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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May 26.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5화

차질-4

{ 벗, 미치광이 - 제2권 14화 }에서 이어집니다.


 이제 와서 불현듯 연홍에게 예의를 갖출 마음이라도 생긴 것인지, 배려 없이 토해낸 말을 주어 담고 싶기라도 한 것인지, 태호는 그녀가 달음질한 침실 쪽을 한참 말없이 쳐다보다가 담배연기가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고백하는 어투로 대답한다.

 「이놈이 가지고 있던 게 진짜 마약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확인을 해야만 했어.

나의 공감 여부에 따라 이어갈 말의 내용이 바뀌기라도 하는 듯, 태호는 말을 멈춘 채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내가 어리석었어. 사실은, 내 생각도 너하고 별 차이가 없었거든. 나도 연홍이가 예전에 강제로 마약을 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중독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 꽤, 아니, 그렇잖아. 실제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마약을 하지 않고 살기도 했으니까 말이지. 그냥, 이 자식이 갖고 있는 약이 진짜 마약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연홍이도 그렇게 말했고. 그런데 표정이⋯⋯. 얘 표정이, 아니, 눈동자부터가 이상해지는 거야.」


 뻔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딱하다. 그의 말에, 내가 씻던 중에 일어난 일들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연홍이는 약 앞에서 이성을 잃었고, 태호는 그런 그녀를 말렸다. 마약 앞에서 미쳐버린 연인을 말리는 일은 심성이 고운 불사조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미흡했던 계획을 수정하여 마약의 진위 확인을 연홍이 대신 형사가 직접 하도록 시켜야만 했으며, 형사는 조금의 남김도 없이 모조리 들이켜야만 했다. 태호는 한 꼬집의 약이라도 얻어내려 달려드는 연홍을 막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사에게 발길질을 해대며 약을 들이켜라고 악을 썼다.


 나는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태우고서는 눅진한 재떨이에 비벼 끄고 세 사람을 다시금 하나씩 살펴본다. 암울한 상황이야 내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들 세 사람 중에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태호뿐이다. 마약이라고는 평생 본 적도 없는 내가 약에 취한 채로 피를 흘리며 구석에 처박혀있는 형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하며, 그 약에 홀리듯 끌리지만 태호에 의해 저지당한 연홍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리는 더욱이 없다. 강제로 약에 취한 채 여러 차례 강간을 당했고, 그로 인해 임신을 하고 딸을 낳았으며, 최근에는 그 딸을 잃기까지 한 그녀가 여전히 마약을 탐하고 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사실이다. 엄마부터 딸까지 삼대에 걸쳐 이어진 불행의 바로 한가운데에 마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금까지 마약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하마터면 나로 하여금 그녀를 피해자라는 틀 밖으로 꺼내보고 싶도록 만들 뻔했다. 또한 나는 인간 영혼의 나약함을 생각하며 연홍이를 몰래 비웃었는데, 결국에는 그런 생각을 품은 스스로를 책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얀색 고운 가루에 불과한 화학성분이 인간의 영혼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영혼이 한 줌도 안 되는 가루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라면, 실존여하와는 무관하게 영혼이라는 것은 사실 더없이 하찮은 것이 된다. 하지만 작은 불씨 하나가 큰 산을 잿더미로 만드는 경우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때문에 나는 인간 영혼의 나약함도 연홍이도 조롱할 수는 없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연홍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똑같다.


 나는 다시 연홍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끼지만 그러는 만큼 태호는 내게서 멀어진다. 그의 생각도 나와 같은지, 내가 상념에 빠져있는 내내 그의 시선은 침대에 엎드린 채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연홍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어야 한다.

 「그래⋯⋯. 오빠 말대로 그게⋯⋯ 진짜 마약인 건 확실하게 확인했다고 쳐. 아니, 확실해. 그런데, 진짜건 가짜건 이런 나쁜 물건은 아무도 손 못 대게 버리는 게 맞지⋯⋯. 뭣하러 확인을 한 거야? 왜 이 형사한테 시킨 거야? 이 사람이 진짜 형사이기는 한 거야?」

나의 말은 질문으로 끝나야 했다. 그는 줄곧 나를 쳐다보지 않다가 내가 세 번째 질문을 쏟아낼 때에서야 비로소 나를 바라본다. 그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하고서 대답한다.

