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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n 23.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9화

물꼬-4

{ 벗, 미치광이 - 제2권 18화 }에서 이어집니다.


 이미 몸을 돌려 침대에 앉으려던 참에 연홍의 말을 들은 나는 자존심이 상한다. 앉지 말아야겠다. 그녀와 마주 서되, 나의 물리적 위치가 침대에 앉은 그녀보다 높아야 한다고 직감이 속삭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빨리 상체를 숙여 몸의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김과 동시에 굽히던 다리를 다시 펴서 바로 서려고 하지만, 내 운동신경은 항상 그래왔듯이 내 기대를 저버린다. 다리를 펴려다가 종아리가 침대에 닿는 통에, 나는 결국 벌렁하고 두 다리를 공중에 띄운 채 풀썩하고 침대에 앉고야 만다. 뭘 기대했냐고, 아직도 모르겠냐고, 안쓰러운 척 비웃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온다. 얼굴이 상기되는 열감을 느끼지만, 다행히도 상체가 뒤로 반쯤 뉘어져서 연홍이가 내 얼굴을 봤을 리는 없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세를 고치고 그렇게 그녀와 나는, 아마도 거의 확실히 자연스럽게, 나란히 앉은 채 침묵한다. 침대에 앉지 않고 두 발로 서있다면 그녀의 나가라는 말을 들은 내가 뭐라고 되받아쳤을지를 상상하면서 몇 분 즈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녀가 침묵을 깨고 조용히 말한다.

 「가라고.

 그녀는 여전히 제 발 끝을 쳐다보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뿐이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나는 초조하기만 하다. 우선은 나도 내 발끝을 바라보며 그녀처럼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본다. 때가 불었는지 발가락 사이가 미끈하고, 무언가가 돌돌 말리는 것도 같고, 바닥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발가락, 떼, 발가락 떼. 그래, 발가락 떼. 나는 속으로 무의미한 말을 뇌까리다가 무심결에 입을 연다.

 「형사는 어쩌려고?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연홍이 대꾸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녀의 유약한 몸으로는 형사를 제압하기는커녕 묶인 상태인 형사를 코 앞의 출입구로 옮기지도 못한다. 오히려 형사의 반격에 변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런 점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완력이 필요한 일이라면 더욱 그녀와 나 둘 모두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역시, 연홍이는 지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날 쫓아내는 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어. 네 호텔방이고, 네가 나가라고 하면 나는 나갈 거야. 그냥 이해가 안 가서, 궁금해서 말인데⋯⋯.

 「유지야, 너는 내 친구야. 형식이나 배려는 집어치워. 빙빙 돌릴 것 없이 본론을 이야기해. 지금 이런 상황에 너는⋯⋯. 미안하다, 나 지금 마음에 여유가 없어.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그녀의 거친 말은 나의 자존심을 다시 한번 건드렸지만 말미의 사과 몇 마디 덕에 치밀던 분노는 뙤약볕 아래의 얼음처럼 녹아버리고, 녹은 물은 뜨거운 아스팔트로 퍼지기도 전에 증발해 버린다. 그래, 고마워-하며 내가 말을 잇는다.


 「형사가 쫓아온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 내가 하려던 말은 이거야.

그녀는 입술을 붙인 채로 입을 벌리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힐긋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다시 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는 것일 뿐이다. 그녀가 암시했듯이 이런 심각하고 진중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그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조차 실패할 만큼 내 말이 우스웠다는 사실에 나는 수치심을 느낀다. 이번에는 내가 수치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다. 내 감정을 솔직히 드러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 웃겼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로 화를 내면 자칫 바보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왜, 형사가 무엇 때문에 너를 쫓아왔다고 생각해?

연홍이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묻는다. 심지어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그녀는 농담을 던지듯 묻고 있다. 그녀의 발가락은 꼼지락 거리기를 멈추었고, 가느다란 두 다리는 정강이 중간 즈음에서 가만히 교차하고 있다. 그녀의 집중이 내게로 쏠린다.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 저 형사가 같이 탔어. 다른 사람은 없었어. 생각해 봐, 내가 만만해 보였거나 헤프게 보였거나, 아니면 그냥 마음에 들어서 같이 마약하고 섹스하고 싶어서라던가⋯⋯. 뭐, 그런 이유였겠지. 중요한 건 네가 아니라 나를 따라왔다는 거야.」

조리 있게 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차근차근 말해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말을 하는 내내 확신이 서지 않는 건 왜일까. 그녀가 대꾸한다. 마치, 준비해 둔 말이 있기라도 한 듯하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이야. 저 형사가 너 하나만 어떻게 해보려고 쫓아온 거였으면 좋겠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니야. 유지야, 나는 네가 답답한 면이 좀 있어도 좋아. 친구니까. 그러니까 내가 일일이 설명하는 일 없이 그냥, 제발, 나가줘.」

그녀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날더러 답답하다 해도 화가 나지 않고, 친구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 마저 연홍이를 버릴 수는 없다. 내가 나가게 되면 홀로 남을 연홍이를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홀로 남기를 원하는지 나는 알아야만 한다. 아니, 그녀는 정말 홀로 남겨지기를 원할까?

