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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l 28.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4화

주인공-1

{ 벗, 미치광이 - 제2권 23화 }에서 이어집니다.


 입원한 기간 동안 배가 줄었는지, 고작 편의점 도시락 하나를 반이나 남겼다. 아까운 마음은 들지만 남은 도시락을 들고 고시원으로 돌아가 여덟 층을 걸어올라 공용 냉장고에 이름을 써서 보관하고 싶을 만큼은 아니다. 편의점 직원이 청소하기 편리하도록 음식을 음식물쓰레기통에 버리고,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플라스틱 용기는 일반쓰레기통에 버린다.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던진다. 화면 모퉁이의 시계가 일곱 시 반을 가리킨다. 아침식사를 마친 나는 편의점 문을 나서자마자 가까운 골목으로 숨어들고 전봇대 근처에서 담배를 꺼내문다. 지금 01번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 여덟 시 반 즈음에 방귀쟁이 사장의 편의점에 도착한다. 여유가 있다. 배를 채웠으니 머리를 비울 차례다. 담뱃불을 붙이며 폐를 연기로 채운다. 사장을 만나 무슨 말을 할지는 버스에 앉아서 생각해 볼 일이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장이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고 야간 근무를 직접 하고 있기를 바라라는 것 정도밖에 없다. 날씨가 습해 겨드랑이와 가랑이가 미끈거리지만,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짙고 묵직해서 좋다. 이런 날은 일부러 한 모금 한 모금을 길게 당겨 마시고 입술을 모아 느긋하게, 멀리 뿜어보게 된다. 하릴없이 눈썹을 찌푸리며 어른이 된 기분을 내보다가 괜스레 혼자 무안해서 물이 고인 업소용 토마토케첩통에 꽁초를 버린다.


