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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Feb 18.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01화

죄인-1

{ 벗, 미치광이 - 제1권 30화 }에서 이어집니다.

벗, 미치광이 - 제1권 브런치북 : https://brunch.co.kr/brunchbook/yujis-friends


 낡은 일톤 트럭의 짐칸으로 돌아와 지긋지긋한 환자복을 벗는다. 환자복의 덜 지저분한 부분으로 아랫도리를 훔치자 거뭇하게 굳은 피가 가루가 되어 묻어난다. 희한한 일이지만 어찌 되었건 피가 멎은 것은 다행이다. 생리대는커녕 속옷도 없으니 피가 멎은 것에 의문을 달 여유는 없다. 나는 얼른 헌 옷 수거함에서 챙겨 온 커다란 회색 후드티와 미약한 빛에도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빛을 반사하는 새빨간 에나멜 쫄바지를 입는다. 일어서서 폴짝폴짝 뛰어보면 바지를 입는 일이 수월할 것 같지만, 그랬다가는 트럭이 삐그덕 쇳소리를 내는 바람에 주인이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무릎 위까지 바지를 당겨 올린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나는 기름때 묻은 이불더미 위에 환자복을 뒤집어 펼치고 그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어떻게 생겨먹은 바지이기에 이렇게도 입기가 어려울까. 육감적인 모양과는 한참 거리가 먼 내 작은 엉덩이와 그간 가늘어진 다리 덕분에 그나마 허벅지 위쪽부터는 바지를 잡아당기기가 수월하다.


 옷을 갈아입었으니, 이미 늦은 밤이 돼버렸지만 수정한 계획에 진전은 있는 셈이다. 문득,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바람을 피할 소중한 공간이 되어주는 트럭의 주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러므로 나는 드라이버를 공구함에 넣어두고 원래의 위치로 공구함을 옮기려 해 보지만 도통 힘이 없다. 안간힘을 쏟으면 어떻게든 옮길 수야 있겠지만 팔이건 다리건 힘을 줄라치면 현기증이 인다. 너무 지쳤고, 허기와 갈증, 졸음을 이겨낼 힘을 유지하는 것만도 지금의 내게는 벅차다. 결국 나는 공구함의 뚜껑조차 잠그지 못한다.


 짐칸 출구에 놓인 공구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안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이내 이불더미 위에 뒤집혀 펼쳐진 환자복을 방석삼아 앉은 채 가지런히 세운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숙여 이마를 무릎에 댄다. 고개의 각도를 요리조리 바꿔도 보고 엉덩이를 꼼지락거려 자세를 고쳐 앉기도 하고 입가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입바람으로 치워내며 조금이라도 이 휴식이 더 편안하도록 용을 쓰던 어느 순간에, 나는 잠이 든다.


 몸 곳곳에 땀이 마르며 엷게 오른 소금기가 습한 공기에 다시 젖어갈 즈음, 감은 눈꺼풀 밖에서 붉게 반짝이는 빛이 어른거린다. 웅크려 앉은 모양 그대로, 피로한 눈을 여전히 질끈 감은채 고개만 짐칸의 출구로 돌려본다. 눈꺼풀 너머에서 조금 더 밝아진 불빛이 틈을 두고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삽시간에 등줄기에 한기를 느끼며 눈을 번쩍 뜬다. 트럭이 어디론가 출발하려는 것일까? 트럭의 주인이 뭔가 이상한 낌새, 이를테면 짐칸에 숨어든 나의 기척을 느낀 것일까? 나는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엎드린 모양으로 살금살금 짐칸 출구로 기어간다. 근처에 사람이 있다면 트럭이 조금만 출렁거려도 알아챌 수 있다. 세로로 벌어진 방수천 가까이로 코를 내밀어보니 트럭에서 매연이 나오고 있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엔진이 돌아가는 진동도 전혀 없다. 하지만 콘크리트 벽과 주택의 담장에는 반사된 불빛이 갈마든다. 우선은 출구 근처에 앉아서 상황을 살피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불쑥 방수천을 열어젖히며 숨어있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고 한들 내게 도망갈 힘이 남아있을 리 없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나를 용서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가 힘없는 나를 만만히 여기고 몹쓸 짓을 할 만큼 못된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곳은 재개발이 확실시된 달동네의 인적 드문 골목길의 끝, 막다른 길이다. 기척을 숨겨야 한다. 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숨마저도 입을 벌려 조용히 내쉰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나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린다.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깜빡거리는 불빛이 더욱 환해지면서 인지하지 못했던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비상등을 켠 채로 이토록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걸까? 어째서 비상등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반사되고 있는 걸까? 비상등 불빛이 꺼지는 매 순간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은 전조등을 끄고 있기 때문일까? 전조등을 껐다면 굳이 비상등은 왜 켜고 있는 걸까?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젓는다. 머릿속의 의문은 상상이 되고, 상상은 두려움을 키우기만 할 뿐이다. 상상이 아닌 현실을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이 선 나는 용기를 내어 짐칸의 옆면과 마주한 방수천을 들춘다. 손가락 몇 마디만큼 들추었는데, 여전히 밖은 보이지 않고 시야를 가리는 막 한 겹이 더 있다. 단단히 고정된 방수천을 겨우 들추어 바깥쪽 막을 잡아 천천히 위로 걷어올린다.


