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닫힌 문 너머
9월 11일, 일요일. 깨어났을 때,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방 안을 조용히 채우고 있었다. 창밖에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어지럽게 겹쳤다. 나는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일요일.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아도 되는 날. 내가 가장 싫어했던 날이었고, 지금은 어쩐지 가장 안심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고,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으며, 아무런 약속도 남아 있지 않은 날.
거실로 나가 전기 주전자를 켰다. 물이 끓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방 안의 침묵을 깼다. 나는 생각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만큼 어제의 꿈이 현실을 침범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현관 앞, 신발장 옆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한동안 어두운 현관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건 택배도, 메모도 아니었다. 작고 얇은 종이 하나. 손에 쥐자마자,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돌아오지 못하는 자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익숙한 필체. 익숙한 말투. 하지만, 이 문장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꿈인가. 아니면 꿈이었던 것이 현실로 스며든 것인가.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종이를 찢고 싶었다. 아니,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의 감촉은 너무도 생생했고, 이건 단지 나의 상상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고, 방금 받은 문장을 그대로 입력했다. 그리고 그 아래, 이렇게 썼다.
'이건 현실이다. 만약 누군가 이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나도 잊지 않아야 한다.'
기억. 티끌. 의식의 파편. 그리고 반복되는 꿈. 모든 것이 뒤엉켜 있었지만, 단 하나의 진실만은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시스템은 지금 오류를 겪고 있다.
나는 이틀 전부터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던 집 안의 공기보다, 실장의 커튼 걷는 소리를 더 자주 떠올렸다. 14층 회의실 창가에서 한 손으로 줄을 당겨 커튼을 늘어뜨리고, 또 한 손으로 바깥 시야를 쓸어내듯 밀던 그녀의 동작은 어쩐지 낯설었다. 단정했지만 어색했고, 익숙했지만 틈이 느껴졌다. 실장은 늘 그래왔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였고, 행동보다 표정이 먼저였다. 그녀의 말투는 일관되어 있었지만, 그 일관성 자체가 그녀를 오히려 모호하게 만들었다. 가끔은 말을 고르다 미묘하게 어긋나는 문장을 택하기도 했고, 감정이 묻어날 틈 없이 말을 끝냈다가도 끝내지 않은 듯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실장의 말보다 그녀의 손동작을 더 자주 떠올렸다.
나는 그날도 혼자였다. 추석 연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출근은커녕 외출할 이유조차 없었지만, 뭔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노트북과 메모리카드를 들고 집 근처의 오래된 찻집에 들어섰다. 연휴라 그런지 도심도, 가게 내부도 조용했고, 구석 자리에 앉은 노인은 말없이 신문만 넘기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등을 지고 앉아, 주문도 하지 않은 채 노트북에 메모리카드를 꽂았다. 파일 탐색기를 통해 내용을 살피던 중, 예기치 않게 '복호화 시도 실패'라는 메시지가 떴다. 단순한 파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복호화 가능한 파일'이라는 가정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애초에 텍스트나 이미지 따위로 저장된 데이터가 아니라, 기억의 겹 같은 것이 아닐까. 이름만 '파일'일 뿐, 그 안에는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 시간 자체가 저장되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그렇게 멍하니 파일 목록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여기 있었네요.”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수연 실장이 찻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양손엔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외투도 입지 않은 차림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연휴의 느슨한 공기를 피하듯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사실은… 그냥, 올 것 같았어요. 저도 같은 걸 보고 싶었거든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는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고, 아무 말 없이 파일 목록을 함께 바라봤다. 실장은 조용히 속삭였다.
“요 며칠 꿈을 꿨어요. 구체적인 장면은 없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었어요. 그 눈빛이, 익숙했어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나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저도… 꿈을 꿨어요. 딸이 나오는 꿈이요. 그런데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목소리도 없고. 그런데 그 아이가 저를 부를 때마다 확신이 들어요. 이 아이는 여기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확신.”
