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6화
물꼬-1
{ 벗, 미치광이 - 제2권 15화 }에서 이어집니다.
남자의 휴대전화를 양손에 받쳐 들고 연홍이가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그녀의 왼쪽에 다가서서 그녀의 고운 손등과 손가락의 끝이 닿는 휴대전화의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기다린다. 태호는 자못 험상궂은 얼굴로 남자를 쏘아보며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몇 마디를 말하고는 연홍의 오른쪽으로 걸어온다. 그가 걸음을 향하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남자는 한쪽 입술을 추켜올리며 보란 듯이 머리를 퉁기며 콧방귀를 뀌지만 태호는 보지 못한다. 태호는 팔짱을 낀 채로 우뚝 솟은 나무처럼 다리를 한 뺨 즈음 벌리고 서서는 휴대전화 화면에 초점을 맞추려는 듯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이도록 눈을 끔뻑거린다. 그럼에도 작은 화면은 그에게 영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지, 한참 동안 두 눈을 감은 채로 손가락으로 두 눈의 안쪽을 꼬집는다. 그런 그를 보자니 아무렇지 않던 내 눈마저 침침해지는 기분이다. 결국 나도 엄지와 검지로 두 눈 사이를 꼬집는다. 무심결에 그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필요에 의해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손가락에 힘을 세게 주고 오랫동안 꼬집은 자세를 유지한다. 질끈 감은 눈꺼풀 너머에서 희고 길쭉한 무언가가 아른거릴 즈음에서야 나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떼는데, 그 즉시 시야가 밝아지고 눈의 피로가 가시는 것을 느낀다. 나는 놀라움에 오-하고 감탄하지만 소리를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그때 나는 의도치 않게 연홍이의 정수리를 사이에 두고 그와 눈이 마주치지만, 그는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관심 없다는 듯 이내 시선을 전화기의 화면으로 던질 뿐이다. 연홍이 역시나 태호가 어떤 얼굴로 서있건, 그런 그를 내가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이 검은 바탕에 흰 숫자가 띄워진 휴대전화만 조물 거린다.
「영, 팔, 오, 이. 비밀번호는 영, 팔, 오, 이.」
금세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고 전화기를 갖고 도통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연홍이를 위해서 내가 그녀에게 비밀번호를 또박또박 알려주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않는다.
마침내 그녀가 오른손 엄지를 들어 비밀번호를 누른다. 숫자 영을 누를 때까지 망설이던 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거침없이 네 자리의 숫자를 찍어 누르듯 입력한다. 아무런 소리 없이 전화기의 잠금이 풀리고, 나의 시선은 새빨간 부재중 숫자에 홀린 듯이 꽂힌다.
「부재중 전화 확인해 봐, 연홍아. 그거부터 보자.」
「나도 그러려고 했어.」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마치 혼잣말을 하듯 뇌까리며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초록색의 수화기 그림을 누르자 전화기의 주인을 아마도 애타게 혹은 짜증 나게 찾고 있던 수많은 사람의 목록이 주르륵 펼쳐진다. 거기에는 "봄바 반장"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으로 저장된 사람, "논현 한국 19"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사람 외에도 "역삼 출장 약국", "강남 ATM", "미친년", "강력계 변형사" 등 수많은 이름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늘어져 있는데, 그중에 봄바 반장이라는 사람과 미친년이라는 사람의 부재중 횟수가 특히나 많다. 연홍은 검지손가락의 옆날로 목록을 아래로, 아래로 한참을 내리더니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정면을 향해 초점 없는 시선을 던진다. 왼쪽에서 내가 킁-하며 기척을 내자 그녀는 오른쪽 위 태호의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맞는 것 같지⋯⋯. 진짜 형사⋯⋯.」
연홍이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태호에게 조용히 단언하듯 질문을 던지고, 태호는 상황에 맞지 않게 경박한 속도로 고개를 까딱까딱 끄덕인다.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도 그는 마치 아이스크림을 먹을 테냐는 보육선생님의 질문에 마음만큼이나 몸이 달아서 대답하는 꼬마처럼 끄덕이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이상할 따름이다.
