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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n 30.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0화

희망-1

작가의 말 : 선정성 주의


{ 벗, 미치광이 - 제2권 19화 }에서 이어집니다.


 한기가 온몸을 엄습한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충격이 조금씩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는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와 이윽고 바닥에 닿는다. 까슬한 바닥에 등과 엉덩이가 닿고, 어깨와 팔, 손목이 같은 바닥에 닿는다. 허벅지와 종아리는 바닥에 닿지 않고, 대신 발바닥이 닿는다. 두 손을 천천히 움직여 바닥을 쓰다듬는다. 같은 면이라는 것을 알지만, 손가락 끝에 닿는 촉감만큼은 아주 까슬까슬하기만 하지만은 않다. 심지어 이 보들보들한 감촉은 늦은 오후 한가한 마을버스 의자를 연상케 한다. 계속해서 이따금씩 멈추었다가 이어지는 충격의 반복에 등이 따끔하게 쓸린다. 같은 바닥이건만, 손가락 끝이 아닌 다른 곳으로 느껴지는 촉감은 결코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나는 두 눈을 아주 느리게 뜬다. 초점이 맞지 않은 탓에 미간에 힘을 주었다가,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몇 번 반복하자 눈이 부시게 환했던 시야는 조금 어두워지지만 동시에 또렷해진다. 모자가 달린 동그란 전등이 천장에 매달려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다. 고시원의 길쭉하고 푸르스름한 형광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전등이다. 아니, 다시 보니 전등은 가만히 매달려 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건 내 몸이다. 그래, 결국 나는 죽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상관없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언제라도 힘들고 지칠 때면 삶을 끝낼 수 있다.


 사그라들지 않는 한기에 뒷목에 소름이 돋는다. 춥다. 나는 두 팔을 들어 내 몸 위에 올라탄 태호의 목 뒷덜미를 쓰다듬고, 그의 넓은 등을 꼭 끌어안는다. 그의 뒷덜미에 난 머리칼은 수염처럼 투박하고 굵직하지만 만질수록 더 만지고 싶은 귀염성이 있다. 내 얼굴의 왼쪽으로 제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가 상체를 들어 나를 마주 본다. 깼나?-하고 묻는 그의 얼굴은 태호가 아니라 형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놀랍지는 않다. 나는 다시금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그의 얼굴이 내 얼굴 옆으로 자리하도록, 그의 귀와 나의 귀가 맞닿도록 끌어당긴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활짝 열린 시야를 통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럼 그렇지. 태호는 떠나지 않았다. 그는 황홀한 얼굴을 하고 의자에 앉아 역시나 기쁨에 겨워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찌나 황홀한지 그의 불투명한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침마저 흐르고 있다. 내 몸이 공중에 부유하지 않고 바닥에 머무를 수 있도록 눌러주던 충격이 일순간 멈춘다. 귓가에서 몰아쉬는 가쁜 숨소리가 들리다가 잦아들고, 내 몸을 누르던 무게가 사라진다. 발바닥이 까슬한 바닥에서 떨어지고, 이윽고 허벅지와 종아리 뒷면, 그리고 발 뒤꿈치가 바닥에 닿는다. 조금 전 보다 더욱 추워졌다. 이제는 배와 가슴에도 한기가 덮친다. 가랑이 사이는 축축한데 이는 뜻밖이게도 내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다리를 모아 비빌 때의 미끈한 촉감은 꽤 좋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무릎을 세우고 허벅지를 맞붙인다. 바닥의 거칠기가 적당해서 힘을 들이지 않아도 발바닥이 밀려 다리가 펼쳐질 염려가 없다. 이제는 온기를 얻기 위해 오른손을 배꼽에, 왼손을 가슴 아래에 올린다. 완벽한 자세다.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지난 하루를 곱씹으며 후회하거나 내일을 걱정하며 잠자리에 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대한 인식 없이 오롯이 지금의 형언할 수 없이 큰 기쁨과 기분 좋게 나른한 피로감에 영혼과 육체를 던진 채 잠에 드는 것이다. 평생 이토록 행복했던 적이 없다. 영원히, 죽을 때까지 지금 같을 수 있다면⋯⋯.


