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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n 09.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7화

물꼬-2

{ 벗, 미치광이 - 제2권 16화 }에서 이어집니다.


 틈틈이 연홍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으며 태호가 말을 덧붙인다.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는 형사의 휴대전화를 역겹다는 듯이 노려보기도 하고,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겨 들기도 하고, 무게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손바닥 위에 올려둔 채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기도 한다.

 「⋯⋯. 그렇게 연홍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전화를 들고 있는데, 그 사람이 연홍이한테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 사람이 그냥 말을 했는데 연홍이한테 들렸다-라는 게 아니라, 딱 연홍이인줄 알고 연홍이한테 말을 했다고. 연홍이 전화번호도 아니고, 얘는 정말이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걸 알고 말이지⋯⋯.


 그가 또다시 말을 멈추자,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을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일순간 그의 얼굴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드리우더니, 이내 그는 시선을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그는 입을 앙다물고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형사의 전화를 부숴버릴 기세로 움켜쥐고,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연홍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연홍아, 유지도 알아야⋯⋯ 아니,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네가 싫다면 파일을 지워버릴게. 솔직히 이걸 달리 어떻게 설명할지도 모르겠어.

연홍이는 태호의 질문을 듣고 처음에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이 더 길어지기 전에 작은 목소리로 상관없어-하고 대답할 뿐이다. 그녀의 대답에 여전히 입을 다문 태호는 조용하고 긴 한숨을 코로 내쉬며 탁자에 형사의 전화를 내려놓고 녹음된 통화를 재생한다. 한참 동안 조용한 잡음만 나오던 전화기에서 나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혹시, 연홍이니? 그래, 연홍이구나. 그렇지? 어째서 우리 집 여자들은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어. 연홍아, 나는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늘 걱정이란다. 혹시라도 또 마약에 손을 대거나, 또⋯⋯ 아무 남자에게나 욕정을 풀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현금이 없어서 약값을 몸으로 대신하려는 그런 잘못을 또 저지르고 있지는 않는지, 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야. 내 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설마 하니 나이가 너보다 열 살은 족히 더 많은 남자와 호텔을 들락거린다거나 하지는 않는지, 나는 걱정이 된단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리고 늘 말하지만, 나는 네가 과거에 나한테 저질렀던 일은 다 잊었고, 모두 용서했단다. 앞으로 다시는 언급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항상 너와 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갑자기 연홍이 침대에서 튕겨나듯 일어서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낚아채고,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의 움직임과 동시에 녹음된 남자의 목소리가 끊어진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그녀의 눈동자가 떨린다. 가슴팍에 갖다 댄 휴대전화를 핏기 없이 희고 가늘고 작은 두 손으로 숨기듯 덮어 가린 그녀의 호흡이 가쁘다. 녹음된 목소리의 주인에 대한 끓는 증오와 혐오, 연인의 미덥잖아 하는 반응에 대한 실망, 주변 모두에게 피력하고 설명해야만 하는 억울함이 그녀의 작은 몸속에서 부풀어 오르고, 결국 압력을 견디지 못한 모든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거짓말이야. 전부 싹 다 거짓말이야. 알지? 유지야, 너는 알지? 여자니까, 남자들은 몰라도 너는 알지? 이 인간은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항상 그래왔어. 오빠, 아니야.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이 쓰레기 같은,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은 거짓말에 엄청 능숙해. 감쪽같겠지, 그래. 그럴 수 있어. 나라도 그럴 것 같다니까? 그런데 나는 알아. 저 인간이 한 말 중에는 단 하나의 사실도 없어. 아니, 조금이라도, 에이 설마. 이 인간이 한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아니잖아, 그렇지 유지야? 오빠⋯⋯?


 격앙된 그녀의 표정은 태호의 얼굴만큼이나 자꾸만 저절로 굳어지지만 그녀는 의식적으로, 억지로, 혹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그러니 당신들도 얼굴조차 모르는 인간의 혓바닥에 놀아나서는 안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들은 마땅히 나를 지지해야만 한다고 피력한다. 멍청한 계집애, 그걸 누가 모를까 봐서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지 딱하다.