「게다가 좋은 형사는 아닌 게 확실하고⋯⋯」 태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속도를 점점 느리게 바꾸며 말한다. 「⋯⋯ 내가 단언하건대, 여기 저장된 이름들이 뜻하는 건 이런 걸 거야. 출장 약국이라 함은 마약을 배달해 주는 사람, 그러니까 아마도 마약상일 테지. 그리고 거기 밑에 ATM이라는 사람, 그건 저놈에게 돈을 찔러주는 사람일 거야. 그리고 한국 19라고 저장된 건⋯⋯.」
「됐어. 오빠, 됐어.」
신이 나서 설명하는 태호의 말을 연홍이 가로막는다. 태호가 무안해하며 입술을 비죽이고, 연홍은 엄지손가락을 옮겨 전화의 전원버튼을 짧게 누른다. 비밀번호를 눌렀을 때와 같이 화면이 꺼질 때에도 아무런 소리가 없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저기, 오빠.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도나 빈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언정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내가 보기에 사람들의 지적 능력은 거기서 거기다. 내가 똑똑하다고 느껴지는 경우의 상당수는 긴 인생의 기간에 비하면 하찮기만 한 흔치 않은 순간이거나,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 계획된 것이 아닌 우연의 도움을 받거나, 혹은 주변에 나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때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마저도 착각일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연홍은 요의나 변의 때문에 화장실에 간 것이 아니다. 그녀가 이제는 나쁜 경찰임이 확실해진 남자의 전화기를 굳이 챙겨서 자리를 일어선 것은, 나와 태호가 저를 빼놓고 전화기 속을 구경할까 봐 느끼는 유치한 질투심 때문은 더욱이 아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녀보다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화장실에 가는 일에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녀와 같은 나이의 여성인 덕분일 수도, 내가 그녀보다 훨씬 똑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스스로를 똑똑하다 여기지 않으며, 겸손할 줄 알기에 침묵할 뿐이다. 나는 한쪽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연홍이 화장실로 사라지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고선 태호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그럼에도 연홍을 향한 걱정스러운 연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확고함이 여전히 그의 표정 구석구석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문득, 내가 눈치채지 못한 무언가를 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과 정신의 나른함이 달아나는 것을 느낀다. 나는 퍼뜩 그에게 해야 할 질문이 떠올라 입을 여는데 급작스런 아랫도리의 따끔한 통증과 동시에 질문은 잊어버리고 악-하는 소리만 짧게 내지를 뿐이다. 바늘로 찌르는 듯 괴로웠는데 고통은 그를 인지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무심결에 내지른 소리가 괜스레 무안해지고 심지어는 통증 자체가 내 착각에 기인한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태호가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내가 소리를 질러서인지 아니면 그저 화장실로 사라져 버린 연홍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아 달리 시선을 둘 곳이 필요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기왕이면 전자 때문이라면 좋겠다.
연홍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태호와 나는 아무런 대화 없이 탁자 옆 각자가 서있던 자리를 지킨다. 태호는 팔짱을 꼈다가 풀고, 짝다리를 짚은 발을 바꾸고, 주먹을 쥐고 기지개를 켜기도 한다. 나 역시나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인 데다가 피로감이 잊을만하면 찾아오는지라 하품을 참을 수가 없다. 입을 겨우 다문채로 하품을 이겨보려 용을 써보지만 저절로 떨리는 어깨와 팔을 가누느라 몸은 더 지쳐만 간다. 스스로의 피로와 싸우기를 포기하고, 나는 호텔방 문쪽으로 등받이가 향한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앉은 다음 탁자 쪽으로 의자를 당기지 않고 그대로 윗몸을 앞으로 숙여 탁자 위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이마를 얹는다. 팔의 얇은 살에 눌린 이맛살이 눈썹을 아래로 밀고 나는 자연스럽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갈수록 더 보송보송해지는 목욕가운은 내 몸을 감싸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완벽하게 보완해 줄 뿐만 아니라 탁자에 닿은 팔도 지나치게 매끈한 탁자 표면과 내 피부가 직접 닿지 않게 사이를 매워주기도 한다. 비록 맨발이지만 바닥의 도톰한 양탄자는 발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와 그곳에 남은 물기와 땀을 기분 좋게 앗아간다. 아무도 모르게 목의 각도를 바꿔 머리의 무게균형을 조율하거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나는 이대로 잠이 들기를 바란다. 내 몸과 머릿속은 바깥세상의 온갖 고된 일들로부터 단절되고 평화를 찾은 셈이다. 잠에 들기만 하면 완성되는 완벽한 평화를, 나는 꿈꾼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에서부터 태호와 연홍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울림처럼 들려온다. 둘은 형사가 듣지 못하도록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여전히 엎드린 채로 저린 팔과 두 다리를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랜 시간 이마의 근육이 아래로 눌려있던 탓인지 눈이 뻑뻑하고 초점이 흐릿하다. 나는 잠들기 전과 똑같이 집게손을 하고서 양쪽눈의 안쪽을 꼬집는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탁자를 짚고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분 좋기만 하던 샤워가운은 결국 저도 이 세상에 속한 흔한 물건일 뿐임을 내게 고백하기라도 하는 듯이 엉덩이에 찰싹 붙어있는데, 내가 의자에서 완전하게 일어나서 엉덩이가 더는 의자에 붙어 있지 않고, 엎드려 자는 동안 활처럼 휘었던 몸이 곧게 펴졌으므로 샤워가운은 응당 팔랑이며 엉덩이를 스치듯 아래로 늘어 뜨러 져야 하는데, 지금의 샤워가운은 마치 급하게 용변을 닦다가 나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붙은 휴짓조각처럼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언제였던가 나 스스로보다 먼저 그 휴짓조각을 발견했던 남자친구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멸시하는 표정과 말투로 나를 나무라던 꼴이 얼마나 한심하던지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기억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나 또한 그의 엉덩이 사이에서 돌돌 말린 휴짓조각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고, 나는 그것을 보고 모른 척하는 예의를 갖춘 지성인이기 때문이며, 내가 그런 사실을 피력했을 때 그는 되려 나에게 더욱 화를 냈기 때문이다. 더는 그에게 미안하지 않게 됐고, 그러므로 창피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지금 내 엉덩이에 붙은 건 샤워가운이지 휴짓조각이 아니다.
