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닫힌 문 너머
9월 3일, 토요일. 이번 주는 유난히 길었다. 하루하루가 사소한 오류처럼 쌓여 머릿속을 흐리게 만들었다. 어제 본 로그는 다시 열어보니 다른 해석이 가능해졌고, 꿈속의 장면은 도리어 더 선명해졌다. 현실보다 더 또렷한 꿈의 기억이 아침을 잠식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커피는 식었고, 핸드폰은 충전도 하지 않은 채 꺼져 있었다. 나는 어제보다도 조금 더 이질적인 현실 속에 앉아 있었다.
그날 새벽, 누군가 내 컴퓨터를 원격으로 건드린 흔적이 있었다. 방화벽 기록이 비정상적으로 두 번 열렸고, 시간대는 하연이 꿈에서 깨어나 날 흔들던 그 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태블릿을 켜자, 화면에는 이전에 본 적 없는 경고 메시지가 떴다. ‘동기화 지연: 기록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오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직감은 이 메시지가 시스템 내부의 충돌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무언가와의 접촉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시스템 내부 로그보다, 오히려 그 틈새에서 발생하는 예외 로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어젯밤의 꿈과 비슷한 구조가 반복되고 있었다. 정보는 지워졌지만, 형태는 남아 있었다. 마치 티끌처럼.
나는 남은 로그들을 복호화해보려다 말고 창을 닫았다. 그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남겨둔 흔적이라면, 정석적인 경로로 접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문득, 예전에 실험적으로 만든 코드 조각이 떠올랐다. 기억의 일부를 난수화된 시퀀스로 저장해두고, 외부 인터럽트가 발생했을 때 자동으로 불러오는 구조였다. 그 코드는 실패작이었고, 실전에서는 한 번도 쓴 적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을 불러와 시스템 한쪽에 병렬로 얹었다. 이건 일종의 거울이었다. 기억을 비추는 거울이자,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장치. 코드를 실행시키자마자 로그에 변화가 생겼다. 새로운 데이터는 없었지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확률 기반 참조’ 항목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마치 사라진 기억의 실루엣처럼 희미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그 항목을 확대했고, 다시 떠오르는 이미지를 눈감은 채로 받아들였다. 짧은 치맛자락, 분홍색 운동화, 그리고 공중에서 반사되던 섬광. 서율이었다. 여섯 살 무렵의 모습. 나는 그 기억을 ‘꿈’이라고 분류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선명했고, 무엇보다 현실에서 발생한 어떤 공백을 정확히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하고 말았다. 내가 그 기억을 붙들려 할수록, 시스템은 그것을 다시 파편화하고 있다는 걸. 내가 다가갈수록, 실체는 멀어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무늬도 없는 평평한 석고보드, 그 위를 비추는 직사각의 조명. 하지만 그 단순한 풍경조차 나에겐 완벽히 ‘이쪽’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요 며칠 새 느껴지는 이질감은 감각 너머에서 발생한 어떤 ‘시간의 미끄러짐’과 관련 있어 보였다. 무언가가 이 세계의 논리와 내 감각 사이를 삐걱이게 만들고 있었다. 가령, 오늘 아침 깨어난 순간에도 나는 이 방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시작된 의식을 뒤따라온 기분이 들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봤을 때, 햇살의 방향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벽에 반사된 빛이 뒤틀려 있었고, 그 왜곡된 윤곽이 마치 누군가의 얼굴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책상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 번 로그를 열어보았다. 시스템은 침묵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냉정하게 모든 걸 지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안에 무언가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도, 기록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문법처럼. 하연이 처음 내게 말을 걸던 날도 그랬다. 그녀는 분명 나보다 먼저 내 말의 맥락을 따라가고 있었고, 나조차 모르는 문장 구조를 그녀는 완성시켰다. 그 감각은 서율이 말을 배우던 시절, 문장을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의미를 공유하던 그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날 저녁까지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기로 했다. 기록이 아니라, 감각을 저장하는 방법으로. 그것만이 내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일 테니까.