 「나는 그러니까⋯⋯. 글쎄, 글쎄다. 그래. 나는 시간이 필요해.


어리고 여린 제 연인의 마음을 어쩌면 저렇게도 모를까. 옳은 대답을 모르면 옳은 질문을 하던가, 모르겠으면 입 다물고 있던가 하면 될 일이건만 기어이 안 하니 못한 대답을 태호는 하고야 만다. 태호의 맹한 대답은 연홍의 부르짖음에 비해 짧고 조용했지만, 답답하기로는 당할자가 없다. 마음을 이해하는데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 그가 요구한 시간은 앞과 뒤,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난 사실을 따져서 인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녹음된 말 몇 마디에 이미 감정이 휘둘리고, 연인을 향한 스스로의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태호는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의 얼굴을 보면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 무언가를 도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저 본인이 처한 상황이 남자로서 견디기 힘든 일이므로 많은 고뇌가 수반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수심에 잠기는 게 당연한 것임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 사로잡힌 감정에 충실할 뿐, 그 어떤 실제적인 고민도 하고 있지 않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일 뿐이지만 그것이 녹음된 파일로 현실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태호는 그 내용까지 사실이라고, 혹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게 분명하다. 나에 대한 이해를 상대에게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정작 내가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에게 나를 향한 이해를 바랄 이유는 사라진다. 스스로를 믿어달라는 연홍이를 태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태호가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불안해하는 연홍이도 모두 딱하다. 오직 현명하고 똑똑한 나만이 이 둘을 보듬을 수 있다. 연인 사이의 일에 끼어드는 일은 결코 즐기지 않지만, 지금은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인간, 죽은 지아를 두고 당당하게 "내 딸"이라고 하더라. 연홍이 너한테는 딸이라는 말 한 번도 안 하던데. 연홍이 너랑 네 엄마는  "우리 집 여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웃긴 놈이야. 그렇지 않아?


내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점들을 꼬집지 않고 딴짓들인지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연홍과 태호를 향해 말을 뱉자, 순간 둘은 동시에 반감을 드러내며 나를 노려본다. 둘은 서로를 아껴야 하며 또한 뭉쳐야만 한다는 직감에 의지해 일부러 얼굴을 과장하여 찌푸리며 나, 유지라는 제 삼의 대상을 제물로 삼는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 노력하거나 화해를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사과하는 것보다는, 만만한 공통의 적 하나를 만들고 물리치는 것이 덜 수고롭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둘 스스로 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연인을 온전히 믿지 못한 스스로에게서 기인한 죄책감으로 심장을 이미 가득 채우고 있는 태호에게, 나에 대한 작은 죄책감 하나 즈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연홍은 그녀 평생의 숙적인 남자가 일방적인 통화 중에 뱉은 말에 대하여 태호에게 해명하고 변명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번거롭고 귀찮은 일은 최대한 미루고, 가능한 피하고 싶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 대한 사과와 용서를 나를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하지만, 속내와 행동에 인과가 일치하지 않으면 사람은 맹해지는 법이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만히 있자 무안해진 둘이 힐긋 눈을 맞추더니, 이내 더욱 무안해한다. 보는 내가 더 어색하다. 태호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연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해. 그 인간 말이야.」

 「다 거짓말이라니까?」

연홍이 반사적으로 방어한다. 태호가 그녀를 믿는다는 확신이 서기 전에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내도 그녀는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태호는 따뜻한 표정으로 연인을 바라보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말을 잇는다.

 「연홍이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신용카드 결제내역으로 쉽게 알아내겠지. 아니, 놈은 알아낼 것도 없어. 카드 사용 문자로 연홍이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고 받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나이가 열 살 더 많은 남자와 어울린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걸까?」

놀라운 남자 같으니, 드디어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이제 나는 그가 방향을 유지하도록 조금씩 거들기만 하면 된다. 내가 대답한다.

