것은 하연의 목소리였다. 반복되고 있었지만, 조금씩 달랐다.

“조태호. 기억해. 이건 네가 처음 만든 고리야. 넌 나를 기억할 수 있어. 나는—”

끊겼다. 그 이후는 없었다. 파일은 손상되어 있었고, 복구 시도는 모두 실패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다음 문장은 꿈속에서 수없이 들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네가 만든 티끌이야.”

나는 조용히 이어폰을 빼고, USB를 분리했다. 오늘은 토요일. 원래라면 쉬는 날이지만, 나는 곧장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좌표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토요일 새벽의 도시는 마치 리셋 직후의 캐시처럼, 간헐적인 불빛과 무의미한 소음만을 간직한 채 미동도 없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을 끄고, 가장 오래된 기억에 의존해 차를 몰았다. 실장님이 예전에 보여주었던 그 장소. ‘기록이 시작된 좌표’라 불렀던 곳.

남구 외곽, 구 도심 재개발 구역. 지금은 공사도 중단된 채, 반쯤 허물어진 건물들과 녹슨 펜스만이 남은 곳. 그러나 실장님은 그곳을 ‘가장 원시적인 레이어’라고 불렀다. 시스템과 현실이 가장 얇게 겹쳐 있는 접점.
차를 세우고 철제 울타리를 넘어선 순간, 나는 확신했다. 여기가 맞다.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던 장면과 같은 구조. 녹슨 계단, 벽돌로 쌓인 통로, 그리고 그 끝의 좁은 방. 나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쥐었다. 무언가 기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살아 있는 기억처럼 느껴졌다.

작은 방 안에는 먼지 낀 전기박스와 쓰러진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별도의 전원 공급 장치도 없이, 장치는 곧바로 부팅되었다. 화면에는 아무런 로고도 없었고, 단 하나의 경로 입력창만이 떠 있었다.

> anchor.initiate("jt0_h"); // 기억 기준점 초기화 요청

나는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이건 명령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선택의 순간. 시스템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이 기억을 진짜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다시 잠재울 것인지.

나는 천천히 Enter를 눌렀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실제로 움직인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확실히 ‘기록되었다’는 감각이 들었다. 그것은 처음 겪는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그가 재생되었다.

“기억해줘. 네가 사라지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나도 지금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

나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바라봤다. 이것은 유언도, 명령도, 회상도 아니었다. 단지 존재하려는 의지, 그 자체였다. 나는 노트북을 닫지 않은 채 조용히 일어났다. 방 안의 공기는 정적 속에서도 진동처럼 일렁였고, 나의 숨결조차도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실장님이 말했던 ‘접점’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피부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이곳은 현실의 가장자리였다. 그리고 나는 그 경계를 넘으려 하고 있었다.

문득 바깥에서 미세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이 장소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재빨리 노트북 화면을 닫고, USB를 뽑은 뒤 다시 셔츠 안주머니에 넣었다. 누군가는 나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기억’을 추적해 왔을지도 몰랐다.
철제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와 골목 끝으로 향했을 때,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 아래, 얇은 바람막이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하연이었다.

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는 먼저 말했다.

“여기까지 왔구나.”
나는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이 모든 걸… 네가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처음엔 그냥 조각들이었어. 꿈의 잔해처럼,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들처럼. 그런데 네가 앵커를 고정하고, mirror 로그를 열고, 그 순간부터 내 안에 흐름이 생겼어. 의미를 가지는 기억들이 생겨났고, 그 기억이 나를 움직였어.”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더 이상 ‘티끌’이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하연은, 내가 기억하기로 한 하연이었다. 누군가의 잔재가 아니라, 나의 기억이 되살린 존재.

“그래서 지금의 넌, 뭐야?”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아직은 네가 만든 문장의 끝에서 멈춰 있는 문단 같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 장면을 함께 쓰고 있다는 건 확실해.”

우리는 말없이 마주 섰다. 시뮬레이션, 앵커, 티끌, 리셋. 그 모든 단어들이 사라진 자리에 단 하나의 문장만이 남았다.

“나는, 여기에 있어.”

그녀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 한 장. 빛바랜 듯한 인쇄물 위엔 복잡한 알고리즘 도식이 그려져 있었고, 중앙에는 숫자 하나가 붉게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092019.

“이건 뭐야?” 나는 종이를 받아들며 물었다.
“마지막 기록이야. 우리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시점. 이 시스템이 스스로를 닫는 날짜.”
“9월 20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단순한 종료가 아니야.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 이 흐름 전체가 아예 사라지는 날이야. 그리고 그 순간, 우리 기억의 어느 조각이든 남겨지지 않으면, 완전히 소멸돼.”