 두 달 전까지, 평범하게 출근하던 때에는 지금보다 한 시간 정도 늦은 시각에 버스를 탔다. 오늘처럼 이른 시각에 버스를 타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01번 마을버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정류장에 선다. 버스의 문이 열리자 이미 승객으로 가득 찬 모습에 벌써부터 갑갑해진다. 미리 꺼내 손에 움켜쥐고 있던 돈을 전통에 넣고 그 옆의 세로 기둥을 잡는 순간 버스는 뒤로 밀리다가 이내 앞으로 나아간다. 앞뒤로 휘청이는 사람들의 짜증 섞인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팔을 들어 손잡이를 잡고 선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로 창문이 보이지만, 사람들의 입김이 서려 바깥을 구경할 수는 없다. 직장으로 학교로 집으로, 혹은 나처럼 편의점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숨을 마시고 뱉으며 버스 안에 습도를 높인다.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로 보이는 창문 쪽 좌석에 앉은 수염 듬성한 노인이 손바닥으로 창문에 서린 김을 닦아내자 드디어 내 시야게 바깥세상이 보인다. 고마운 일이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역시나 사람들로 가득 찬 다른 버스의 겉면에 붙은 성형외과의 광고, 다른 자동차의 바퀴 따위뿐이다. 땀에 젖은 부위가 아주 조금씩 넓어지는 모양이 독특해서였을까, 보기 싫은데도 자꾸만 남자의 겨드랑이로 향하던 시선을 창밖으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대학병원 앞, 회차 지점에서 세 정거장 전인 정류장에서 내릴 때까지 내내 선채로 왔다. 중간즈음 왔을 때 운 좋게 내가 가로막고 있던 자리의 남자가 일어섰지만 그가 한 할머니에게 자리를 권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진작에 일어났어야지, 젊은이가-하는 볼맨소리로 감사를 대신했다. 그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비냄새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뒷목을 스친다. 아주 조금 이를 뿐, 두 달 전으로 시간이 돌아간 것만 같다. 다만 이 병원의 내부를 조금 더 잘 알게 됐고, 탈출한 지 사흘 만에 마주하자니 마음이 불편할 뿐이다. 병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과거 익숙해 마지않았던 출근길을 걷는다. 병원의 정문으로 들어가 후문으로 나가면 더 빠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서두를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저 병원으로 다시 들어갈 일은 없어야 한다고 직감이 속삭인다. 멋들어진 지하 카페로 향하는 계단입구를 지나치고,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이 서로를 모르는 척하며 담배를 피우는 돌담을 지나, 장례식장 주차장 입구를 지나고, 초등학교의 정문을 지나 더없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편의점에 다다른다. 편의점과 초등학교의 담장 사이로 난 달동네로 향하는 골목길을 보니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오르면서 등골이 오싹해진다. 언제나 편의점 입구에 다다를 즈음 그랬듯 담배를 입에 문다. 하지만 등교하는 꼬마들 앞에서 못 보일 짓인 것 같아 입에 문 담배를 어쩔 수 없이 손에 들고 골목길 쪽으로 걸음 한다. 편의점 앞의 파라솔과 탁상을 지나치고, 초등학교 담장과 마주한 출입구를 지나 손에 든 담배를 다시 입에 문다. 나는 담장을 마주한 채 골목길 안쪽을 훑어보고서 담뱃불을 붙인다. 머잖아 사라질 달동네에서 등교하는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두 개비째 담배를 다 태워갈 즈음이 되니 슬슬 다리가 아프다. 중지와 엄지로  담대를 꼬집어 쥐고 검지를 튕겨 불씨를 떨어뜨린다. 꽁초 두 개를 파라솔 아래의 깡통에 던져 넣는다. 제 더는 망설일 것 없이 편의점을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익숙한 풍경소리를 울리며 편의점으로 들어선다. 아쉽게도 사장은 없고,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직원이 졸린 눈으로 일어서 손님을 맞이한다. 내가 나서서 알은체 할 필요는 없다. 뭔가를 살 생각은 없었지만 기왕에 들어왔고, 바보처럼 돌아 나서기에도 우습다. 직원을 뒤로하고 진열대를 살펴본다. 모든 상품이 가지런하게 줄 맞춰 놓여있고, 바닥은 밟기가 미안할 만큼 깨끗하게 닦여있다. 퇴근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배가 부른 터라 내가 둘러볼만한 곳은 생필품 진열대뿐이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선명하게 기억나기 시작하더니 이곳에서 직원으로 일할 때의 소소한 일상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역시나 나도 모르게 집어든 까만색 굵은 머리끈은 내게서 웃음기를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다. 언젠가 쓰겠지, 조만간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쓸 일이 없겠지-하면서도 나는 손에 든 물건을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계산을 치르며 계산대 모니터를 통해 시계를 보니 여덟 시 사십오 분이다.


 머리끈을 포장째 청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골목길 쪽 문을 밀어 열고 나서는데, 밖에서 건장한 남자 둘이 뒷걸음으로 길을 트며 양보한다. 둘 중에서도 유독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는 땀으로 젖은 뒷목을 손으로 쓸어 닦는 와중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데, 그 모습이 만화에 나오는 곰처럼 귀엽다. 예의 곰 같은 남자와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도 상당히 건장한 체격인데, 그는 네모반듯한 가방을 소중한 듯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있다. 그의 턱에 닿아있는 손잡이가 보여서 가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손잡이만 빼고 보면 가방이라기보다는 상자에 가까워 보인다. 내가 문이 닫히지 않게 잡아주자 곰 같은 남자와 상자 같은 가방을 든 남자가 일제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사장이 출근하려면 족히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므로, 나는 파라솔 아래의 플라스틱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옆구리를 휘어 주머니에 든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고, 플라스틱 탁상 위에 던지듯 올려둔다. 의자에 등을 기대니 차가운 느낌에 기분이 좋다.


 멍하니 앉아서 사장을 기다리기가 슬슬 지겨워진다. 그러고 보니 두 남자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지 십 분 정도 된 것 같은데도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대로 쪽 문으로 나간 걸까. 따분하다 보니 별것들이 다 궁금해진다. 별생각 없이, 나는 탁상에 올려둔 담뱃갑에 손을 뻗어 한 개비를 꺼낸 다음 필터가 아래로 향하도록 세로로 들고 탁상에 톡톡 두드리며 담뱃잎을 다진다. 담뱃잎이 궐련종이 끝에서 충분히 아래로 눌려 내려가고, 나는 담뱃불을 붙인다. 첫 반모금은 뱉고, 그다음은 깊게 들이마시고 내뿜기 전에 잠시 멈춘다. 근심도 멈춘다.