나는 눈을 반쯤 뜬 채로 잠든 형사 앞을 지나 벽에 붙은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고친다. 먼저 엉덩이에 붙은 면을 잡아서 펴고 바로 이어서는 먼지를 터는 듯한 손동작으로 마무리한다. 소매 끝을 손으로 말아 쥔 다음 얼굴 아래에 하얗게 번진 침 자국을 지운다. 자국이 잘 지어지지 않는 부위는 새로 침을 묻혀 문질러 지운다. 그 속이 거의 비어 있음을 들킬 만큼 벌어진 옷깃을 가운데로 당기고 허리끈을 고쳐 묶는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거울 가까이에 비추고 약지로 눈곱을 긁듯이 떼어내자 기분이 산뜻해진다. 나는 그 둘 뿐만 아니라 내게도 중요할 것이 분명한 대화에 끼고 싶은 마음에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태호와 연홍이 있는 침실 쪽으로 걷는다. 시각을 알 수 없는 한밤중의 창밖을 보니 수많은 건물에서 뻗어 나온 다양한 색깔의 불빛이 어둠을 뚫고 낮고 무겁게 내리깔린 구름의 아래를 비추고 있다. 고개를 숙여 하늘의 더 높은 곳을 살펴보아도 별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슬리퍼 안 신었네.」
다가서는 내게 태호가 처음 한 말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발끝을 내려다보며 엄지발가락을 바로 옆 발가락에 문지른다.
「발 옆에 슬리퍼 가져다 뒀는데, 안 신었네.」
그가 덧붙인다. 하지만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 실내화를 신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데, 이곳의 바닥을 맨발로 딛는 촉감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직접 나를 위해 실내화를 챙겨다 두는 모습을 떠올리면 기쁘고, 비단 실내화 따위가 아닌 다른 것이라도 왜인지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으며, 심지어 그런 그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연홍이의 얼굴을 상상하면 즐겁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내가 그에게 수동적인 여자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마워, 신경 써줘서. 그런데⋯⋯.」
나는 침대 옆 소파에 혼자서 다리를 벌리고 앉은 태호를 향해 감사를 전하면서도, 말끝을 흐릴 즈음에는 침대에 걸터앉은 연홍이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연홍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태호를 쏘아보고 있고,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태호는 다리를 꼬면서 고개를 돌린다. 내가 하던 말을 마저 꺼낸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내 말을 들은 태호가 무언가 직접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모양인지 연홍의 눈치를 살핀다. 연홍이는 무언가 말을 할 듯 입을 열다가 이내 다시 입술을 꾹 다물고 태호에게 알아서 하라는 듯이 손짓을 한다. 태호는 그녀를 잠시동안 응시하다가 그녀의 의도를 재차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낸다.
「그게⋯⋯. 연홍이는 그 사람의 전화번호가 혹시라도 저 형사의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는지 확인을 해본 거야. 어, 그래. 그 사람 말이야. 지아의, 그러니까 연홍이 딸, 지아의 생물학적인⋯⋯ 아빠 말이야. 연홍이 스스로의 아빠이기도 하고, 연홍이 엄마의⋯⋯.」
「알아, 나도 아니까, 그건 됐어. 그래서 번호가 저장돼 있었어? 쓸데없는 말은 됐어, 오빠.」
내가 연홍이의 기분을 신경 쓰며 그의 말을 냉큼 자르자 연홍이는 고개를 숙인 채 흥-하는 소리를 내며 짧게 웃는다. 태호가 말을 잇는다.
「아, 그래. 어⋯⋯. 아니 아니, 그 사람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질 않았어. 연홍이가 전화 앱을 열고 그 사람의 번호를 입력했는데, 저장된 이름은 없었대.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연홍이가 전화를 걸어버린 거야. 그 사람이 전화를 받기 전에 연홍이는 전화를 끊어버렸지.」
그는 내가 그의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혹은 연홍이가 언짢아하지는 않는지 살피려고 말을 하다 말고 멈춘다. 연홍이도 별 반응이 없고 나 또한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그가 이내 말을 잇는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그 사람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 연홍이는 그 전화를⋯⋯ 받았지. 물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말이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