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2화
희망-3
{ 벗, 미치광이 - 제2권 21화 }에서 이어집니다.
호텔 직원은 수화기를 집어든 손의 검지를 놀려 전화를 걸고, 몇 마디 말을 하고, 마치 상대방이 코앞에 있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전하고서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고 몸에 밴 친절은 호감을 부른다.
「안내하겠습니다. 바로 나가시죠.」
예의상 사양할까 싶다가도 유리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말을 아낀다. 그는 대꾸 없이 딴짓을 하는 나를 점잖은 미소로 잠시 바라보다가, 입식 탁상 밖으로 나오며 말을 잇는다.
「앞장서겠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는다. 그저 보육원을 떠나던 날처럼 앞장선 어른을 뒤따른다. 호텔 직원이 열어 준 문을 나서고 그가 문을 열어준 택시에 오른다.
「살펴가십시오. 손님, 다시는 오지 말아요. 이겨낼 수 있어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문을 닫는 그의 얼굴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본다. 그는 겨우 알아챌 만큼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미소를 내게 건넨다. 내가 호텔직원에게 화답할지 고민하는 순간 택시가 출발한다.
기사는 호텔을 빠져나와 힐긋 좌우를 살피고 부드럽게 대로변으로 택시를 몰아간다.
「손님, 노량진역으로 모실까요? 아니면⋯⋯.」
「네, 노량진역 앞으로 가주세요. 고맙습니다.」
기사는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는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가 켜져 있지만 볼륨이 낮아 마치 자동차 밖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불현듯 뭔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탈출에 성공해 택시를 타고 유유히 떠나고 있는데도 기쁘지가 않다. 짜증과 피로감은 여전하고 모든 게 귀찮다. 지금 잠들어서는 안 된다고 내 직감은 말하지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다.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석회로 만든 구슬처럼 뻑뻑해진 안구는 눈꺼풀 안쪽 벽에 단단히 붙어서 미간의 힘을 풀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눈을 감은채, 다만 잠에 들지 않으려 내가 처한 상황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부풀어 오른 볼기짝, 입속 가득 비릿한 피냄새, 속옷 하나 없이 걸친 목욕가운, 부드럽기만 하고 방수 기능은 기대할 수 없는 슬리퍼, 한 달 넘게 월세를 내지 못한 고시원으로 향하는 택시, 주머니에 든 뭉칫돈, 내 이름, 유지. 친구들, 내가 포기한 친구들.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뜬다. 동시에 입은 저절로 벌어져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익숙한 광경이 택시 창문 밖에 펼쳐져 있다.
「미터기는 진작에 껐어요.」
기척을 느낀 기사가 나직하게 말한다. 그의 메마른 어조에 나는 눈알을 빠르게 굴리며 정신을 차린다.
「고맙습니다. 그, 저⋯⋯. 여기요. 잔돈은 주지 않으셔도 돼요. 살펴가세요.」
택시의 뒷문을 밀어 닫고 몸을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옷가게다. 아직도 영업을 하는 걸 보니 아주 늦은 시각은 아닌가 보다. 나는 가운 주머니에 든 뭉칫돈을 만지작거리며 가게로 들어선다. 맨살이 조금이라도 덜 드러나도록 몸을 움츠려보지만 그럴수록 가운의 앞이 벌어져 이내 관둔다. 가지런히 겹겹이 정돈된 옷들을 만지작 거리던 입구 쪽 여직원 하나가 내 몰골을 보고는 손님을 맞는 인사를 꺼내려다가 멈춘다. 그녀의 입은 아-하고 벌어져 있다가, 가지런한 앞니가 가로로 길게 보이게끔 반쯤 다물어지다가, 배꼽처럼 동그랗게 입술이 말리며 닫힌다. 이내 그녀는 획-하고 돌아 달아나고, 나는 간편하게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찾아 가게 곳곳의 복도를 살핀다.
