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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Mar 03.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03화

죄인-3

{ 벗, 미치광이 - 제2권 02화 }에서 이어집니다.


 내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의 정체는 분명, 피다. 무게에 짓눌려 숨을 쉬는 것조차 수월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으로 연신 공기를 뿜어 내 얼굴을 타고 넘는 그의 더러운 피가 입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느라 용을 쓰지만, 그렇다고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미지근하고 비릿한 그의 피는 차치하더라도 상황파악부터 해야 한다는 직감에 따라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어본다.

 「저기요……. 왜 피를 흘리는 건데요…….」

틈을 두어 기다려도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끈적하게 미끌거리는 몸뚱이를 이따금 꿈틀댈 뿐이다.

 「말을 좀 해봐요……. 말을 좀 해보라고, 이 돼지야!

참지 못한 내가 숨을 몰아쉬며 소리로 악을 질러도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이유야 어쨌건 그는 피를 흘리고 있고, 의식도 없다. 나는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그의 몸뚱이를 양팔과 두 다리로, 그야말로 온몸으로 밀어낸다. 마침내 무거운 고깃덩어리를 두 발로 밀어내고 그 무게로부터 온전히 벗어 나올 즈음, 나는 숨을 헐떡이며 트럭 짐칸을 등지고 앉은 채 아직도 불규칙적으로 움찔거리는 그를 노려본다. 그토록 거대하고 두려웠던 그가 이제는 그저 어느 동네에서나 있는 배불뚝이 아저씨로 보인다. 심지어는 우습게도, 하찮게도 보인다.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틈을 타 얼른 몸을 돌려 달아날까 싶다가도, 문득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진다. 나의 이성은 이따금씩, 꽤나 자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


 잔뜩 긴장한, 하지만 기력이라고는 없는 몸을 숙여 나는 엎드린 채로 엎어져있는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고는 어둑한 짐칸의 안쪽, 밖에서 드는 약한 빛에 의지해 그를 살펴본다. 병원에서 보름을 누워있던 나 보다도 몸을 씻은 지 오래된 듯, 발바닥은 아주 새까매서 마치 먹물이라도 밟은 것 같다. 복숭아뼈와 다리에는 말라버린 물풀처럼 각질이 일어나 있고, 엉덩이에곱실한 털로도 가려지지 않는 얼룩과 뾰루지들이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있다. 순간, 채우다 만 물풍선처럼 질펀한 그의 엉덩이가 꿈틀 하는 모습에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려 토악질을 겨우 참는다. 바깥의 빛이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비출 수 있도록 나는 자리를 옮겨가며 계속해서 그를 살펴본다. 허리 위로는 살이 드러난 하체만큼이나 지저분한 옷을 걸쳤고, 목 주변에는 피가 묻어있다. 뒷머리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지고 군데군데 뭉쳐 있다. 조금 전 내게 짜증을 내며 머리를 긁어서 저리 되었나 싶다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지운다. 정수리로 시선을 옮기자 유달리 반질한 두피가 보이고 몇 가닥의 긴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살펴보아도 어쩌다 그가 갑자기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때, 주변을 훑던 내 시선이 그귀에서 멈춘다. 그의 왼쪽 귀에 눈에 익은 반투명한 초록색의 두꺼운 손잡이 하나가 붙어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몸을 일으키고 손을 뻗어 초록색의 손잡이를 만져본다. 환자복을 대신할 입을 옷을 구하려 헌 옷수거함을 열 때 꺼내 썼던 드라이버가 그의 왼쪽 귓구멍에 박혀있고, 어찌나 깊고 세게 박혔는지 손잡이를 잡고 드라이버를 위로 뽑아내려 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무엇을 한다는 인지랄 것도 없이 나는 손잡이를 좌우로, 위아래로 움직여본다. 여전히 드라이버는 굳게 박혀있지만, 손잡이가 특정 방향으로 조금씩 기울어질 때에는 그의 몸이 파르르 떨리기도, 팔다리의 근육이 뒤틀리기도, 기이한 괴성이 나기도 한다. 고장 난 기계의 스위치를 조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멍하니 드라이버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쪼그려 있던 중에, 내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잠자코 쉬고 있던 '이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침착한 말투의 나의 이성이 말한다.

