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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n 15. 2023

[에세이] 우연 - 2

좁은 세상

 나는 이 부장과 회사 건물 입구 주차장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다. 그는 내가 속한 프랑스 국적 기업의 한 사업부의 부서장으로, 나 못지않은 애연가이다. 어렵게 성사된 큰 고객사와의 프로젝트에 납기 차질이 발생한 탓에, 담배를 태우면서도 연신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대화가 끝을 모르고 꼬리를 문다. 이따금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긴장된 얼굴로 내 시선이 따라간다. 하지만 이 부장과의 대화는 집중의 흐트러짐 없이 이어진다. 담배를 태울 때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대화하는데, 이는 담배연기를 서로의 얼굴을 향해 뿜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장의 담당자와 어떻게 담판을 지어야 할지를 이 부장이 고심하며 연기를 뿜는다. 나도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며 연기를 뿜다가, 연기 너머로 익숙한 얼굴을 응시한다.


 희끗한 머리에 체크무늬 셔츠를 빳빳하게 바지로 당겨 넣은 아버지 또래로 보이는 한 남성이 오른쪽에서 걸어온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듯, 그의 가슴은 하늘을 향하고 걸음이 시원시원하다. 나는 숨을 내쉬듯 천천히 뱉어내던 연기를 고개를 숙여 아래로 뿜어낸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체크무늬 셔츠의 남성의 시선이 스치듯이 내 얼굴을 향했다가, 다시 정면을 향한다. 채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이내 그와 나의 시선이 나란해진다. 내 고개가 그의 걸음 속도에 맞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조금씩 돌아간다. 아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분명 초면이 아님을 서로가 인지한다. 직감적으로 담배를 든 왼손을 허리 뒤로 숨긴다. 내가 먼저 고개를 숙여 그를 향해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그 소리에, 이 부장이 영업직의 본능으로 조건반사적 인사말을 뱉으려다 말고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는 분이야?) 나는 이 부장에게, 그런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인사한 것이라고는 차마 말을 못 한다.

<이야, 네가 여기 웬일이고!>

체크무늬 셔츠의 그가 큰 소리로 내 인사에 답하더니 방향을 내 정면으로 틀어 성큼성큼 걸어온다. 머릿속 기억에서 겨우 그를 떠올려낸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이 부장에게 (제 아버지의 친한 친구세요.)라고 말한다. 이에 이 부장은 입꼬리 양쪽을 길게 늘여 미소 짓고, 깍듯한 느낌이 들게끔 체크무늬 남성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체크무늬 남성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다. 이윽고 이 부장은 왼손의 손목시계를 보더니 급한 일이 있는 듯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와 나는 일정을 전산으로 공유한다. 그에게는 당장 바쁜 일이 없다. 고마운 노릇이다.


<이야, 너 여기서 일하는구나. 우리 촌놈이 성공했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곧 은퇴를 앞둔 공무원인 그가 나를 향해 오른손을 내민다. 나는 담배를 든 왼손을 몸 뒤로 숨기고서 오른손으로만 그와 악수를 한다. 혹여 예의 없어 보일까 봐 멋쩍게 웃는다. 그 점을 간파한 것인지 그가 양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고 연신 흔든다. 그의 반가움이 내 손목과 어깨를 타고 올라와 내 고개까지 흔든다.

<아니... 제 고향은 청송이고, 아저씨는 대구에서 제 아버지와 친구가 됐는데, 어떻게 제가 아저씨를 서울에서 이렇게 만나지요? 신기하네요.>

나는 당연한 소리밖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멍청한 말을 늘어놓는다. 그저 (반가워요, 아저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하고 말할걸 하는 후회가 든다.

<내 딸이 얼마 전에 이리로 이사를 했는데, 집에 손볼게 많아서 도와주러 왔다. 지금은 막 철물점 가는 길이다. 어디 쪽에 있더라?>

<가시던 길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요. 그럼 곧바로 간판이 보여요.>


 한참을 건전지가 들어간 인형처럼 내 오른손을 위아래로 흔들던 그의 손이 느려진다. 내 목과 어깨, 팔도 차분해진다.

<음, 그래.>

서로가 말없이 마주 보고, 두 얼굴에 미소가 짧게 지어졌다가 풀리기를 몇 번 반복한다. 그가 손을 놓아야 할 때를 놓친 것이 분명하다. 허리 뒤로 들고 있던 담뱃불이 꺼진 것이 느껴진다. 그의 양손의 힘이 느슨해지더니 이윽고 내 오른손을 천천히 놓는다. 그는 또 만나자는 듯 오른손을 높게 들어 올리며 몸을 돌려 가던 길을 재촉한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마주침은, 예전 담임교사를 복도에서 만난 학생의 그것과 같이 마무리된다. 나는 그의 뒷모습에 목례를 한 뒤, 회사 건물로 몸을 돌린다. 납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며 걸음을 옮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며, 나는 이 나라가 생각보다 작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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