늘어나는 재질의 청바지 한쪽을 양손으로 쥐고 당겨보던 중에, 배꼽입술의 여직원이 상사로 보이는 여직원을 데리고 통로 끝에서 내게로 다가온다. 나는 가게에서 쫓겨나지 않고 옷을 사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생각해 내도록 뇌에 명령을 내리지만 뇌는 괜찮은 결과를 도출해 내기는커녕 계산의 시작도 하지 못한다. 당겨보던 청바지에서 두 손을 떼고, 일단을 말을 뱉어보기로 한다.
「거지 아니에요. 도둑도 아니고요. 저, 돈 있어요.」
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뭉칫돈을 꺼내 보인다.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직원은 돈을 든 내 손을 제 두 손으로 잡으며 말한다. 순간 나는 빼앗기지 않으려 손에 힘을 주어 돈을 움켜쥔다.
「손님. 맞으셨어요? 그러니까⋯⋯. 누군가가 때린 것 같아 보여서요. 도와드릴게요.」
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 때문에 가게 안의 손님들이 통로 양쪽에서 구경을 하느라 신경이 쓰인다. 내가 직원에게 되묻는다.
「죄송하고, 또 감사한데요⋯⋯. 그런데, 그러니까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저희 매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찰서가 있어요. 같이 가드릴게요. 저희 매장은 곤경에 처한 손님을 모른척하지 않아요.」
「옷만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입을 옷만 있으면 경찰서든 어디든 제가 알아서 갈게요.」
그럼 그렇지. 타인의 호의란 기댈만한 것이 못된다. 게다가, 옷가게 직원의 승진이나 자기만족 따위를 위해 내게 필요도 없는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옅은 회색의 반팔 티셔츠, 잘 늘어나는 청바지, 검붉은 색 바람막이, 양말 없이 신어도 뒤꿈치가 아프지 않을 운동화 한 켤래를 바구니에 담아 계산대로 향한다. 오직 선의로서 도우려 했으나 도움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을 상대하는 얼굴을 한 배꼽입술의 여직원이 옷가지의 바코드를 하나씩 삐익-삐익- 입력한다. 그런 그녀를 나는 이해한다. 아니, 이해한다기보다는 익숙하다는 표현이 더 사실에 가깝다. 간혹, 사전에 전화상담 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녀를 데리고 보육원에 봉사를 하겠다며 찾아오곤 했다. 그들을 설득하고 돌려보내는 일은 보육원 직원들의 몫이었고, 되돌아가는 이들의 표정을 역겹게 지켜보는 건 나와 다른 아이들의 몫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내게 혐오의 감정을 일으켰지만 또렷이 각인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꽤나 오랜만에, 그들의 표정을 바코드를 찍는 직원을 통해 상기한다.
계산을 마쳤는데도 돈이 꽤 남았다. 어림잡아 십만 원 즈음된다. 나는 얼른 옷가지를 들고 피팅룸이라 쓰인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부어오른 뺨만 더 아픈 것 같아 시선을 돌린다. 옷을 다 걸치고서 나는 가운의 주머니에 든 것들을 바람막이 주머니로 옮긴다. 돈과, 주사기. 인생에 꼭 필요한 두 가지다. 나갈 준비가 됐다. 피팅룸을 나가려 문을 열어젖히다 말고 나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잠시 망설인다. 몸을 돌려 벽에 대충 걸어둔 가운을 챙겨 들고 나는 피팅룸 밖으로 나온다. 원래는 돈을 받아야 하지만 괜찮다며 직원이 건네주는 종이봉투에 가운을 접어 넣고 나는 옷가게를 빠져나온다. 횡단보도와 육교 둘 중 하나를 골라 도로를 건너면 고시원이 위치한 골목으로 갈 수 있다. 내 걸음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춘다. 이제 평생 육교를 건널 일은 없다. 허기가 진다. 하지만 식당에 편히 앉아 저녁을 챙겨 먹을 여유가 내게는 없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편의점이 보인다.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게까지 보이는 환한 편의점 문을 어깨로 밀어 열며 들어선다. 입구에 가까운 진열대에서 초콜릿과 견과류로 만들어진 에너지바 다섯 개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간다. 잘생긴 남자 직원에게 목례하며 내가 말을 꺼낸다.
