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8화
물꼬-3
{ 벗, 미치광이 - 제2권 17화 }에서 이어집니다.
연홍아-하며 태호가 담배연기를 코로 뿜어내며 입을 연다.
「예전에도 사람이 붙은 적이 있어?」
연홍은 주인이 내린 명령을 이해하지 못해 풀이 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다. 태호가 덧붙인다.
「내 말은, 전에도 누가 너를 미행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해코지를 하려던 적이 있냐는 거야.」
연홍이가 드디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까딱이자, 태호가 빛나는 눈동자로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태호가 다시 입으로 담배를 가져갈 때가 되어서야 연홍이는 설명을 요하는 질문이었음을 깨닫고 입을 연다.
「응, 있어. 몇 번 그랬지. 붙잡혀가면 카드를 뺏기고, 그놈이 피곤해 지칠 때까지 섹스를 하고, 카드를 돌려받고, 그리고, 뭐⋯⋯. 다시 풀려나. 그때그때 차이는 있지만, 대충⋯⋯. 그런 식이었어.」
얼굴이 상기된 태호의 눈동자는 진동하듯 요동치고 꽉 쥔 주먹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박살내고야 말 것 같다. 그런 그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일이고, 연홍이는 특히나 더욱 곤욕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나는 목이 가려워서 하려던 기침마저도 조심스러워져, 말아 쥔 손으로 입을 막아 참으며 태호가 앉은 둥근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다. 그의 옆에 너무 가까우면 연홍이에게 미안하고, 너무 떨어져 마주하게 되면 그의 분노와 울화로 가득한 얼굴을 마주해야 하기에,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연홍이가 정면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오른쪽으로는 태호의 뒷모습이 비스듬히 보이는 각도로 의자를 당겨 앉는다. 땀에 젖어 카라가 얼룩덜룩한 셔츠는 그의 널찍한 어깨로 이어지고, 둥글게 솟은 어깨의 끝에서 다시 굵은 팔뚝으로 이어지고, 팔목 아래까지 대충 걷어 올려진 셔츠 아래는 힘줄이 솟은 아랫팔로 이어진다. 그저 눈을 뜨고 있는 내 앞에 보이는 것을 훑을 뿐인데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죄책감으로 인해 나는 시선을 연홍이에게로 옮긴다. 이제는 주눅 든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지치는지, 연홍이는 목이 꺾인 듯 숙였던 고개를 제법 높이 바로 세운다. 다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하고 있다. 분홍빛 도는 가지런한 무릎, 종이를 줄 세워 접은 듯 곧게 뻗은 정강이, 양말의 탄력이 무용하게 가느다란 발목, 보랏빛 핏줄이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피부를 투과해 보이는 발등, 그리고 하릴없이 꼼지락거리는 작은 발가락이 주인의 시선을 번갈아가며 받는다. 나는 그녀가 발가락에서 발등으로, 무릎에서 발목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을 관찰하고, 이내 그녀의 행동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나는 탁자 위로 손을 뻗어 태호가 뚜껑이 열린 채 던져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러고는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치켜들고 형사를 살펴본 뒤 태호의 뒤통수에다 대고 말한다.
「언제까지 저렇게 둘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아무튼, 처음보다는 많이 차분해졌네.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한가 봐.」
딱히, 태호에게 한 말은 아니다. 묶여있다고는 하지만 펜트하우스의 입구 쪽 창가에 앉아있는 인간은 약쟁이이고, 직업이 형사인 데다, 태호의 도움 없이 두 여자의 완력으로는 당해낼 리 없는 남자이기 때문에 내가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모두가 나서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일행 셋은 그와 멀리 떨어진 침실에서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대화를 드문드문 이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나라도 나서서 형사의 존재를 상기해야만 한다. 태호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형사가 결박을 풀고 연홍이나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듬직하고 튼실한 남자인 태호에게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너, 방금 섹스라고 했어?」
태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연홍이를 다그치듯이 묻는다. 연홍이는 짜증을 억누르는 얼굴로 고개를 짧게 끄덕인다. 어쩌면 짜증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짜증을 겨우 참고 있는 것이니 다음에 꺼낼 말을 신중히 고르라는 표정인지도 모르겠다. 태호가 입술을 비죽이고 아랫잎술과 턱에 주름을 잔뜩 찌푸리며 덧붙인다.
「너는 강간을 당한 거잖아. 왜 그걸 섹스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되물었을 때, 방금 내가 되물었을 때라도 그저, 말이 헛나왔다-라고 했으면 될 일이잖아. 왜 그게 섹스였어? 이상하잖아. 나는⋯⋯. 네가 그 인간을 죽이겠다고 했을 때 돕기로 했어.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거고. 그건 그 인간이 강간범이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왜 여기서 섹스라는 말이 나오는 거냐고⋯⋯.」
태호는 오른손에 든 담뱃불이 꺼진 것을 이제야 알아차리고 재떨이에 담배 대가리를 내리꽂는다. 태호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에 연홍이 싸늘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가로막는다.
「야. 조태호. 그게 지금 중요해?」
잠자코 담배를 태우던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 호흡이 꼬여 매운 기침을 한다. 당장의 나는 목과 코가 따가워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 태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놀란 게 틀림없다. 유쾌한 상황이 아닐 때, 상대를 부르는 호칭의 변화는 대단히 큰 힘을 지니는 것 같다. 태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마지막으로 짧게 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피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인 둘이서 나를 공격해 놓고서는 아쉬운 상황이 되자 나와의 협력을 꾀하는 꼴이라니, 결코 도울 수 없다. 내 뜻을 이해한 태호는 입꼬리를 내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 연홍이를 바라본다.