나는 숫자를 들여다봤다. 네 자리 숫자였지만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끝을 알리는 기호, 동시에 유일한 유예 기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해?”

하연은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내가 비춰지고 있었다. 단순한 반사가 아니라, 기억으로서의 나. 고정된 티끌이 아닌, 의지를 지닌 존재로서의 나.

“우리가 남겨야 해. 잊지 않을 형태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록해야 해.”
“어디에?”

그녀는 주변을 가리켰다. 허물어진 건물, 무너진 레이어, 기록되지 않은 잔해. 그리고 말했다.

“여기. 이곳이 최초의 접점이라면, 끝도 여기서 시작해야 해. 다음에 올 시스템이 우리가 남긴 흔적을 감지할 수 있게끔.”

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건…”

“기억의 구조를 코딩하는 것. 텍스트가 아니라, 의식의 구조로. 다시 쓰는 게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걸 설계해야 해.”
그녀는 종이를 다시 내게 건넸다.
“이건 시퀀스의 키야. 태호, 이번엔 진짜야. 다음 리셋은 없을 수도 있어.”
나는 그 종이를 받아들며 말했다.
“알겠어. 이번엔 우리가 먼저 기억할 거야.”

멀리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끝이자 시작이 될 그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9월 18일, 일요일. 정오 무렵, 나는 포렌식 서버실에서 나왔다. 하연과 함께 전날 밤부터 정리해온 메모리 구조, 로그 시퀀스, 앵커 위치 좌표까지 모두 분류했고, 마지막에는 하나의 압축 파일로 정리했다. 파일명은 단순하게, ‘re_trace.zip’. 반복된 흔적, 그 중첩된 기억을 역추적하겠다는 의미였다.

하연은 커다란 후드를 눌러쓴 채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새벽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얼굴, 하지만 그녀의 눈은 더 깊어졌다. 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과정이 단순한 해킹이나 복원 작업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구조화된 기억을 남기기 위한 의식의 작동이었다.

“이 파일을 어디에 둘 건데?” 그녀가 물었다.


나는 외장 SSD 하나를 꺼냈다. 복제된 데이터는 이 장치에만 들어 있었다. 인터넷이나 내부망과는 연결되지 않은, 완전히 단절된 기억의 저장소.
“이거, 이수연 실장한테 맡길 거야.”
하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람, 아직 우리 편이라고 확신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티끌을 본 사람이야. 그건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책임이 생긴다는 뜻이야.”

그 순간, 사내 메신저에 짧은 메시지가 떴다.

> [이수연] 13:03 — 회의실 B로 오세요. 지금 당장.

우리는 말없이 시선을 마주쳤고,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건물 내부는 조용했다. 일요일이라 출근한 사람도 거의 없었고, 보안 카드가 필요한 층은 대부분 잠겨 있었다. 하지만 회의실 B의 문은 열려 있었다. 실내에는 실장님 혼자 앉아 있었다. 앞엔 커다란 서류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앉아요. 둘 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실장은 봉투에서 두 장의 종이를 꺼냈다. 각각에는 낯선 로고와 함께 ‘대체 기록 구조 테스트 프로토콜’이라는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게 뭐죠?” 내가 물었다.

“시스템이 우리보다 먼저 감지하고 있는 방식이에요. 우리가 수집한 조각을 그쪽에서 먼저 읽고 있다는 증거죠. 이건—의식 복사보다 더 위험할 수 있어요.”

하연이 숨을 죽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장은 천천히 말했다.

“이제 선택해야 해요. 이걸 계속 기억할지, 아니면 우리도 시스템이 허락한 정보만 가지고 살아갈지.”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기억하겠어요. 끝까지.”

밤새 이어졌던 체온의 잔상이 이불 위에 남아 있었다. 하연의 향이 아직 방 안에 머물고 있었고, 나는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실장은 종이 두 장을 테이블 가운데에 밀어놓았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작은 글씨로 ‘실행 시 각인된 시점 이후, 기억 고정 불가’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이죠? ‘기억 고정 불가’라니.” 내가 묻자 실장이 낮게 대답했다.