 '자네는 지금 이 사람의 머리에 깊숙하게 꽂힌 드라이버로 두부를 요리하듯 뇌를 휘젓고 있는 거야.'


 정신이 번쩍 들고, 나는 드라이버에서 손을 뗀다. 나의 이성이 말을 잇는다.

 '너무 늦었네. 드라이버가 박히는 순간에 이미 이 인간의 생존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겠지. 하지만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게야. 솜씨 좋은 의사라면 머리에 박힌 드라이버 하나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뇌 속을 아주 휘저어놨으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자를 살릴 방법은 이제 없을 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이성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말에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다. 나는 스스로를 향해, 그리고 나를 나무라기보다 걱정해 주는 듯한 어투의 이성을 향해 후회가 가득한 질문을 소리 내어 쏟아낸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곧장 도망치지 않았을까? 왜, 엎어져 피 흘리는 그를 살펴보았을까? 왜 드라이버에는 손을 댔을까? 왜 그걸 잡고 이리저리 움직였을까? 나는 살인자가 된 걸까? 피해자는 나인데, 내가 피해자인데, 누가 봐도 이 자가 가해자인데⋯⋯. 무엇보다, 드라이버를 그의 머리에 꽂은 것은 내가 아니란 말이야!

억울함을 측은히 여겼던지 나의 이성도 이번에는 소리 내어 대답해 준다.

 「맞네. 누가 보더라도 이 자가 악당이지. 그건 분명 맞는 말이야.」

이성은 내게 '누가 보더라도'에 힘을 주어 말한다. 하지만 어쩐지 그 말이 불편하게 들린다. 나는 대답을 통해 나의 무고함을 피력해 본다.

 「그래, 나는 잘못이 없어.」

 「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지. 이 자는 몹쓸 짓을 할 뻔했고, 강간범이건 가해자건 무엇이건 저가 악당임을 증명하지 못한 채로 죽어버린 게야. 강간미수라는 죄명에 대한 유죄 판결은 법정이 아니라 피해자인 자네만이 할 수 있다네.

이번에 이성은 '할 뻔'에 힘을 주어 말한다. 이성이 내 편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이 마음속에서 조그맣게 싹을 틔운다. 나는 이성의 말을 되받아친다.

 「아니, 나는 잘못이 없어.」

나의 이성은 조용히 틈을 두다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뱉으며 말을 꺼낸다.

 「질 나쁜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어야만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성립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네. 잘못을 저질러야 질 나쁜 가해자가 되는 것이고, 피해를 입어야 무고한 피해자가 되는 것이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그렇게 정해진다네.」

말투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을 향해 나는 쉬어버린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내 잘못은 저기 저 망할 드라이버를 손에 쥔 게 전부야. 그걸 쥐고 휘젓다가 저 자식의 뇌를 망쳐버린 건 인정해. 하지만 애초에 드라이버를 저놈 귓구멍에 꽂은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냅다 도망가기만 했어도 이 자는 어차피 죽을 거였어. 이런 인간을 딱하게 여겨 구급차를 불러줄 의무 같은 거 나한텐 없었어.」


 더욱 쏘아붙이고 싶지만 숨이 차다. 심장의 박동과 시야의 밝기가 서로 박자를 맞춘다. 미간에 힘을 주어도 자꾸만 시야 주변이 어두워진다. 그때 이성이 내게 속삭인다.

 「자네는 잘못이 없네. 자네는 그자의 고통을 줄여줬을 따름이지. 전쟁 중에 허리가 부러진 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는 것은 자비로운 일이니까. 이 자를 명예로운 전마와 비교하는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자네를 범하려던 자의 고통을 줄여준 것은 숭고한 행위였어.

마침내 죄책감을 떨쳐내고 좋은 말까지 들으니 마음이 놓이고 몸의 긴장도 나른하게 풀린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여전히 마음속 한쪽 구석에서는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은 불편함이 자리를 잡고 있다. 더 이상 아무런 미동도 없는 더러운 몸뚱이를 향해 다리를 쭈욱 펴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로 그 연유를 고민해 보지만, 이길 수 없는 잠만 쏟아진다.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잃고 깜빡 잠에 들려던 찰나, 이성이 나를 불러 깨운다.