 「연홍아. 고집부려 미안해. 네가 거짓말을 해도 상관은 없는데, 이건 물어봐야겠어. 태호 오빠랑 나를 쫓아내는 건, 네가 원해서야? 아니면 원하지는 않지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야?」

그녀는 이제는 다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고, 곧장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한다.

 「내가 대답해 주면, 다른 질문을 또 덧붙이거나 하지 않고 나가줄래?」

얼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후회하지만, 그녀가 말을 잇는 통에 잊어버린다.

 「내가 원해서야. 자, 됐지? 아니, 그래. 된 거야. 됐어. 나가. 얼른 나가.」

이미 동의한 일,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들도 있다.

 「그럼, 나는 나갈게. 그런데⋯⋯. 샤워가운을 입은 채로는 밖으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아니야, 서울 한복판에서 이 정도야 괜찮겠지. 가운 사이즈가 커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하기는 한데⋯⋯. 그런데 나, 전화기도 없어서 너나 태호 오빠한테 연락도 못할 텐데. 그리고 나 택시비도 없는데⋯⋯.」

내가 미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연홍이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형사가 묶여 있는 곳을 향해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향한다. 별생각 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를 따라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가운의 벌어진 부분을 고쳐 입고, 슬리퍼를 신고서 그녀를 따라가려는데, 이미 그녀는 다시 침실로 걸어오고 있다.


 그녀가 손에 든 무언가를 내 발치로 내리꽂듯이 내던진다. 형사의 지갑이다. 연홍이의 생각만큼 답답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은 나는 그녀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무얼 해야 할지 잘 안다. 나는 몸을 숙여 지갑을 들고, 속에 들어있는 현금을 죄다 꺼낸다. 그리고 지갑은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둔다. 내가 알겠어-라고 소리 없이 말하자, 그녀가 소리 내어 대답한다.

 「서둘러. 얼른 나가. 다시는 나 찾지 마. 계획은 다 틀어진 거야. 나가. 얼른.」

그녀는 내 등을 떠밀며 함께 걷는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내 등을 밀 때마다 한 두 걸음을 폴짝폴짝 뛰게 되는데, 그 모양이 무안하고 우습기까지 하지만 티를 낼 계제는 아닌 듯싶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급급하다. 이제는 벽에 기대어 있지 않고 고개만 간신히 벽에 세워진 채 바닥에 누운 형사를 지나칠 때, 얼핏 그의 얼굴에서 회심 어린 미소를 읽는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연홍이가 내 등을 떠밀지 않는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이미 그녀는 몸을 틀어 되돌아가고 있다. 배웅의 끝에 포옹이라도 기대했던가. 아니다. 다만 마지막 대화에 인사다운 인사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가운의 양쪽이 잘 교차하도록 고쳐 입고, 슬리퍼를 발가락으로 꼬집듯 당겨 신은 다음, 태호가 나갔던 그 문을 나선다. 이 문을 열었을 때 듬직한 태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오던 순간, 진한 가죽 냄새가 코와 입을 덮쳐온다.


 무더운 여름밤에 웬 가죽장갑이람. 숨을 들이켜려던 순간 난데없이 코와 입이 막힌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어째서 하필이면 폐 속에 공기를 비워낸 순간에 숨구멍이 막힌 것일까, 이다. 폐 주변의 근육을 어떻게 움직여봐도 몸속에 남아있는 공기를 찾을 수가 없다. 배가 오므 들고 폐가 쪼그라든다. 폐를 다시 부풀리려 하면 할수록 되려 길쭉한 기도가 좁아지며 이마의 핏줄이 요동치기를 더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다. 눈과 귀는 불에 덴 듯 뜨겁게 화닥거리고, 내 얼굴을 가린 거대한 손을 잡아떼려는 두 손은 꿈속에서 휘두르는 주먹과 같이 힘이 없다. 더욱 손에 힘을 줘야 할지, 산소를 아끼기 위해 발버둥을 멈추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반복적으로 스치듯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갈마든다. 순간, 두 발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발버둥을 치는 두 다리가 분명, 공중에 떠있다. 내 몸 어느 곳 하나도 바닥에 닿아있지 않다. 물속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수면으로 얼굴을 내밀듯이 내가 공중으로 떠오른 걸까. 나는 발버둥을 멈춘다. 하지만 다시 가라앉지는 않는다. 영혼이 정말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죽는 게 끝이 아니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보육원 시절 몽상이 몸이 떠오르듯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떠오른다. 영혼이 있으면, 그걸 확실히 알게 되면, 죽는 게 덜 무서울 테니까. 언제부터였을까, 시야가 새하얗다. 아니,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다. 다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색을 섞은 듯 새까만 암흑 같기도 하고, 모든 빛을 섞은 듯 찬란하기도 하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목 뒤가 따끔한가 싶더니 이내 몸과 영혼의 끈이 똑-하고 끊어지고 나의 의식은 둥실 떠오른다. 어느새 내 의식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어진 내 몸은 파르르 떨며 공기를 들이마신다. 그토록 갈망하던 공기를 얻은 내 몸에게도, 새처럼 자유로워진 내 영혼, 나의 의식에게도 다 잘된 일이다. 혼 없이 남겨진 채 살아갈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제는 상관없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진작에 죽을걸.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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