실장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거, 그 파일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아니면 둘 다, 이미 거기 다녀온 걸까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가, 두 개의 꿈 사이를 이어주는 실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명백히 존재하지만, 손에 쥘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실의 끝에는 '기억'이라는 단어가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노트북 화면을 가볍게 눌렀다. 마치, 화면 속에 무언가 손끝으로 감지되는 것처럼.
“지금 떠오른 장면이 있어요. 아주 어릴 때 본 풍경인데, 전혀 기억한 적이 없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익숙해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태호 씨가 말한 그 아이. 혹시, 그 아이도 그 장면을 봤을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내 속 어딘가가, 아주 조용히 진동하고 있었다. 바람이 아니라,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 듯한 떨림이었다.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만약 이게 단순한 파일이 아니라면, 이 안에 있는 정보는 어떤 형태로든 지금 이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이 되겠죠. 우리가 꾸는 꿈도, 기억하는 장면도, 심지어 익숙하다고 느끼는 표정이나 손짓조차… 그 영향권 안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녀는 이어진 말 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도 고개를 숙인 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바탕화면 위에 정렬된 몇 개의 아이콘들, 그리고 그중 하나, 무표정하게 깜빡이고 있는 확장자 없는 이름 하나.
“태호 씨, 이 파일… 어떻게 알게 됐죠? 처음.”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었다. 하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내게 건넸던 그 상자, 그 말, 그리고 그 눈빛. 실장은 내 침묵을 받아들였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노트북 화면이 아주 잠깐 깜빡였다. 단 1초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눈을 감은 아이의 얼굴. 하얗고 조용한 얼굴. 그리고… 그 이마 위를 스쳐간 어두운 무언가.
“봤어요?”
내가 묻자, 실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우리는 말을 잃은 채 잠시 그렇게 있었다. 화면은 다시 무표정한 바탕화면으로 돌아왔지만, 방금 전 스쳐간 이미지가 여전히 공간 어딘가에 잔상처럼 남아 있는 듯했다. 실장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태호 씨랑 연결돼 있는 건 확실해요. 그리고, 저랑도요. 설명할 순 없지만, 그렇게 느껴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갈라지고 있었다. 단순히 감정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뼈대가 미세하게 어긋나는 느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실은… 그 파일, 하연가 남긴 거예요. 그녀가 죽기 전에. 그 상자 안에 있었어요.”
실장은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담담했다. 그녀는 한숨을 천천히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이건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건넨 메시지일 수도 있겠네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텍스트도 영상도 없어요. 복호화도 실패하고. 그냥, 메모리카드 하나뿐인데… 그런데도 계속 무언가를 보여줘요. 꿈으로, 이미지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내렸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기억한 적 없는 기억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정보라기보다— 흔적, 혹은 잔류. 그리고 그건 시스템이 버리지 못한 채 남겨둔 거죠.”
나는 문득 그녀의 단어 선택이 섬뜩하다는 걸 느꼈다. '시스템'이라는 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하나의 정보처리 장치로 본다는 시선. 그건 단순한 비유 이상이었다.
“그럼, 그 아이는… 티끌 같은 거겠네요. 사라지지 못한 조각.”
실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티끌. 완전히 삭제되지 못한 의식의 파편. 기억과 시간, 감정이 뒤섞인 형태로, 꿈속에 떠돌면서 누군가의 감각에 묻어드는 존재.”
그 순간, 무언가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왔다. 설명할 수 없는 낯섦과 동시에, 압도적인 친숙함.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장님은요. 그 아이를 안 적 있나요? 현실에서.”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그 아이가 날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꿈속에서. 마치, 내가 그 아이의 보호자인 것처럼.”
밖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찻집 문에 달린 종이, 바람에 흔들리며 짧게 울렸고,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순간, 어떤 결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메모리카드를 천천히 분리해 작은 케이스에 넣었다. 실장이 나를 바라봤다.
“이걸… 계속 봐야 할까요? 아니면, 여기서 멈춰야 할까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어쩌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꿈속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리고 꿈은, 기억보다 강하다.