 「어떻게 아는 거냐면, 누가 봐도 오빠는 아저씨에 가깝잖아. 전형적인 아저씨. 성실하기는 한데 옷 입을 줄 모르는, 후줄근한 아저씨지. 그냥 딱 보면 우리보다 열 살 이상 많아 보여.」

 「유지야, 이 친구야⋯⋯. 오빠 말은 그게 아닌 것 같지 않니?」

연홍이는 오른손으로 이불을 뜯고 왼손으로는 이마를 짚은 채로 고개를 내게 틀며 말한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거야. 태호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나한테 뭣하러 딴지를 거는지 모르겠다. 태호가 탁자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담배를 문다. 담뱃갑을 탁자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그는 라이터를 입에 문 담배 끄트머리로 가져다 댄다. 하지만 라이터가 켜져있지는 않다.

 「그래, 누가 보더라도 나는 나이가 들어 보이지. 실제로도 너희 둘 보다는 아홉 살이 많고, 겉으로는 훨씬 많아 보일 거야. 누가 보더라도, 누가 보더라도⋯⋯. 하지만, 누가?」

그는 고정된 자세로 눈동자만을 움직여 펜트하우스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차분한 어투로 느리게 읊조리더니 그제야 라이터의 불을 켠다. 첫 연기를 유독 천천히 뿜으면서 그는 다시금 펜트하우스의 곳곳을 유심히 살핀다. 연홍이가 그런 태호를 보고 대꾸한다.

 「카메라는 없어. 나는 다른 펜트하우스랑 방을 바꿔가며 쓰고, 당연히 호텔에서도 다른 손님들을 받아. 객실에 카메라를 설치했다가 들키면 호텔은 그날로 영업 끝나는 거야. 다른, 뭔가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일 거야.」


 「사람을 사서, 결제문자가 온 곳으로 보낸다⋯⋯. 같은?


태호가 추리해 낸 답을 말하며 연홍을 바라보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머릿속으로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며 이해를 시도한다.

 「하긴, 심부름꾼이라면 눈도 귀도 손발도 될 수 있으니까. 직접 나서지 않고도 많은 걸 할 수 있겠네. 그런데, 그 심부름꾼이 약쟁이인 현직 경찰이라고 하니까 조금 이상하다. 그렇지 않아?」

태호가 내 질문에 쓴 미소를 지으며 담배 연기를 아래쪽으로 뿜고서 말한다.

 「이상하다기보다는 위험하지. 경찰이라면 보통 썩어도 같이 썩잖아. 혼자 다니는 건 무서워하고 말이지. 혹시 또 알아? 지금 창가에 뻗어있는 저 형사 놈의 동료가 열심히 호텔 속을 뒤지고 다니고 있는지도 몰라.」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불현듯, 연홍이가 호텔방으로 들어오고 난 직후 우연히 등을 기대었던 현관문 건너로부터 둔탁한 충격을 느낀 기억을 떠올린다.


 「아하, 그래. 맞아,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생각해 보니 바로 그게 정답인 것 같아. 어쩐지, 아까 문 밖에서 누가 쿵 하더라고. 오빠는 역시 똑똑한 구석이 있어.


진심이다. 실로 나는 그가 똑똑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일상에서 드러나는 그의 답답한 모습과 맹한 태도로 인해 그 사실을 자꾸만 망각하게 된다. 내가 태호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을 읽은 연홍이가 말한다.

 「미친⋯⋯. 미쳤네, 미쳤어. 그걸 왜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야? 오빠, 오빠도 뭐라고 말을 좀 해봐. 밖에 누가 있다잖아!


그럴 리가. 지금 태호는 내가 그를 존중과 존경의 뜻을 담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입을 떡하니 벌리고 감탄하는 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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