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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l 21.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3화

희망-4

{ 벗, 미치광이 - 제2권 22화 }에서 이어집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일층에 산다. 승강기가 없는 건물에서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하기에는 고층보다 저층이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예전에 그녀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사전에 협의나 통보 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의 짐을 보관하기에도 일층이 낫다며 투덜거리는 말투로 내게 말했었는데, 이번에 도망친 사람은 나였던 셈이다. 초인종을 누르는데 뻑뻑한 단추에서 딸깍하는 소리만 날 뿐 문 건너에서 딩동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손을 둥글게 말아 쥐고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드는 순간 아주머니가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하마터면 아주머니의 이마에 꿀밤을 때릴 뻔했다. 그녀가 동정 어린 표정에 불만을 섞어 내게 묻는다.

 「어, 807호. 어떻게 된 거야?」

 「다쳐서⋯⋯. 좀 다쳐서요. 입원을 했었어요. 안녕하셨어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나중에 하네⋯⋯.」

급한 사람도, 궁금한 게 더 많은 사람도 나일줄 알았는데 막상 이야기가 길어질 생각을 하니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가 귀찮아진다. 그녀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끼며 말을 잇는다.

 「나는 그, 뭐야. 그래. 좀 섭섭하네? 807호.」

 「죄송해요, 아주머니. 제가 입원한 동안 의식이 없었어가지고 연락도 못 드리고 월세도 넣을 형편이 안 됐어요.」

 「아유, 괜찮아. 그깟 월세야 다음에 몰아서 주면 돼. 내가 욕심부리고 막, 어? 그런 사람은 또 아니잖아.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응. 그래, 기자들이 찾아와서 다 이야기해 줬어. 몹쓸 놈한테 변을 당했다고. 기자들이 그러더라고. 어떻게, 직장은 계속 다녀? 편의점 다닌다고 하던데. 몸은 좀 어떻고?」

허수아비와도 하루종일 이야기 할 위인이다. 얼른 대답부터 하고 내가 궁금한 걸 물어야지.

 「편의점은⋯⋯.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새로 직원을 뽑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도 일자리 구하는 건 문제없어요. 몸은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요. 아주머니 그럼, 제 짐은 안 빼신 거죠?」

 「마침 잘 왔어. 짐 가지고 올라가. 내가 807호 짐을 내리느라 얼마나 무릎이 아팠는지 몰라. 올라갈 때도 손으로 내 무릎을 짚으면서 갔는데, 내려올 땐 짐이 많으니까 아주 연골이 녹는 줄 알았다니까. 방 열쇠는 갖고 있어?」

내가 멋쩍은 얼굴을 하자 그녀가 동을 단다.

 「그래. 내 그럴 줄 알고 열쇠도 복사를 해뒀지. 현금 있어? 원래 만 원씩 받아야 되는데 내가⋯⋯. 오천 원만 줘. 있어봐, 짐 찾아서 올 테니.」

 대형 마트의 로고가 그려진 장바구니 두 개에 들어있는 옷가지와 수건 몇 장이 내 이삿짐이다. 다행히 이사 갈 필요 없이 8층으로 오르기만 하면 된다.


 새로 사입은 옷이 죄다 땀에 젖었다. 이마로부터 흘러드는 땀에 눈이 맵다. 허리를 펴니 잠깐 눈앞이 아득해진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통로에 짐을 내려놓고 나는 조용히 열쇠를 꽂아 돌린다. 펜트하우스의 침대보다 작은 내 방, 내 집의 문이 열린다. 짐을 좁은 방 안에서 풀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부피가 큰 짐을 이대로 보관할 공간 역시나 없다. 짐가방을 하나씩 입구로 당겨놓고 그 속에 든 내용물을 꺼내 방 안 곳곳의 정해진 곳으로 옮긴다. 내 속옷은 위아래 짝이 잘 맞는다. 무늬가 없는 회색의 브라와 팬티를 항상 같은 곳에서 샀기 때문이다. 일을 하거나 중요한 외출이 없으면 브라를 입지 않아서 팬티만큼 많이 사지는 않았다. 겉옷은 두께가 얇은 편이다. 네모 반듯하게 접어 누르면 편의점에서 파는 편육 따위의 진공포장 음식처럼 납작해진다. 나머지는 반바지와 청바지, 반팔 티셔츠가 전부다. 양말은 없다. 공용 세탁기가 자꾸 집어삼키는 통에 양말은 가급적 신지 않게 됐다. 옷은 개켜서 보관하더라도 수건 한두 장은 옷걸이에 걸어 둔다. 마지막으로 드러난 주름의 모양에 맞게 장바구니를 접는다. 탐나는 물건이지만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므로 잘 보관해야 한다.


