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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Feb 25.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02화

죄인-2

{ 벗, 미치광이 - 제2권 01화 }에서 이어집니다.


 준비되지 않은 죗값을 치를 때가 임박했다. 머리가 듬성한 집행인이 내게 벌을 주려고 온 세상을 울리며 걸어온다. 그의 바지가 흘러내리고 허리띠의 버클이 낡은 트럭의 짐칸 바닥에 떨어지면서 귀를 찌르는 쇳소리를 낸다. 발목까지 내려간 바지가 그의 걸음을 일순간 멈추게 하려나 싶지만, 이내 그는 두 발을 비벼 신발을 벗고 발목에 걸린 바지를 귀찮다는 듯 걷어차버린다. 또다시 바지와 버클이 짐칸 여기저기에 부딪히며 보다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고, 그의 걸음에 트럭 또한 다시 흔들린다. 나는 떨리는 팔을 들어 손바닥으로 귀를 가렸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옮겨 얼굴을 가린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는 어둠 속 상상에서 더욱 커져만 간다. 질끈 감은 두 눈을 손으로 가려도 집채만큼 큰 그의 몸집은 머릿속에서 여전히 선명하다. 세상을 울리는 새된 목소리가 짐칸을 채운다.

 「안 벗어?」


 그의 짧은 질문에서 나는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잠깐이나마 현실감각을 되찾는다. 그의 불쾌한 질문은 내게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대신할 뿐이고, 협의된 일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억지와 똑같이 비겁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에 내 마음속에서는 저항이 꿈틀댄다. 완력으로는 결코 유의미한 저항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내 손으로 옷을 벗느니 차라리 당신이 찢어발겨라-하고 외치고 싶다가도, 과연 그게 나은 일일까-하고 곧바로 자문한다. 스스로 벗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의 존엄이 지켜지는 것인지, 자존심을 지키려 발악을 하다가 어렵게 구한 옷이 찢어지면 내게는 더욱 손해이지 않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니, 중요한 것은 이 정도의 손해를 저울질하는 데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항에 대한 벌로 그가 나를 걷어찰 수도, 주머니에 감춰미지의 공구로 나를 찌를 수도, 내리칠 수도, 벨 수도 있다. 결국, 목숨이 달린 문제가 될 수 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내 판단이 옳다면, 나는 순순히 그가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내게 요구되는 것들을 상상해 본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이를테면 벗으라는 대로, 벌리라는 대로, 엎드리라는 대로, 움직이라는 대로 해야 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는 이렇게 끔찍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나는 싫다. 일단은 살고, 다음기회를 노려 복수할 수 있을까? 태호와 연홍이 복수를 준비하듯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나는 항상 그랬듯 지금을 살고, 이토록 끔찍한 일을 참아낼 담대함 따위를 지금 갖고 있지도 않다. 죽어도 싫다, 그뿐이다. 어차피 이번 생에는 딱히 즐거웠던 추억도 기억에 없고 즐거울 미래도 그려지지 않는다.


 가슴에서 시작된 떨림이 손끝과 발끝, 오금과 뒷목으로 번져가고 온몸의 피부는 촘촘하게 소름으로 뒤덮인다. 제멋대로 턱이 달그락 거리는 통에 혀의 가장자리를 깨물어 입속에는 핏물이 고인다. 내 몸은 호랑이를 마주한 염소처럼 굳어버리고, 그의 가쁜듯한 숨소리 하나, 고갯짓 하나에도 경련하듯 저절로 꿈틀댈 뿐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머리는 그 기능뎌져서 손으로 문장을 쓰듯 신경을 집중해야만 겨우 한 줄의 생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이자에게 싫다고 말해야겠다.'


 떨리는 목과 피 맺힌 혀로 소리나 제대로 낼 수 있을지 알 수도 없지만, 나는 외쳐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야만 한다.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소리쳐야 한다.  몸이 더럽고 추잡스러운 변을 당하더라도 내가 숨 쉬는 동안은 당하지 않겠다. 네놈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죽은 내 살덩이일 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소리쳐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내 직감이 단언한다. 망설일 여유가 없다. 지금이다. 당장 소리쳐야 한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진동하듯 부딪히는 어금니를 달래면서 씰룩거리는 입술을 열어 말을 꺼낸다.