「안녕하세요. 거기, 라이터. 네. 투명한걸로요. 네, 그거. 그리고 뭐더라⋯⋯. 버지니아 슬림 레드 하나 주세요.」
직원은 내 얼굴을 곁눈질하며 상품의 바코드를 하나씩 찍는다. 다행히 도와주겠다느니 쓸데없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아차!
「잠시만요, 하나만 더 갖고 올게요.」
종종걸음으로 음료 냉장고 앞으로 온 나는 이온음료 몇 가지를 눈으로 훑는다. 지금의 나에게는 당분뿐만이 아니라 염분과 수분도 필요하다. 일 리터 정도 돼 보이는 흰색 이온음료 하나를 꺼내 들고 다시 계산대 앞으로 오니 직원이 빨리 앉아서 쉬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가 음료의 바코드를 찍고, 내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넨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급히 사과하고서 값을 치른 물건을 가운이 들어있는 종이봉투에 담는다. 아무래도 음료를 넣을 공간은 없다. 직원이 말한다.
「저기요. 손님.」
「아, 네.」
그가 내 얼굴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다가 계산대에 놓여있는 음료를 향해 눈짓을 하기에 내가 대꾸한다.
「네, 이건 넣을 공간이 없어서 들고 갈 거예요.」
종이봉투를 왼손에 들고 음료를 오른팔에 안아 들자 그 사이에 가려져 있던 주사기가 눈에 들어온다. 급하게 돈을 꺼내느라 실수로 딸려 나온 모양이다. 내가 무안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주사기를 챙기는 동안 편의점 직원은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바라본다. 얼굴에 드러난 불쾌한 기색을 그는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황급히 편의점을 빠져나온 나는 주변을 살펴본다. 안타깝게도 종이봉투를 내려놓을만한 탁상이나 의자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빗물이 마르지 않은 보도블록 위에 내려놓았다가는 봉투의 바닥이 젖어 뜯어지고야 만다. 별 수 없이 나는 음료를 바닥에 내려놓고 에너지바 하나를 뜯어 입에 문다. 주사기만 들키지 않았어도 이렇게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하는 무용한 생각을 하면서 음료를 다시 안아 든다.
내가 사는 고시원은 지하철 역에서 도보로 십오 분 거리이다. 에너지바 하나를 다 먹고, 완만한 경사의 골목을 오르고 내리던 중 주차된 트럭하나가 보이기에 종이봉투를 짐칸에 잠시 올려두고 음료를 두 손으로 들고 마신다. 많이 마실수록 무게도 줄어든다. 갈증이 심하기도 하니 잘 된 일이다. 한 자리에 선채로 음료의 절반 가까이를 마시고 나서야 갈증이 사그라든다. 뚜껑을 닫은 음료를 트럭 짐칸에 올려두고, 먼저 올려둔 종이봉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들려던 참에 나는 한 가지를 깨닫는다. 바닥보다 높다고 해서 비에 젖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는 하늘에서 떨어진다. 트럭의 짐칸은 오히려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된 바닥보다 물기가 더 많다.
종이봉투가 쓸모없어졌기에 나는 그 속에든 물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담배와 라이터, 에너지바 몇 개. 목욕가운을 빼면 실로 보잘것없는 무게와 부피이다. 둥글게 말린 목욕가운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이제는 가벼워진 음료를 오른손에 들고 나는 고시원에 다다른다. 코팅된 고시원 각 층의 평면도가 입구 바로 안쪽 벽에 붙어있고, 수성펜으로 입실과 공실이 표시되어 있다. 지하철에서 멀지 않고 월세가 저렴한 편이라 공실은 많지 않은 편이다. 어째서인지 807호에는 세모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건 처음 보는 표시이다. 입주가 완료된 방은 곱표, 공실은 빈칸이다. 항상 그랬다. 세모라면 아마도 불확실한 상태라는 뜻일 텐데, 주인아주머니께 내방의 세모를 지워줄 수 있는지부터 물어보아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