 「놈의 귀에 드라이버를 쑤셔 넣은 건 나일세. 처음부터 적당히 해칠 생각은 없었다네. 그래, 죽일 작정으로 찔러 넣었지. 젊은 놈이 달려들면 되려 내가 당하고 말 테니, 어쩔 도리가 없었어. 인과응보야. 나도 자네도 그 자에게 미안할 필요는 없지. 자, 이제 그 끔찍한 몸뚱이는 그만 보고, 고개를 좀 돌려봐, 유지 학생.


어느 순간 내 머릿속 울림이었던 '이성'의 근엄한 목소리는 편의점 사장의 목소리로 변해있다. 나는 번뜩 자세를 고쳐 앉아 시선을 트럭의 짐칸 출구로 던진다. 흐릿한 나의 시선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짐칸 바깥은 어느새 켜진 가로등과 이 집 저 집의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으로 환해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결국 내가 스스로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성과 대화를 한 것일 뿐인 걸까? 이성이 근엄한 노인의 목소리, 혹은 편의점 사장의 목소리로 말한 것은 단순히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목소리를 빌리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라는 말은 현재하는 존재만이 꺼낼 수 있는 말이지 않던가? 무엇보다, 조금 전 그는 나를 '유지 학생'이라고 불렀다.


 정신이 성치않구먼.」


 편의점 사장이 말한다. 그는 세로로 벌어진 짐칸 출구 옆 구석의 그림자에 숨어 구부정한 자세로 꼼짝 않고 서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이성과의 대화였고, 또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장과의 대화였는지 구분을 할 수 없다. 나는 짐칸의 어두운 구석에서 나를 향해 말하는 사장을 흐리멍덩하게 바라볼 뿐이다.


 「하기야, 그러니 드라이버를 쥐고 귀지를 파듯이 뇌를 휘저었을 테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느리게 꿈뻑이며 그의 말을 듣지만, 졸음이 내 집중을 방해하는 통에 그의 말은 소리에 그칠 뿐 언어로써 이해되지는 않는다. 순간 그의 얼굴에 환한 빛이 든다.


 「나일세. 내 짐작이 맞았어. 다행인 것은 유지 학생이 무사하다는 것이고, 불행인 것은 여기 사람 하나가 죽었다는 것인데, 이까지는 내가 어떻게,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는 일이네. 어허, 자네, 내가 늙은이라고 지나치게 걱정하는구먼. 이런? 이봐, 이보게. 그런 걱정을 자꾸 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례한 일일수도 있다네. 하기야, 자네 같은 징집병 육군병장 예비역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걱정 말게. 내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줄 터이니. 그런데 말일세, 아이고 숨이 차서 이거야 원. 휴……. 그런데 말일세,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 하나 있다네.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 게야. 그렇지, 그래서 전화를 한 것이야. 기왕이면 연홍 학생도 데려오게. 아니, 기왕이면-이 아니라, 반드시-가 맞겠군, 그래. 연홍 학생을 꼭 좀 데려오게. 지금 유지 학생 말일세. 아니, 내 보아하니…….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야. 내가 이 친구를 엎고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디스크 수술은 지긋지긋하다네. 지금 유지 학생이……. 몰골뿐만이 아니야. 옷도 요사스러운 것을 걸치고 있는데, 내 차마 입으로 설명하기도 무안하네. 새빨간 쫄바지 같은 것을 입고 있는데, 가랑이 사이가 열려있어. 지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고. 도대체가 말이지, 애당초 지퍼가 저곳에 있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느냐 이 말일세. 뭐라, 속옷? 어디 보자……. 에헤이, 이런 이런. 내 살다 보니 터진 허리디스크가 고마울 날도 오는구먼. 내가 유지 학생을 엎고 걸었다가는 아주 경찰에 잡혀갔을 게야. 속옷, 그것도 꼭 챙겨 오게. 지금 이 친구 곧 기절이라도 할 것 같으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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