  「⋯⋯지⋯⋯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목이 잠겨서, 호흡이 엇갈려서,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워서 내 목소리는 초라하리만치 유약하고 작게 시작되었지만, 거듭하여 외치고 외치는 중에 어느덧 짐칸을 채울 만큼 커진다.

 「조용히 해, 조용히.」

그가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나무라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소리친다. 미치광이처럼 같은 말을 계속해 소리치는 중에 내 얼굴에는 웃음이 씰룩하고 번졌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이미 팔다리가 잘리고 뭉개진 군인이 이겨낼 리 없는 코앞의 적을 도발하는 것과도 같이, 나는 독기를 숨기지 않고 소리친다. 입에서, 코에서 나오는 보랏빛 연기가 눈에 보일 것만 같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마지막일지 모르는 쾌락 덕분일까, 시간마저 느리게 흐른다. 그러는 순간, 하필이면 이런 때에, 내 머릿속에는 연홍이가 과거에 겪었던 일이 그려진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 일찍 딸을 가졌고, 저의 딸을 강간해 연홍이를 낳게 했다. 연홍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그는 연홍이에게 주삿바늘을 꽂았다. 그렇게 그는 약에 취한 제 딸의 딸을 몇 번이고 겁탈했고, 가증스럽게도 그 행위를 매번 영상으로 촬영해 차곡차곡 모아두기까지 했다. 약에 취한 연홍은 발버둥 치거나 울부짖기보다 되려 그 반대의 모습만을 영상에 남겼고, 예의 영상들은 그 남자에게 유리한 증거가 되었다. 연홍은 엄마의 전철을 밟아 그의 딸을 낳았고, 지아라고 이름 지어진 예쁜 아이는 열흘 전 죽었다. 연홍은 버텨냈고, 이제는 앙갚음을 벼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버텨내기보다 차라리 죽기를 각오하고 있으므로, 연홍이와 다르다.


 나는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더 커지기를 바라며, 숨을 들이마실 때마저도 매번 세심하게 정성을 다한다. 숨을 내쉬는 행위는 따로 필요하지 않다. 그를 향해 외치는 것만으로도 날숨이 모자라다. 짐칸 출구에 이따금 드는 빛으로 그가 하의를 모조리 벗은 채로 서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외쳐야만 하고, 그의 두 다리를 덮은 추잡하게 곱실거리는 털에 빛이 드리워 소름이 끼치기에 외쳐야만 하며, 그 다리 사이에서 끔찍하게 덜렁거리는 것이 내 살에 닿느니 죽는 편이 낫기에 외쳐야만 한다. 목소리가 커져가는 만큼 삶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환희와 쾌락이고, 이는  나의 승리이다.


 그가 욕지거리를 하며 몸을 숙여 내 멱살을 잡아든다. 하지만 후줄근하고 커다란 후드티는 내 몸을 들어 올리기는커녕 위로 길게 늘어날 뿐이다. 웃음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와 맘추지 않는다. 나는 하지 마-라며 계속 외치는 중에 그 한심한 꼴이 우스워 눈물이 날 지경에 이른다. 웃음도 표정에서 그치지 않고 소리 내어 나온다. 그렇게 나는 웃음소리와 하지 말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입 밖으로 연신 뱉어내느라 숨이 차다. 그가 다시 내 멱살을 두 손으로 고쳐 잡고 들어 올리는데, 이 멍청한 자가 이번에는 꽤나 제대로 잡은 모양인지 내 엉덩이가 바닥에서 떼어지고 상체가 번쩍 들린다.

 「하하하! 하지⋯⋯. 하지 말라고. 하하하!」

떨리는 사지와 쭈뼛거리는 온몸의 털은 어느새 내게는 인생의 마지막 오락거리가 되었고, 나는 그를 향한 조소와 무의미한 부탁을 반복할 뿐이다.