 「아이고, 유지 학생. 이렇게 보니 좋네, 좋아.

사장의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대꾸를 하려는데 연기를 잘못 뱉어 따가운 기침이 연거푸 터져 나온다. 목구멍과 콧등이 찔린 듯이 아프고 눈물이 콧물과 섞여 콧구멍으로 흘러나온다.

 「격하게 반겨주니 고맙구먼. 콧구멍으로 비눗방울도 만들고 말이야.

태어나 처음 담배를 피우는 사람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서 노인은 자신의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두 모금밖에 태우지 않은 담배를 버릴 수가 없어서, 탁상의 구멍과 그곳을 관통하는 파라솔 막대 틈에 꽂아두고 노인을 뒤따라 편의점에 들어간다. 풍경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내가 말을 꺼낸다.

 「사장님, 저 휴지 좀 주세요. 휴지요.


 뜻밖이게도 한참 전에 들어갔던 곰처럼 생긴 남자가 질이 좋아 보이는 휴지를 내게 건넨다.

 「자, 이걸 쓰세요. 더 드릴까요? 이게 뭐든지 참 잘 닦여요, 응.

그의 목소리는 동굴 속에서 곰이 말하듯이 울린다.

 「괜찮⋯⋯. 아니, 고맙습니다.

콧물을 조용히 풀고 나니 눈물과 눈곱을 훔칠 휴지가 부족하다. 하지만 괜찮다. 뭐랄까, 낯선 이에게 더 많은 휴지를 달라고 말하기가 꺼려진다. 애초에 내가 잘 분배해서 사용했어야 했다. 나는 두 손의 약지를 구부려 눈곱 긁어 떼고, 눈물을 문질러 지운다. 휴지로 손톱에 낀 눈곱을 떼면서 다들 뭘 하고 있는지 둘러본다. 눈앞의 광경이 생소하다. 잠이 깬 직원은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새까매진 손가락을 휴지로 닦아내고 있고, 방귀쟁이 사장은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치고 서류양식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곰 같은 남자는 노인에게 거기에 말고 여기에 쓰셔야 해요-라는 식으로 작성을 거들고 있고, 그의 동료는 계산대에 니은 모양으로 열어젖힌 가방에 서류 몇 장을 정리해 넣고 있다. 가방 옆에 보이는 납작한 통은 아마도 편의점의 야간근무자의 손에 묻은 인주 따위인 모양이다. 이 둘은 거의 아마도 확실히, 경찰이다. 식은땀이 흐른다.

 「잘 썼습니다. 아참, 아참, 내 아까운 담배⋯⋯.

괜한 짓일지도 모를 혼잣말을 뱉으며 나는 손에 든 휴지를 움켜쥐고 곰 같은 남자에게 목례를 한 다음 바로 뒤로 돌아 문을 연다. 풍경이 울리고, 습한 바깥바람이 들고, 깊은 동굴 속에서 곰이 말을 건다.

 「저기 잠시만요. 나가시기 전에, 응. 실례지만, 근처에 사시나요?

태연하게 말하면 된다. 거짓말을 하면 들킬 수 있다. 사실 중에 필요한 것만 말하면 된다.

 「아니에요. 저는 노량진에 살아요. 고시원에요.

 「여기는 어떤 일로 오셨어요?

사실, 사실, 오직 사실을 말해야 한다.

 「아, 진짜⋯⋯. 휴지 주신건 고마운데요, 저 두 모금밖에 안 피운 담배를 파라솔에 끼워 뒀단 말이에요.」

시간을 벌고, 생각하자. 사실들로.

 「아이 참,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이것도 병이에요, 직업병. 죄송합니다. 얼른 마저 태우세요. 응. 저도 마침 한 대 피우고 싶던 차예요.

곰이 나를 따라 편의점을 나선다. 그의 어깨너머로 사장과 눈이 마주치지만 그는 안경렌즈 위로 두 눈을 한 번 깜빡이고서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던질 뿐이다. 문이 닫히고, 건너편에서 풍경이 작게 울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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