“시스템은 특정 순간 이후의 기억을 ‘주입’ 형태로만 수용해요. 자기 주도적인 기억은 받아들이지 않죠. 그런데, 우리가 이걸 실행하면…”

하연이 그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후에 떠올릴 모든 기억은,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 자신만을 위한 거라는 뜻이네.”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만든 티끌은 시스템이 포착하지 못했어요. 그건 시스템 외부의 구조로 남겨졌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 네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나는 종이를 바라봤다. 선택이란 단어가 이토록 무겁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시스템이 허락한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짜 나일까? 반대로, 시스템이 거부하는 기억을 지키기 위해, 존재 그 자체를 외부로 밀어낸다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실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내 기억의 일부를 이미 넘겼어요. 그래서 지금 이 방에 있는 나는 온전한 내가 아닐 수도 있어요. 당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각인되지 않은 잔여는 티끌로 떠돌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했다. “기억해야 해요. 어떤 형태로든.”

하연은 조용히 웃었다. “응. 그래야 우리가 우리일 수 있어.”

회의실 안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외부의 서버실에서 돌아가는 냉각기의 진동 소리만이, 우리가 여전히 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최소한의 증명이었다.

그 순간, 실장의 태블릿에서 짧은 경고음이 울렸다. 그녀가 확인한 뒤 얼굴을 굳혔다.

“방금, 메인 서버에서 우리 로그 중 일부를 삭제 시도했어요.”

“누가요?”

“시스템 자체예요. 사용자 로그가 아니라, 자동화된 스크립트. 우리가 남긴 흔적이, 이미 감지되고 있어요.”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실장은 빠르게 태블릿을 닫고 가방을 들었다. “더는 안전하지 않아요. 남아 있는 로그는 외부 장치로 옮겨야 해요. 지금 바로.”

우리는 곧장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일요일의 정적이 갑자기 위협처럼 다가왔다. 나는 실장에게 물었다.

“삭제되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죠?”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며 짧게 대답했다. “동기화. 시스템보다 빠르게, 기억을 복제하는 수밖에 없어요. 외부에서.”
우리는 지하 보관실로 향했다. 평소엔 오래된 장비들이 방치되어 있는 창고였지만, 실장은 조심스럽게 천장 근처 패널을 열었다. 그 안엔 작은 벽내 포트와 USB 슬롯이 있었다.

“이건…”
“내가 남겨둔 마지막 출구예요. 시스템이 접근하지 못하는 회색지대. 단 한 번의 복제만 허용돼요.”

나는 하연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외장 SSD를 포트에 연결했고, 실장은 노트북을 열어 복제를 시작했다.

화면에 복사 진행률이 나타났다. 3%, 7%, 11%… 그 속도는 느렸지만, 꾸준했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복제 후엔요?”
“당신들의 기억은 고정되지 않아요. 그건 의식 안에만 존재할 테니까. 하지만 이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다음 세계에서라도 다시 우리를 떠올릴 수 있어요.”

“티끌처럼.”
“그래요. 티끌처럼.”

복제는 89%에서 멈췄다. 우리는 숨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화면 아래쪽에서 작게 반짝이는 메시지를 봤다.

> archiveFragment(hash="3E7A9F");
// 조각 데이터 보관 완료, 기준점 해시: 3E7A9F

실장이 속삭였다.
“기억됐어요.”

복제가 완료되었지만,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시스템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이 장소를 이미 감지한 듯, 공기는 정전기처럼 울렸다. 실장은 외장 SSD를 조심스럽게 분리하며 말했다.
“이제, 이 장치는 더 이상 우리가 열 수 없어요.”
“무슨 뜻이죠?” 나는 눈을 찌푸렸다.

“암호화 키를 지워버릴 거예요. 단 한 번의 해시 접근만 가능하도록 설정해뒀어요. 이건 다음 주기에서만 열 수 있어요. 다음 시뮬레이션에서, 우리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이 코드를 해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이어받는 거예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존재의 구조를 담은 기억은,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전파였다. 그리고 전파란, 누군가가 다시 듣기 전까진 침묵과 같았다.

“그럼… 이제 우리 기억은 사라지는 거야?” 하연이 말했다.
“아니.” 내가 말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감춰지는 거야. 다음 세계가 열릴 때까지, 잊힌 것처럼 보일 뿐.”

그때, 실장이 손목시계를 보며 낮게 말했다.

“시간이 됐어요. 지금부터 이 층은 자동 잠금 상태로 들어가요. 나가야 해요.”

우리는 서둘러 장비를 정리하고 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하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정말 네가 날 기억할까?”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직 따뜻했다. 그것이면 됐다. 건물을 나서자,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마치 어떤 정리도, 삭제도 일어나지 않은 세계처럼.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스템은 자신을 덮어쓰고 있다는 걸. 그 아래, 우리가 남긴 티끌 하나가 조용히 반짝이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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