 이 정도 높이까지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는 일은 이 자에게도 제법 힘들었던지, 그 팔이 떨리는 모습이 이토록 우스울 수가 없다. 그가 연신 뱉어대는 알아들을 수 조차 없는 욕지거리도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나는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다. 다시 한번 소리 내어 크게 웃어보려고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그가 한 손을 옷에서 떼더니 내 배를 묵직하게 때린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고작 한 대 맞았는데, 숨을 들이마실 수도 내쉴 수도 없다. 그가 잡은 손을 마저 놓자마자 나는 바닥에 맥없이 떨어지고 몸을 비튼다. 복부의 통증은 수그러들 기미가 없고, 온몸은 공벌레처럼 둥글게 말린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얼굴이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만 같던 순간, 그의 발등이 내 이마를 공처럼 때린다. 앞으로 웅크려진 몸이 이번에는 활처럼 뒤로 젖혀진다. 그의 발길질이 다시 배로 향한다. 내 몸은 편안하게 옆으로 누운 모습에서 멈추고, 더 이상은 앞쪽으로 웅크리지도 않고 뒤로 젖혀지지도 않는다. 그의 발길질이 닿는 곳이 그에 맞게 조금씩 밀려나거나 들썩일 뿐이다. 눈물이 난다. 웃음은 나지 않는다. 얼마동안이나, 몇 번이나 맞았을까, 이제는 아프지도 않다. 그저 빨리 끝나기나 했으면. 이 멍청이는 뭐 하러 이렇게나 오랫동안 골고루 걷어차며 힘을 빼고 있을까-하는 의문도 잠시 든다. 빨리 시각과 청각이 사라지고 심장도 멈추기를 바랄 뿐이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다 보면, 언제고 더 나쁜 일이 생기는 게 인생이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흔한 전개였고, 하필이면 지금이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살아있는데, 바닥에 던져놓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내 몸 위로, 그가 제 몸을 누인다. 나는 재빠르게 피해 보지만 고작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에 그치고, 결국 그의 몸뚱이가 내 위로 무겁게 포개진다. 무엇을 하더라도 목숨만은 끊어놓고 시작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다행히 그의 체중 덕분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으므로, 나는 곧 죽는다. 유전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연홍이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려야겠다.


 그의 미지근한 숨결이 내 귀를 향해 뿜어져 나온다. 그의 다리와 그 사이에 달린 물컹하고 끔찍한 물건은 촉감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낄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사고가 느려진 나의 뇌에게 일깨워준다. 미리 눈을 감고 있으면 조금은 더 일찍 죽을 수 있겠지-라고 바라며 나는 두 눈을 편안하게 감고 떠날 준비를 마친다. 밝고 즐거운 표정도 싫지만, 그렇다고 해서 찡그린 얼굴을 남겨두고 떠나기도 역시나 싫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나는 평온하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마지막 표정이 되도록 신경 쓴다. 이렇게 신경을 쓰는 가운데, 그의 침이 내 집중을 방해한다. 정말이지 가지가지하는 놈이다. 그의 뜨끈한 침이 내 오른쪽 뺨으로 떨어지고, 눈두덩이에 고였다가, 콧날을 타고 흘러 이내 입술에 다다른다. 입술을 말아 물고 더러운 그의 침을 막아보지만, 이 모습으로 죽는다면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역시나 있다. 하지만 죽는 모습만큼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어야만 한다. 나는 말아 물은 입술에 힘을 뺀다.


 끈적한 그의 침에서는 비릿한 맛이 난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다리 사이에 달린 물건뿐만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에 움직임이 없다. 그는 진동하듯 꿈틀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데, 그 목적은 알 길이 없다. 눈 속으로 침이 들어갈 각오를 하고 나는 감은 눈을 뜨기로 마음먹는다. 이미 입속으로도 들어간 침이 눈에 좀 들어간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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