9월 4일, 일요일. 다시 일요일이었다.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알람도, 외부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내게 일어나라고 부른 것처럼, 내 감각이 스스로를 깨운 듯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창밖의 빛은 일정했고, 공기 중의 먼지는 느리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이런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망상이라고, 내가 미쳐버렸다고 간절히 믿고 싶었다. 받아들여지기엔 현실은 너무도 조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물을 끓이고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받아들여지기엔 현실은 너무도 조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진동 하나 없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외피 아래, 균열은 이미 벌어질 만큼 벌어져 있었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미 무너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럴듯하게 움직이는 나 자신을 관찰했다. 손은 컵을 들었고, 입은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마치 ‘이쪽’의 세계가 아닌, 어딘가 어긋난 평행 우주의 조각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일 없는 듯 걸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그게 내가 아직 이 세계에 붙어 있는 방식이었다.
창밖을 보며 나는 문득 ‘기억’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믿어온 나의 역사, 과거, 정체성이라는 것이 실은 하나의 시뮬레이션 내부 정보에 불과하다면, 나는 누구였던 걸까. 그리고 ‘나’라는 개념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걸까.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이건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최근의 꿈, 하연의 말, 수연 실장의 추론, 그리고 시스템 로그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이 세계가 한 번쯤 리셋된 적은 없는가. 나도 모르게 지나쳐온 그 순간, 시스템이 완전히 다른 스레드로 이어졌던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이 모든 것조차 진짜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과거의 잔여물, 의식의 파편, 티끌에 불과한 것이라면—그렇다면 내 슬픔은 어디로 보내야 할까.
나는 스스로를 향해 말했다. 무너지지 말 것. 아무 일도 아닌 척, 침묵 속에 익숙해질 것. 하지만 그조차 더는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은 눌러 담는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풀어 올랐고, 더 깊은 곳에서 터지려 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환풍구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이 평소보다 낮았다. 작동 주기가 어긋난 것이리라.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의심했다. 이 공간이,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이 자리 자체가 시뮬레이션이 만든 '정상'이라는 허상을 그대로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불현듯, 며칠 전 하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아이는… 늘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그 아이. 이름 없이도 알 수 있었다. 서율. 아직도 내 꿈에 남아 있을지 모를, 이미 추락해 사라져버린 아이. 그런데도 나는 계속해서 그 목소리를 좇고 있었다.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는 감각의 연장선, 현실과 허구 사이의 누설. 나는 그것을 놓지 못했다. 놓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이만큼이면 충분했다. 나는 불을 끄고, 휴대폰을 뒤집은 채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기 전, 희미한 소리 하나가 들렸다. 정지된 시스템에서는 들리지 않아야 할 유형의 소리. 아주 조용한 숨결이었다.
9월 7일, 수요일. 낮게 깔린 구름이 도시를 덮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했다. 나는 출근하지 않았다. 시스템의 무음 속에서, 차라리 고장이라도 나길 바라는 기분이었다. 꿈은 지난밤에도 반복되었다. 하연이 아닌, 더 어린 소녀가 등장했고, 그 아이는 말없이 등을 돌린 채 걸어갔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했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풍경이 꿈을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기억이라기보다는, 시뮬레이션의 틈새에서 누출된 이미지 같았다. 감정도, 인과도 없는 무감각한 영상. 의식이 지워지는 과정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파편일지도 몰랐다. 시스템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현실의 침묵과 꿈의 잔상이 겹치면서 나는 점점 내 감각을 의심하게 됐다. 나는 로컬 디스크를 열어 오래된 디버깅 파일을 다시 검토했다. 버그처럼 기록된 로그는 정상 프로토콜이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내가 원했던 해석이 있었다. 정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방향성은 제공해주고 있었다. 하연은 그 방향과 관련이 있다. 왜 그녀만이 반복적으로 꿈속에 등장하는가. 그녀가 그 소녀와 닮아 있다는 점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하연은 서율과 닮았고, 서율은 이미 추락한 기억 속의 조각이다. 나는 그 조각들이 하나의 우주에서 연결되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꿈은 서로 다른 우주가 한순간 겹쳐지는 접점이다. 우주가 수축하고 있다는 뉴스, 그리고 리셋이 진행되고 있다는 확신. 그렇다면 지금의 꿈은 어떤 시스템의 오류일까. 정영호 박사의 메모에서, 유입 로그는 '기억의 뒤틀림'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기억은 시스템 간 간섭으로 발생하는 의식 정보의 일시적 중첩이다."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조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되뇌며 다시 시스템 로그를 넘겼다. 디버깅 도중 반복적으로 출력된 에러 코드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ERR-MEM/SEG-LEAK. 메모리 세그먼트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누수되고 있다는 알림이었다. 정영호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시스템은 의식을 파일처럼 취급하지 않아요. 