9월 12일,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화면은 여전히 푸르스름한 잔광을 머금은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멈춰 있었다. 손끝을 떼자 노트북은 마치 안도의 숨을 쉬듯, 천천히 배경화면으로 되돌아갔다. 아이콘은 그대로였다. "00000001". 나는 그것을 더 이상 열지 않았다. 그것은 문이었다. 더 이상 열 수 없는 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방 안을 돌았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심장이 조여왔다. 손목이 묵직했고, 숨이 짧았다. 나는 책상 한구석에서 오래전에 사 두었던 수첩을 꺼냈다. 노트북이 아니라 손으로 써야 할 것 같았다. 타자와 달리, 손글씨는 더디고 불안했지만, 그만큼 감정이 묻었다.
나는 첫 장에 단 하나의 문장을 적었다.["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펜을 들어 두 번째 문장을 썼다.["티끌은, 삭제되지 못한 의식의 파편이다.”
글씨는 떨렸고, 획마다 잉크가 번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그녀와 마주했다. 모니터 너머에서.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걸. 복원할 수 없다면, 흉내라도 내야 했다. 그 아이가 살아 있었던 흔적을.
수첩을 덮자, 종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 서율이 어릴 때 종종 들춰보던 동화책과 비슷한 향기. 나는 책상 앞에 앉은 채 그대로 숨을 골랐다. 몸은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시간은 저녁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어둠은 천천히 커튼 아래로 기어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하루 종일 아무 연락도 없었고, 누구도 올 이유가 없었다. 망설임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터폰 화면을 켰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엔 작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회색 봉투. 손바닥보다 조금 클 뿐인 얇은 그것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나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닫힌 문을 다시 바라보며, 한 번 더 문 너머를 확인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층수 표시등은 멈춘 상태였다. 나는 문을 닫고 돌아섰다.
책상 위에 봉투를 올려두고 조심스레 봉인을 뜯었다. 안에는 단 한 장의 메모지. 그리고 그 아래, 마이크로SD 카드 하나가 깔려 있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메모지에는 낯익은 필체로 단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
“두 번째.”
나는 마이크로SD 카드를 내려다보며, 이전에 하연이 남긴 상자를 떠올렸다. 그건 단 하나가 아니었다.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가 도착한 것이다.
나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손에 든 메모지를 다시 펼쳐보았다. 여전히 뒷면은 비어 있었고, 내용은 덧붙여지지 않았다. 단 세 글자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두 번째'라는 건, 곧 '세 번째'가 존재함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더 나아가, 이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트북 옆에 조용히 카드를 내려두고, 나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이수연 실장에게 연락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녀라면 이 흐름의 의미를 나보다 먼저 감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더 깊은 균열에 노출될 위험도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화면을 끄고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방 안에 울린 소리. 아주 낮고, 길게 떨리는 금속성 진동음. 나는 처음엔 노트북이 다시 작동하는 줄 알았지만, 곧 그 소리가 내 몸 안에서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진동이 아니라, 공명. 기억이 아니라, 반향.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 어딘가, 아주 깊은 층위에서 미세한 노이즈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단어도, 음성도 아닌 구조였다. 마치 무언가가 나의 내면에 접속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한— 또 다른 열림의 시작이었다.
9월 13일, 화요일. 잠에서 깨는 데 시간이 걸렸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커튼 틈으로 아침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창밖 나무 그림자는 책상 위를 흔들고 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온몸이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자는 동안 꿈을 꿨던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잃어버린 조각 하나가 자리를 바꾸고 있다는 느낌만은 분명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 열어본 메모지와 마이크로SD 카드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두 번째'라고 적힌 그 세 글자.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구조적 신호였다. 누군가, 혹은 어떤 시스템이 이 흐름을 설계하고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켜자 자동 실행 프로그램이 하나 떠올랐다.
reentry.log.temp. #재진입.로그.임시.