 짐 정리가 끝났다. 목욕가운은 괜히 챙겨 왔다 싶다. 운을 걸어 둘 만한 공간은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길고 묵직한 가운을 걸 수 있을 만큼 높고 튼튼한 벽과 거기에 박힌 못 있었다면 주인아주머니가 없애버렸을 것이다. 첫째로는 월세를 받기 위해, 두 번째로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가운을 펼쳐 들고 방 안 사면에 이리저리 갖다 대 보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둥글게 말아 간이 매트리스에 올려둔다. 베개로 쓰기에 괜찮을 것 같다. 땀이 잘 마르도록 새 옷을 벗어 걸어 널고, 불을 끄고, 좁고 짧은 매트리스에 바로 눕는다. 내일이 오면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몸을 돌려 눕는다. 세탁소의 하얀 옷걸이에 걸린 새 옷이 어둠을 뚫고 눈에 들어온다.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벌떡하고 저절로 일어난다. 그리고는 바람막이 주머니에 저절로 손이 들어가고 딱딱하고 길쭉한 물건이 무사한지 확인한다. 촉감으로 주사기가 무사함을 알았지만 내 뇌는 그걸로 부족한 모양이다. 이내 내 오른손은 주사기를 꺼내 들고 두 눈은 그것이 손상되지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본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제 됐으니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면 된다. 하지만 내 뇌는 다른 생각이 있는지 방 안을 자꾸만 살핀다. 머리끈을 찾는 모양이다.

 「안돼!」

방금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폐와 목, 혀와 입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지만 나는 해냈다. 옆방에서 벽을 두드린다. 조용하라는 뜻이다. 뇌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 명령에 따른다. 나는 주사기를 책상 위 연필꽂이에 조심스럽게 세워 넣고 다시 매트리스에 눕는다. 고시원에서 침묵보다 중요한 덕목은 없고, 침묵을 깨트리면 통로의 사람들은 고함을 터뜨리며 분노를 표출한다. 그중 몇몇은 누군가가 침묵을 깨트리기를 고대하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한다. 가진 것이 적은 만큼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합판을 사이에 두고 잔뜩 모여서 산다는 건 이런 것이다. 침묵의 덕목을 훌륭히 지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잠에 드는 것이다. 잠결에 소음을 내지 않도록 옆으로 누워 벽에 등을 대고, 나는 잠든다.


 해가 들지 않는 곳에도 아침은 찾아온다. 저마다의 방에서 알람이 작게 울리다 금세 사그라든다. 일곱 시, 부지런한 사람들이 세수를 하려 줄을 서는 시각이다. 나는 세수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모처럼 단잠을 자고 익숙한 곳에서 깨어나니 몸이 가볍다.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로 기지개를 켠다. 누워서 기지개를 켤 수 있다면 좋으련만 뭐, 상관없다. 손을 뻗어 아직 땀이 덜 마른 청바지와 티셔츠를 집어 들고, 옷을 입으며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열쇠와 돈을 챙겨 방을 나선다. 배가 고프다.


 복도를 나서니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인다. 새치기라도 당할까 싶어 경계하는 눈치들이다. 길게 늘어선 줄 한가운데에서 방문을 열고 나와 그 자리에서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보통은 잠결에, 눈앞에 등을 보이는 사람 말고 뒤에도 줄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나 역시나 그런 적이 있다. 사람들은 새치기를 몹시나 싫어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내 앞으로 끼어들기를 벼른다. 정의로운 포식자가 되어 못돼 먹은 악당을 양심의 가책 없이 헐뜯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를 바란다. 그들은 내 어깨에 수건이 없는 걸 보고 나서 경계를 늦추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워한다.


 페인트가 들뜬 난간을 손톱으로 밀어 긁으며 계단을 내려간다. 이따금 녹색의 페인트 조각이 정강이에 붙은 피딱지처럼 난간에서 떨어진다. 한 층 한 층 수를 세면서 내려가는 것보다 이러는 편이 좋다. 어느덧 현관에 다다르자 이른 아침이 실감 난다. 익숙한 걸음으로 대로변 쪽으로 걷는다. 커다란 편의점에 가야 편하게 앉아 먹을 수 있다. 오늘의 계획은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휴대전화를 마련하고, 방귀쟁이 사장을 찾아가 일을 시켜달라고 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이다. 가장 익숙했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이자, 형사가 내게 요구했던 조건이기도 하다.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매콤한 컵라면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나는 수중에 돈이 꽤나 있으므로 컵라면을 고르는 대신 반찬 가짓수가 많은 도시락과 생수 하나를 고른다. 계산대에서 값을 치르고, 전자레인지로 도시락을 데운 뒤, 빈 탁자에 앉아 호화로운 아침 식사를 즐긴다.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에 비할바가 아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도시락에 든 밥과 반찬은 어느 것 하나 맛없는 법이 없다. 모퉁이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텔레비전에서 유명한 여자 연예인이 마약범죄로 조사를 받는다는 뉴스가 나온다. 나는 입안 가득 음식을 씹으며 뉴스를 본다.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병원치료와 교도소 수감이력도 있는데 또다시 적발되었다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마약을 투약한 동료 연예인들이 있다고, 마이크를 든 기자가 말한다. 씹는 속도가 느려지고 입맛이 떨어진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뉴스일 뿐이다. 신경 쓰지 말고 식사를 마저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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