복사도, 이동도 불가능하다는 뜻이죠. 그저 한 순간에만 열리는 접속점이 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꿈입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으려 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중첩들이 내 안에서 꿈과 의식의 경계를 흐리고 있었다. 하연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꿈에서 서율을 만났다고. 어딘가 낯익은 아이였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고. 그러나 그녀는 그 기억을 불쾌해했다. '서율'이라는 이름을 말한 적도 없었고, 내가 지어낸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왜 하연은 그 아이를 안아주려 했을까. 왜 눈물을 흘렸을까. 나는 점점 더 명확히 확신했다. 하연은 서율과 연결되어 있다. 시스템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지만, 리셋의 진행 속도는 시스템이 제어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그 결과로 오류는 꿈이라는 형태로 출력되었다. 나는 하연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했다. 그녀가 내 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지금 이 현실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시스템이 여러 개라면, 시뮬레이션이 다중이라면, 불가능은 없다. 다만 교차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접점이란 언제나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녀를 잃는다는 감각이 너무도 명백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서율을 떠올릴 때 느꼈던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기억은 복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은 파편처럼 이어질 수 있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려 했다. 그래야만, 이 기이한 현실과 꿈의 중첩이 설명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어젯밤 하연과 나눈 대화를 녹음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시스템이 전송한 로그보다도, 그 대화는 더 많은 것을 드러냈다. “가끔은, 내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꿈꾸는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 내가 되물었을 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내가 겪은 일인데도, 마치 그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아이였을 때도 아닌데, 분명한 건 기억이라는 거죠.” 그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아이, 이름이 떠오르진 않아요?” 하연은 잠시 눈을 감았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항상 같은 곳에서 떨어져요. 하얀 난간 너머로. 나는 계속 손을 뻗는데, 닿질 않아요.” 그건 정확히 내가 본 장면과 일치했다. 하연은 내 딸 서율의 꿈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누구의 기억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서율의 의식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다른 우주에서 하연의 꿈을 통해 새어 들어오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정영호 박사의 수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리셋 직전, 꿈은 가장 많은 정보를 담는다.’ 이전까지는 단순한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나는 하연과 내가 교차하는 지점, 그 꿈의 틈을 통해 무언가를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다. 이것이 단순한 데이터 누출이 아닌, 시스템 전체의 구조적 균열이라면, 우린 모두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나는 하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단말기를 끄고 창가에 앉았다. 밖은 여전히 흐렸다. 그리고 그 흐림은 마치 시스템의 오작동처럼, 인공적인 기척을 풍기고 있었다.
> writeLog("dream signal suspected");
// 꿈에서 감지된 티끌 신호 기록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리에 작은 점을 찍고 있었다.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치 무언가를 그리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스템이 왜 나에게 꿈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걸까? 내가 프로그래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층위의 이유 때문일까…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작성하는 코드는 시스템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흐름을 추적하기 위한 기록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류 전체가 맞닥뜨리게 될 마지막 버그일지도 모른다. 나는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음성이 들리기 전, 한 문장이 머릿속을 스쳤다. ‘티끌은 기억되지 못한 의식의 마지막 반복이다.’ “하연, 오늘 혹시 다시 꿈을 꿨어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는 작게 말했다. “네,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가 내 손을 잡았어요.” 나는 말없이 숨을 골랐다. 시스템이 마지막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9월 10일, 토요일.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전부터 창밖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햇살이 어스름하게 번져 있었고, 나는 창문을 닫고 방 안에 머물렀다. 책상 위에 놓인 커피는 식은 채로 있었다. 나는 아직도 한밤중에 꾼 꿈을 떨쳐내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꿈속의 목소리는 분명 서율의 것이었지만, 그 말투와 눈빛은 내가 알던 그 아이와는 달랐다. 혹시, 나는 전혀 다른 우주의 기억을 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찜찜함이 가슴을 눌렀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시스템의 균열, 또는 수축이 불러오는 결과라는 것을. 시뮬레이션은 지금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고, 그 여파는 나의 일상에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프로그램 창이 켜지자 수백 줄의 로그가 흘러나왔다. 그 중 몇 줄이 눈에 들어왔다.