 해가 뜨는 것을 본 것도 같은데, 지금은 다시 밤이다. 발가벗은 채 호텔 바닥에 누워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주변의 위험을 직감한 초식동물처럼 얼어붙는다. 생각을 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었고,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몸을 일으키는 것은 그다음이다. 일단 일어나게 되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각할 틈이나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통이 일어 도통 생각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커다란 호두까기가 양쪽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것 같다. 이대로 압력이 지속되면 내 두개골은 일순간 쩍-하는 소리와 함께 깨져버리고 만다. 몇 분 어쩌면 몇십 분 동안 계속되던 두통이 일순간 사그라든다. 그간 고통을 이기려고 긴장했던 곳곳의 근육이 이완하자 누운 내 몸이 철판 위의 버터처럼 더욱 바닥에 눌어붙는다. 나는 손을 더듬어 목욕가운을 찾는다. 까슬한 바닥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도톰한 면의 질감이 금방 손끝에 닿는다. 입고 있던 목욕가운은 내 엉덩이 밑에 펼쳐져있고, 그 윗부분은 둥글게 말려있다.


 나는 누운 채 허리를 들어 가운을 당겨 올려 조심성 있게 소매에 팔을 하나씩 넣는다. 어깨를 틀어 왼팔을 소매에 넣으며 기억 조각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오른팔을 소매에 넣으며 생각을 한다. 내게 일어난 일을 무엇이라 지칭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두렵다. 차라리 기억을 잃었다면, 지난 시간의 끈이 싹둑 잘라져 공백을 만들 수만 있다면 좋겠다. 남 탓만큼 편리하고 쉬운 게 없건만, 몇 번을 되돌려 재생해 보아도 버리고 싶은 기억 속의 나는 당하는 자가 아닌 행하는 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두 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결론에 다다르고, 이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작게, 소리 내어 명령한다.

 「기억이 나지 않아⋯⋯. 그래,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나는 당했어. 뭔가 기억나지 않지만 끔찍한 일을 당해버리고 만 거야.」

 등이 벽에 닿을 때까지 나는 앉은 채로 뒷걸음 한다. 어깨와 팔꿈치를 벽에 대고 서서히, 아주 느린 동작으로 몸을 일으킨다. 턱이 떨리며 어금니가 진동하듯 부딪히고 다리가 떨리지만 일단 일어서고 나니 그럭저럭 버틸만하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장 먼저 정면에 보이는 태호는 입구 쪽 탁자 의자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앉아있다. 두 발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으니, 등 뒤로 가려진 두 손목의 사정도 다르지 않을게 뻔하다. 침실이 있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기가 두렵다. 그렇지만 연홍의 목소리가 그곳으로부터 들려오니 어쩔 도리가 없다. 눈동자를 왼쪽 끝으로 옮기고도 내 시선이 침실에 닿지 못하자, 그제야 나는 시계의 분침이 돌아가듯 아주 조금씩 목을 틀어 그녀의 모습을 찾는다. 침대 위, 그녀의 새하얀 등이 보인 순간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만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버렸다. 그녀가 올라탄 허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뿐이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계획은 끝났다. 복수를 시도해 보기는커녕 일찌감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다가 보기 좋게 역습을 당했다. 우리는 역습을⋯⋯ 그래. 당했다. 적어도 나는 당한 게 맞다. 그래야 한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이 번쩍하고 떠진다. 형사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묶여있지 않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으로, 스스로를 구할 기회가 분명하다. 태호는 팔다리가 다름 아닌 수갑으로 묶였으니 내가 도와주려 해도 방법이 없다. 연홍이는⋯⋯ 즐거워 보인다. 그녀는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녀의 문제는 가정사 혹은 남녀 간의 것이며, 정사 중인 남녀를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으며 되려 내가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지금 이대로 조용히 앞으로 걸어가 펜트하우스의 문을 열고 사라지면 나는 탈출할 수 있다. 목욕가운의 주머니에는 형사의 지갑에서 꺼내둔 현금이 그대로 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넣어뒀던 그대로임이 분명하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나는 선량하다.


 「서로가 원했었잖아. 네년이 날 죽였어. 내 뇌를 드라이버로 휘저어놓고 어디서 착한 척이야? 나보다 네가 더 악질이야.」


순간 터져 나오는 비명을 두 손으로 겨우 틀어막는다. 조금의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지만 침실에서 들리는 교성이 더 큰 탓에 들키지는 않은 것 같다. 확실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달동네 꼭대기 일톤트럭에서 날 덮치려 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걸음을 재촉해야 하는데 머릿속 남자의 목소리가 가위에 눌릴 때처럼, 깨어있는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마비시킨다. 이대로 굳어있다가는 균형조차 잃고 넘어지고 만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망상일 뿐이다. 그를 죽인 건 편의점 사장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그의 귀에 꽂힌 드라이버를 잠시 손에 쥐었을 뿐, 나로 인해 그가 죽은 것이 아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큰 소리로 꺼지라고 외치면 일톤트럭의 남자는 머릿속에서 사라질 테지만, 지금은 목소리를 키울 계제가 아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머릿속 남자에게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고, 내가 아니라 초등학교 옆 편의점 사장한테 가라고 설득한다. 시간이 없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테고, 나는 어서 몸을 움직여 탈출해야 한다.


