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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n 16. 2023

[에세이] 활

온수관과 야전선, 피와 땀.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부락 잣나무골, 그곳에서 지렁이를 잡아다 닭장에 던져주고, 동네 형들에게 배운 대로 토끼잡이용 덫을 철사로 꼬고 놀던 시절이다. 재미있는 일은 대게 새로운 무언가와 함께 찾아온다. 어른들이 알려주지 않아 존재조차 몰랐던 윗동네로 통하는 산 길을 알게 되는 일, 동네 형들이 그간 그들만의 비밀로 여기던 여름 철 물놀이 장소에 동행을 허락한 일, 너무 깊은 산 속이라 들어가 볼 엄두조차 않던 곳에서 발견된 가파른 썰매 모양으로 얼어붙은 냇물 따위가 그 무언가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손꼽히게 재미있는 것은, 동네 형들이 하는 걸 흉내 내며 노는 것들이다.


 일곱 살의 나는 활을 만들고 있다. 동네 형들이 자랑하던 그 활을 너무나 갖고 싶은데, 만드는 방법을 배웠어도 도통 뜻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 활이라 함은, 보일러의 온수관으로 쓰이는 플라스틱 재질의 관을 적당한 길이로 자른 다음, 원하는 만큼 휘어 그 양 끝을 전선 따위의 끈으로 고정하면 완성된다.


 나는 그 지름이 내 키보다 크게 말려있는 온수관 뭉치를 장독대 옆의 창고에서 찾아냈다. 양팔을 뻗어 내가 원하는 활의 길이를 가늠해 보고, 뭉치에서 어떻게 잘라낼지 고민하다가 처마 아래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도구들 사이의 톱을 떠올린다. 톱을 들고 와서 눈대중으로 온수관 뭉치의 한 부위를 정하고서는 열심히 톱질을 한다. 톱질이 깊지 않은 탓에 한 곳을 파고들지 못하고 좌우로 긁힌 자국을 넓게 만들다가 드디어 플라스틱 가루를 토해내며 온수관이 잘려나가기 시작한다. 한 번 위치를 잡은 톱질은 온수관 자체의 장력 덕분에 더욱 수월해진다. 어느덧 온수관이 풍선 터지는 소리를 내면서 끊어지고, 둥글게 말려있던 상태에서 곧게 펴지면서 내 턱을 때린다. 한 손에는 톱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잘린 온수관을 든 채로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가 큰 일을 하려면 눈물 나게 힘든 일도 겪는 법이다. 문득, 얼굴을 다친 까닭을 물을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울음이 절로 그쳐진다.


 이제 시위로 쓸 줄을 온수관, 나의 활에 걸어야 한다. 다행히 논에 벼를 심을 때 사용하는 검은색 야전선 다발은 흔하디 흔한 물건이다. 야전선을 활에 걸기 위해서는 활대 양 끝에 구멍을 내야 한다. 나는 커다란 못을 몇 개 찾아서는 삽 위에 올려두고 아궁에 집어넣는다.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꼬챙이로 빨간 숯을 건드리며 한참을 놀다 보니 못들의 색깔이 붉어졌다. 삽을 아궁이에서 꺼내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삽자루가 타버렸다. 울고 싶다. 이제 아버지에게도 혼이 날것이 뻔하다.


 어쩔 수 없다. 나는 경운기 운전석 근처의 철재 공구함에서 펜치를 꺼내와서 못을 하나 집어 든다. 심혈을 기울여 그 못을 온수관의 끝에 대고 수직으로 누른다. 못이 천천히 들어간다. 고무 타는 냄새와 회색 연기가 나면서 못이 활줄이 지나갈 구멍을 낸다. 고약한 냄새를 맡은 둘째가 방에서 나와 마루에 서서는 아궁이 앞의 나를 내려다본다. 위험한 짓을 하면 혼이 날 거라면서 걱정을 담은 잔소리를 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참견이라며 내가 토를 달자, 저는 분명히 위험한 짓 하지 못하게 말렸다고 증언하듯 외치고는 방으로 돌아간다. 다행이다. 내 턱에서 볼로 이어지는 상처는 겉으로 표가 잘 나지 않는 모양이다. 다시 나는 작업에 집중한다. 남은 못은 대충 아궁이 속에 던져버리고, 삽은 원래 있던 모양 그대로 아궁이 근처에 세워둔다. 볼수록 삽자루의 탄 부분이 원래 그랬던 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온수관을 톱으로 자르다가 났던 것과 같은 소리가 내 턱에서 울린다. 온수관을 활처럼 휘게 만든 다음 야전선을 끼워야 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좀처럼 휘어지지도 않고 튕기기를 반복한다. 체중을 실어 관을 누르다 보면, 어느새 내 손을 빠져나간 온수관이 내 가슴이나 얼굴을 때린다. 한쪽 끝이 땅에 닿아 있는 탓에, 온수관의 장력에서 나오는 힘은 오롯이 내 몸만을 향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는데, 타협이 불가피함을 깨닫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나는 둘째를 불러낸다. 공범이 되기 싫은 둘째는 위험한 짓을 그만 두라며 나를 말리다가 끝끝내 설득당하고 만다. 나는 활의 한쪽 끝에 야전선을 통과시키고는 둘째에게 매듭을 지어달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줄을 옳게 묶는 법도 모른 채로 온수관과 씨름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온수관을 세로로 붙잡고 체중을 싣는다. 이번에는 활이 이리저리 돌지 않게 휘어진 부분을 다리사이에 넣어 고정한다. 스스로가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든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중에, 나는 둘째에게 줄을 온수관의 반대쪽 끝 구멍에 넣으라고 외친다. 둘째는 야전선을 활의 구멍에 넣고 팽팽하게 당긴 다음 얼른 매듭을 짓는다. 손재주가 참 좋다. 나는 슬쩍 몸의 힘을 풀어본다. 활은 반달처럼 잘 휘어져있고, 시위는 팽팽함을 잃지 않는다. 나는 왼손으로 활을 들고 팔을 앞으로 쭉 뻗은 다음, 오른손으로 시위를 튕겨본다. 제대로 된 물건이다. 완성이다. 둘째는 막내가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그 행동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 한다.

<아, 결국 만들던 게 활이었네. 위험한 거 맞네. 그런데, 화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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