 「뭐, 뭐야 이것은?」


 느닷없이 들려온 남자의 새된 목소리에 나는 그만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앉은 채로 넘어지듯 뒷걸음을 친다. 갑작스럽고 조심성 없는 움직임에 트럭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출렁인다.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 나는 화환 받침대에 이불을 두르고 그 뒤에 숨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럴 시간도 없이 어느새 새된 목소리의 남자는 짐칸의 뒤로 달음질해 와서 세로로 갈라진 방수천을 걷어 젖힌다. 내 몸은 이불자락 끝을 양손에 잡은 채로 얼어버린다. 다리는 떨리고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숨을 쉬는 것마저 의식하지 않으면 멎어버릴 것 같다.


 「어이, 뭐 하는 잡것이기에 남의 옷을 몰래 들췄대? 깜짝 놀랐네, 아주. 내 옷을 들추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이런 것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양방향이어야 바람직한 것이지. 나는 그쪽이 상당히, 어, 고마울 정도로 마음에 드는데, 그쪽은 내가 어떨지 모르겠네. 워낙에 오랜만이라 좀 서툴긴 할 것이고. 이것이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그쪽이 결정할 문제니까 남녀 간에 부담은 갖지 말자고. 다만 출구는 여기 하나뿐인 게 문제라면 문제지.」

 

 이마 아래 혈관이 불룩거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로를 가로질러 걷다가 달려오는 자동차의 불빛을 보고 꼼짝없이 얼어붙은 들짐승처럼 그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어두운 형체를 노려보는 것뿐이다. 그가 양팔을 들어 좌우로 걷고 있던 방수천을 느린 동작으로 내려놓고 짐칸 끝 난간을 내려치듯 양손으로 잡자, 내 어깨가 튕기듯 들썩이고 내 손은 저절로 펼쳐지며 하릴없이 잡고 있던 이불을 놓친다. 스스로 용기를 다지기 위해, 혹은 맞서 싸우기라도 해 볼 요량으로 주먹을 쥐어보지만, 악몽 속에서 힘을 쓸 때처럼 무감각하기만 하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고 머릿속이 하얘진다. 나는 저절로 반쯤 펼쳐진 손바닥을 가슴높이로 들어 보이며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니야. 아니야……. 살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나는 그를 향해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절박함으로 호소한다. 그가 허락 없이 트럭에 숨어든 도둑고양이 같은 나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란다. 나는 얼마나 나쁜 사람이던가. 치료비를 내지 않고 병원을 도망쳐 나와서, 남의 트럭에서 꺼낸 물건으로, 헌 옷 수거함에서 옷을 도둑질해 입은 것도 모자라, 흔적을 지우고 사라지기는커녕 떡하니 자리를 깔고 여유롭게 잠이나 자고 있었던 나는, 그래, 벌을 받아 마땅한 나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제 억울하고 두려워하기보다 달게 벌을 받고 당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대항했다가는 더욱 큰 벌을 받을 수 있다. 임박한 지금의 벌은 소름 끼치게 끔찍하지만 내 상상의 범주 안에서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반항의 대가로 받을 큰 벌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분명히 나와 이 남자 둘 중 하나 이상은 미쳤다. 상황이 그렇게 말해준다. 내가 그에게 맞서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아마도, 목숨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에헤이, 뭐라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그림자가 드리운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듬성듬성한 머리칼과 이따금 빛이 드는 눈동자에는 여유가 가득하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고, 이 남자 역시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뭐가 아니라는 걸까? 악의가 없는 사람을 내가 오해한 걸까? 아니다. 그의 말은 무서웠고, 두려움에 휩싸인 머리가 그의 말을 낱낱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뱉은 말은 분명히 무섭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실낱같은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가 말한다.