 「비겁한 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선량하고, 비겁하지 않다. 오히려, 나처럼 불운한 사람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비겁해도 괜찮다. 하지만 이제 일톤트럭의 남자는 목소리를 초월하고 형체까지 갖춰간다. 남루한 옷차림에 펜트하우스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저분한 몰골을 한 그가 팔짱을 끼고 서서 말한다.


 「인정을 못하시겠다? 그럼 내가 더 나쁜 놈이 돼야지. 우리, 서로가 원했잖아. 지금이라도 합을 맞춰볼까?」

 

눈을 떠도 보이고 감으면 더욱 선명해지는 그를 떨쳐내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두 주먹을 꼭 쥐고 머릿속으로 인정할게, 내가 당신을 죽였어, 나는 살인자야-하고 외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한다.


 「제 목숨 구하겠다고 나라도 팔 년일세. 꺼져라, 나도 너 같은 년은 싫다.」


어찌나 고마운지. 마비가 풀리며 왼쪽으로 기울던 몸을 겨우 바로 세우고 나는 걸음을 뗀다. 연홍의 교성에 연연하지 말고 앞만 보고 걷는다. 문으로 가는 통로 바로 왼쪽에 묶여 있는 태호를 보지 않으려 얼굴을 오른쪽으로 틀으려던 순간 목이 뒤로 젖혀져 보이지 않던 태호의 얼굴을 스치듯 본다. 미안해 오빠, 미안해요 아저씨, 나는 나가야 해요-라고, 나는 그가 듣지 못하기를 바라며 속삭이며 걸음을 재촉한다. 마침내 현관문에 다다르고, 문 손잡이를 잡고, 신중하고 세심하게 돌린다. 자칫 문을 세게 열면 바람이 들거나 기압이 변하면서 큰 소리를 낼 수도 있다. 아주 느리게 문을 조금씩 연다. 얼굴을 내밀고, 복도를 살핀다. 아무도 없다. 내 몸의 두께보다 아주 조금 더 넓게 열린 문으로 나는 미끄러지듯 빠져나오고, 마지막까지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문을 닫는다. 이제 나는 펜트하우스로 들어갈 수 없다. 태호와 연홍이를 위해 되돌아가고 싶어도, 이제는 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에 나는 강렬한 안도감을 느낀다. 나는 서둘러 승강기 앞으로 향한다. 단 하나밖에 없는 승강기 단추는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 모양이다. 이보다 더 높은 층은 없고, 내려갈 수만 있다. 내리막길, 편한 길. 하지만 나는 망설인다. 형사를 만난 장소가 승강기였기 때문인지, 화살표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추락할까 두려워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나는 단추를 누르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비상계단을 찾는다. 가장 느리지만 가장 안전한 탈출 경로임이 분명하다.


 비상계단실 입구는 승강기를 지나 왼쪽으로 난 짧은 복도에서  찾는다. 비상대피로라고 큼직하게 쓰인 문은 결코 찾기 어렵지 않다. 이 문구는 그야말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문이라는 뜻이자, 밝은 세상으로의 환영을 뜻한다. 이제는 샘솟는 자신감과 행복감에 문을 활짝 밀어젖히자,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형사가 서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벌써 가게?」

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온다. 펜트하우스 문 밖에서 만난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내가 대꾸한다.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야.」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진짜 착하게 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몸을 틀어 옆으로 서면서 길을 튼다. 하지만 그가 나를 보내주는데, 걸어서 갈 이유는 없다.

 「저⋯⋯. 엘리베이터로 갈게요.」

그의 멍투성이 얼굴에 웃음이 터진다. 그는 앞장서라는 듯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복도를 가리킨다. 나는 말없이 몸을 돌려 승강기로 향해 걷는다. 그가 나를 뒤따른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계단실에 있었어요?」

이제는 서로 각자의 갈 길을 갈 사이다. 승강기가 도착할 때까지 소소한 잡담을 하면 불편함을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편안하고 친근한 어투로 화답한다.


 「뭐긴 뭐야. 약 배달받았지. 하나 공짜로 줄게. 서로 살도 섞은 사이니까. 아, 그렇지. 너는 아직 주사 놓을 줄 모르지? 이를 어쩐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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