「그래. 그래, 윤연홍. 네 그런 태도는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내 대답은 그렇다-라는 거야. 그 인간과 네 사이에 있었던, 있어왔던 일이 섹스인지 강간인지, 나는 분명하게 알고 싶어. 나한테 그건 중요한 문제야.」
태호는 물러설 마음이 없다. 연홍이의 남자친구로서 그녀의 아빠와 그녀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스스로에게 당연한 일이며, 악당을 벌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한 일행으로서 당위성을 따지는 것은 그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이봐요, 태호 씨. 조태호 씨. 오빠. 내가 그 인간하고 섹스를 했다고 말을 했잖아? 네가 되물었을 때에도 그렇다고 했잖아? 뭘 더 어쩌라고! 아이 씨⋯⋯.」
그녀는 특유의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욕을 뱉기 시작한다. 가늘고 작은 손으로 침대 이불을 쥐어 뜯기도, 주먹을 쥐고 매트리스를 내리치기도 하지만, 힘이라고는 없는 그녀의 몸부림은 오히려 딱하게만 보일 뿐이다. 그마저도 숨이 차서 금방 끝이 나고야 만다. 태호는 기가 차다는 듯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이마 옆으로 불룩하게 핏줄이 솟은 채, 숨을 마저 다 고른 연홍이 탁자 위의 재떨이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오빠. 태호 오빠. 여기서 나가, 당장. 그리고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안 될 일이다. 연홍이를 말려야 한다. 태호를 붙잡아 둬야만 한다. 나의 직감은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라고 이르고 있다. 나는 격앙된 둘의 대화를 형사가 알아들을까 두렵다.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한다.
「오빠, 오빠. 내 말 좀 들어봐. 저기 저 형사는 어떻게 처리할 거야? 오빠가 나가면 연홍이랑 나 둘 밖에 없어. 연홍이 말 듣지 마. 오빠가 나가면 끝장이야. 얘랑 나 둘이서 뭘 할 수 있겠어?」
순간, 그를 붙잡기 위해서는 내 몸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게 무슨 이상한 생각이람.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낸다. 진심 어린 내 말을 듣고서도 태호는 말이 없다. 그는 유감이라는 듯이 내 얼굴을 흘깃 보고서는 다시 연홍이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나가.」
연홍이 짧게 내뱉고, 태호는 탁자 위의 담뱃갑과 라이터를 챙겨서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큰일이다.
「덕분에⋯⋯. 살인은 면하게 됐네.」
태호가 아무나 들으라는 듯이 말을 흘리며 입구 쪽으로 걸음 한다. 이제야 나는 내게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깨달은 게 어딘가. 나는 연홍이와 호텔에 남아야 할지, 태호를 따라나서야 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게 되건, 태호가 펜트하우스 입구 밖으로 사라지기 전에 결정을 해야 한다. 저울질을 해보자.
태호는 남자고, 멋지다. 연홍이는 여자고, 예쁘다. 동점이다. 태호는 가난하고, 연홍이에게는 뭐든지 살 수 있는 신용카드가 있다. 연홍이가 먼저 득점한다. 태호는 어릴 적 유도를 해서 평균 이상의 호신이 가능한 반면, 연홍이는 항상 아프고 힘이라고는 없다. 태호도 득점한다. 다시 동점이다. 태호를 따라나서면 안전할까? 장담할 수는 없다. 형사의 동료가 밖에 있다. 묶여있지도 않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형사의 동료를 태호가 제압할 확률보다는 태호가 제압당할 확률이 높을 지도 모른다. 내가 펜트하우스에 연홍이와 머무른다면 어떨까. 펜트하우스의 입구는 묵직하고 튼튼하다. 비록 약쟁이 형사가 같은 공간에 있기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묶여있다. 그렇다. 나는 머무르는 편이 낫다. 어차피 맨몸에 목욕가운만 걸친 내가 태호를 따라나서서 뭘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연홍이와 태호 둘 사이의 문제다. 나는 태호를 미워할 이유도 없고, 연홍이를 미워할 이유도 딱히 없다. 오히려 나는 둘 모두가 참 좋다.
「조심히 가, 오빠.」
내가 일어서서 태호의 뒷모습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태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더니, 한 손을 높게 들어 대충 한번 흔들고는 말없이 다시 몸을 틀어 입구를 향해 걸음 한다. 거실을 지나고, 두 단짜리 층계를 지나서 그가 형사 앞에 다다른다. 그는 형사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형사는 그를 화난 짐승같이 노려본다. 그 모습은 마치 두 발로 서있는 거대한 불곰을 향해 앞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치와와를 연상케 한다. 덕분에 나는 그 형사에 대한 두려움이 한층 적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제 연홍이와 나 둘이서 어떻게든 그가 있는 상태로 하룻밤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나의 결정은, 태호를 따라나서지 않고 남기로 한 결정은 옳았다. 두 발로 선 불곰은 치와와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뒷발로 치와와의 다리를 한 번 툭 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입구에 다다른다. 이제 그의 모습은 장식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잠금쇠를 푸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난다. 이제 태호는 없다. 나는 다시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연홍이 옆에 앉기 위해 침대로 걸음 한다. 그녀는 눈으로 걸음 하는 내 맨발을 쫓더니 내가 침대에 막 이르렀을 때 나지막하게 입을 연다.
「너도 나가. 가버려. 진심이야.」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