 「살려달라느니, 잘못했다느니,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는 말이야. 내 말은, 그쪽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뭐, 그런 말이야. 알겠어?」

그는 내가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는지 확인하려는 듯 틈을 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잇는다.


 「서로 마음이 맞으니까 남녀가 살을 맞대는 건데 죽이네 살리네 하는 말은 필요 자체가 없다, 그런 말이라고. 내 말을 알아듣겠어? 그런 의미에서, 다시 안 그러겠다는 말은 취소해도 돼. 다시 하면 나야 좋지 뭘 그래. 다시 말하지만 말이야, 나는 그쪽이 마음에 들거든. 참, 대신에 조용히 해야 해. 그건 약속해 줘야겠다.」


 힘을 주는 숨소리와 함께 그가 번호판 아래의 발판을 딛고 올라서자 트럭이 출렁이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낸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던 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짐칸 속을 비추던 미약한 빛이 점점 더 가려진다. 그는 가볍게 반대쪽 다리를 난간 위로 걸쳐 올리고, 나는 주저앉은 채 발바닥과 손바닥으로 녹이 슨 짐칸 바닥을 밀며 이미 등이 닿아 물러설 곳 없는 뒷걸음을 계속한다. 나는 아직 죗값을 치르고, 벌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무용한 동작을 반복하던 중에, 나와 그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을 향한다.


 「이게 뭐야? 이야……. 착해, 아주 착해. 벌써부터 우리는 마음이 잘 맞을 것 같단 말이야. 이렇게 위험한 물건은 여자가 다룰 것이 못돼요. 암, 남자들이 다룰 물건이지, 이런 것들은. 아주 큰일 날 뻔했어. 안 그래?」

짐칸으로 완전히 올라탄 그가 공구함을 열어젖히며 그 속을 들여다 살피며 말한다.

 「걱정하지 마,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그는 유독 '걱정'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고, 장난스럽게 말 끝에 웃음을 섞는다. 그가 공구함에서 뭔가를 꺼내서 윗옷 주머니에 넣지만 무엇인지 알아볼 수는 없다. 그가 동을 단다.

 「이거는 그냥, 보험 같은 거야. 보험 알지? 자기는 날 믿겠지만, 나는 사람을 잘 안 믿거든. 아니, 그렇잖아? 생판 처음 보는 여자를 내가 어떻게 믿어. 자기는 나를 믿어도, 나는 남자잖아. 여자랑 남자는 다르다고. 내 말이 틀려? 응?」


 또 한 번 그가 대답을 원한다. 내게 그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내가 머뭇거리는 탓에 그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먼저 크게 끄덕이며 대답을 붙인다.

 「맞아요, 맞아요. 저는 그쪽……. 아저씨 믿어요. 그렇지만 아저씨는 저를 못 믿으실 수 있어요! 처음……. 처음 본 여자니까요. 다 맞아요. 맞는 말이에요.」

입술이 저절로 씰룩거리고 턱이 떨려 위아래 이가 부딪히는 통에, 나는 말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다. 그가 공구함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한다.

 「이렇게 서로 협의가 된 남녀사이라도 말이야, 여차하면 상황은 남자한테만 불리하게 돌아간단 말이야. 그러니 어째. 이런 거라도 챙겨야지.」

이제 나는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여전히 빛을 등져 윤곽만 보이는 그가 허리춤을 풀며 걸어온다. 짐칸이, 트럭이, 세상이 통째로 출렁거린다.

 「뭐 해, 이불 펴. 그리고, 한 번만 더 아저씨라고 해봐. 응?」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이르는 데로 몸을 움직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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