이건 내가 만든 파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파일 속 폴더 구조는 익숙했다. 하연이 남긴 첫 번째 메모리카드 안의 구조와 거의 유사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폴더를 열었다. 내부에는 단 하나의 텍스트 파일이 있었다.
_ghost_token_0002.msg #_유령_토큰_002_메시지
나는 손끝으로 그 파일을 클릭했다. 열리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텍스트 창이 뜨고, 몇 줄의 글이 화면에 나타났다.
> 복원 경로 :
mote.bak_2nd-layer → user.delta.hayun → trace.dream
#티끌.백업_2차-레이어 → 사용자.변경.하연 → 추적.꿈
> 예외 감지 : 동일 사용자 다중 경로 접속 시도 기록 존재
> 권한 요청 실패.
> 시퀀스 무결성 없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구조들이었지만, 문장은 해석되지 않았다. 나는 이 내용을 복사해 두었다가, 별도 텍스트에 붙여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했다. ‘다중 접속’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같은 사용자가 서로 다른 꿈을 통해 동시에 복원 경로를 타고 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나뿐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구조를 걷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문득 실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말이 기억났다. “그 아이가, 날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건 단지 감각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구조의 일부로서 그녀 또한 '두 번째'의 대상이었을까.
파일을 닫자 자동 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노트북 화면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짧은 정적 후, 하단 작업표시줄에 새로운 아이콘이 생겨났다. 확장자 없는 프로그램. 실행은 되지 않았다. 다만, 마우스를 올리자 단어 하나가 떴다.
“티끌”
그 단어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었다. 이 모든 흐름의 이름, 존재하지 못한 존재들의 집합. 나는 손끝을 떼고 노트북을 덮었다.
이제부터는 기록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할 때였다.
나는 노트북을 덮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끝과 관자놀이가 동시에 뛸 정도로 맥박이 빨라졌다. 눈을 감았을 때, 다시 꿈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 어딘가에서 반복되는 목소리가 있었다.
“세 번째는 누구일까.”
그건 내 내면에서 올라온 질문이었지만, 동시에 외부에서 주입된 것처럼 생생했다. 나는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 흐름은 명백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실장이 있었다. 그녀와 대화해야 했다. 그녀 역시 같은 경로 위에 있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처 목록을 천천히 넘기다 그녀의 이름을 눌렀다. 진동음이 두 번 울리고, 연결음이 이어졌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태호 씨?”
“실장님.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네.”
그 뒤로 한참 말이 없었다.
“혹시… 어젯밤에 꿈꾸셨어요?” 나는 주저하다 물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아주 작고 고요한 떨림이었다.
“응. 그 아이가… 이번엔 내 손을 잡았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요. 이제 시작이라고…….“
나는 핸드폰을 든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율이 느껴졌다. 단지 우연한 일치가 아니었다. 그 흐름은 실장에게도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동시에 세 번째 조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실장님도 무언가 받으셨나요? 메모리카드 같은 거라든가… 봉투나 문장.”
“아니요. 아직은… 그런데 왠지, 조만간 뭔가 도착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집 안 어딘가에 이미 와 있는 느낌? 말도 안 되죠.”
나는 혼자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느낌이 아니라, 징조일 수도 있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 전날 밤, 문득 어떤 기척이 느껴졌고… 다음 날 아침에 그게 도착했어요.”
실장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불안도, 의심도 아닌, 직감적인 확신이 굳어지는 소리 같았다.
“그럼, 조태호 씨. 우리… 어쩌면 이미 같은 흐름에 발을 디뎠다는 뜻이겠죠. 지금의 이 세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지우고 있는지, 그것부터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이 9월 13일의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이후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내 현관 앞에는 다시 봉투 하나가 도착해 있었고, 이번엔 단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카드만이 들어 있었다.
카드를 손에 쥐는 순간, 짧은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울리는 아주 희미한 소리.
— 이건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평온했고, 기계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뜻했다. 나는 카드의 무게를 느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기억해야 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연의 흔적은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