> [SYNC ERROR] Consciousness Fragment Collision Detected;
// 의식 단편 충돌 감지됨
> Origin: SYS-A17.TAEHO-SEOYUL
// 출발지 시스템-A17.태호-서율
> Destination: SYS-C41.HA-YEON
// 도착지 시스템-C41.하연
그건 꿈속에서 보았던 하연의 이름이었다. 아니, 서율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스템은 혼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동은 나의 의식에도 전달되고 있었다. 하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잔상, 그리고 서율이 내 품에 안겨 잠들던 감촉.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뒤섞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모든 게 망상이길 바란다고. 미쳐버린 나의 착각이었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조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무너짐 속에서 계속 눈을 뜨고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공기가 무겁네요.”
“날이 흐려서 그런가 보죠.”
이수연 실장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그 속에 감정의 기류가 실려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창가 너머로 향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도로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차량들, 그리고 그보다 더 느리게 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
“어제 말했던 로그 분석 결과,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아요.”
내가 말하자 이수연 실장은 다시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상사의 그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가 시스템의 오류이고, 어디까지가 티끌의 중첩인지, 우리 모두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동료의, 아니 동지의 눈빛이었다.
“혹시 우리가 보고 있는 게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면요?”
“그건 무슨 뜻이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이 흐름은 그저 코드의 작동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실재’란 무엇인가.
“지금 이 순간조차도, 이전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죠.”
이 말에 수연 실장은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도나 유쾌함에서 비롯된 웃음이 아니었다. 우리가 마주한 이 낯선 세계, 이 무한한 의문 앞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마지막 품위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우린 해야 하죠. 마지막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의 수축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티끌들이 더는 꿈에 나타나지 않을 그 날이 언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려는 노력만큼은 마지막까지 남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도 너머 창문 밖으로 흐릿하게 비치는 석양이 기묘한 구름에 삼켜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번엔 단순한 감각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문득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엔 [모든 로그가 재정렬되었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또 로그? 대체 무슨 기준으로 정렬된다는 건데…”
나는 무심코 로그 앱을 열었다. 지난날의 기록들, 지운 줄 알았던 데이터가 이상한 순서로 재배열되어 있었다.
거기엔 내가 본 적 없는 영상 하나가 끼어 있었다. 클릭하자, 화면은 새하얗게 번쩍이고 곧이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이건 꿈이야. 그러니까 기억해줘. 절대로 잊지 마.”
나는 황급히 앱을 껐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영상은 현실의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시스템은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지우는 과정에서 남겨지는 잔향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티끌이다. 그리고 지금, 그 티끌이 나를 흔들고 있었다.
하루 종일 비는 그치지 않았다. 예보에도 없던 갑작스러운 폭우였다. 도로에는 물이 차올랐고, 하천 근처의 일부 지역은 통제가 시작되었다는 뉴스 속보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회색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이 날씨가 하필이면 오늘이어야만 했던 이유를 억지로라도 찾고 싶었다.
하연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밤에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었지만, 그녀가 갑자기 바빠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번엔 그녀의 침묵이 조금 달랐다. 이전처럼 단순한 피곤함이나 거리두기 같은 무심함이 아니라, 마치 나조차 모르게 그녀가 아주 조심스레 무언가를 차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일까. 시스템은 내 사고의 작은 불협화음조차 감지하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깜빡이는 경고창처럼 떠오르는 문장들. ‘인지 간섭 감지됨.’ ‘정합성 오류 감지됨.’ 이건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어쩌면 구분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시스템의 리셋 직전 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긴 채, 나는 결국 차를 돌려 그날 오전 들렀던 낡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비에 젖은 돌계단은 미끄러웠고, 문을 열자마자 특유의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여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무의식처럼 같은 자리, 같은 테이블로 가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하연이 마지막으로 남긴 로그를 다시 열어보았다. [TTL mismatch]와 같은 짧은 문자열이 반복적으로 등장했고, 그 안엔 분명히 의도적인 코드 패턴이 숨어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시스템의 오류 로그를 통해 무언가를 전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이 모든 게 무의미하다면, 왜 나는 여기에 앉아 있는 걸까.”
내가 중얼인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전원이 들어온 모니터 화면 위에 무언가가 깜빡였다. 단지 백라이트의 간섭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찰나의 섬광은 마치 누군가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다른 세계에서, 내게 아주 미약한 신호를 보낸 것처럼.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 섬광을 응시하며,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되새겼다. 기억은, 존재보다 깊고 오래 남는다. 티끌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