 「형사라면 진짜 마약을 들고 다니지는 않겠지. 들고 다니더라도 가짜일 테고 말이야. 이 자식은 약쟁이야. 형사는 개뿔, 그냥 쓰레기야.

역시 불사조는 똑똑하다. 나는 표정으로 호응하며 대꾸한다.

 「그러네. 나쁜 놈. 밟아주길 잘했어. 그렇지?

 「그래, 잘했어. 아주 잘했어, 편의점 학생. 어떻게, 발바닥에 피가 많이 묻지는 않았어?

 「몰라, 빨간색 카펫에 비벼서 대충 지웠어. 또 씻지 뭐. 오빠는 연홍이나 신경 써, 나한테 말고.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이 나온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야 착한 남자지.

 「그런데 오빠, 이 사람이 나쁜 놈인 건 이제 확실하잖아, 그렇지?

 「백 퍼센트 확실하지.

 「혹시라도 나쁜 형사는 아니겠지?


 정적이 흐른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다가 의도치 않게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진 담뱃갑을 얼른 주워야 할지, 나의 것이 아닌 양 모른 척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마주 앉은 오빠의 표정을 헤아리던 어릴 적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내가 짝사랑했던 그 오빠는 인자한 얼굴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상기된 얼굴로 담배를 주워 가방에 넣었다. 그 오빠의 오랜 설득 끝에 나는 몸을 허락했고, 그 후로 그는 헤어질 때까지 오직 그 이유로만 나를 불렀다. 담뱃갑을 떨어뜨리지 않았었다면, 나는 그 오빠를 여전히 미지의 사랑스러움을 간직한 채로 기억할 수 있을 터였다. 원래, 저지르고 나서야 실수인 줄을 아는 법이다. 후회가 되는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렇게 태호에게 한 말을 나는 지금 후회하는 중이다. 내가 입술을 한쪽으로 모아 비죽이는 동안 그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꺼낸다.

 「하긴. 경찰이라고 다 착할 거라 생각할 수는 없지. 만약에, 혹시라도 이 인간이 정말 저 말대로 형사라면 큰일이잖아. 경찰공무원을 감금해서 강제로 마약을 먹였으니까.

겁에 질리지는 않았지만, 뜻밖의 문제에 당면한 태호의 얼굴에는 근심이 드리운다. 가만히 멈춰 선 채로 그는 눈동자로 아래를 비스듬히 보다가, 시 옆으로 창문을 응시하다가, 또 이마 가운데에 세모난 주름을 세웠다가를 반복한다. 내가 괜한 말을 한 것일 뿐이고,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말한다.

 「죽일까? 죽여야겠지?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딱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도 않거니와 나보다는 훨씬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그의 생각에 이견을 내고 싶지도 않으므로, 나는 예의상 대답을 한다.

 「응⋯⋯.」


 「이 등신들이 뭐라는 거야 정말! 못 봐주겠네. 미친 거 아니야?」

어느샌가 근처까지 걸어온 연홍이 새된 소리로 외친다. 태호는 내가 그러고 있듯 말없이 연홍이를 돌아볼 뿐이다. 연홍의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하지만 빠르게 걸어오는 그녀의 풍성한 머리칼은 어깨와 엇박자로 출렁이며 나와 태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멸시하는 눈빛을 우리 둘에게 흘리고는 몸을 틀어 조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있던 탁자에 팔을 짚고 의자를 당겨 앉는다. 그녀는 두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머리를 숙인 채 양손으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혼자서 욕 섞인 말을 뇌까리더니, 갑작스럽고도 조용하게 고개를 든다.

 「오빠. 저 인간 지갑에 공무원증 같은 건 없다고 했지?」

그녀의 말에 태호는 창틀에 올려져 있던 남자의 소지품들을 들어다 연홍이 자리한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한다.

 「여러 번 뒤져봤는데, 딱히 특별한 건 없어. 유일하게 특별했던 건 하나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들이키게 만들었고. 수갑이라던가 총 같은 물건도 전혀 없어. 그렇지만, 피떡이 된 저 자식이 어떤 놈인지 신경이 쓰이는 건 여전한 사실이야. 그냥 평범한 양아치 약쟁이가 뜻대로 되지를 않으니까 경찰이라고 허세를 떤 건지, 아니면 평범한 마약반 형사가 잠복을 하다가 재수 없게 우리한테 걸린 건지, 그도 아니면 질 나쁜 약쟁이 형사가 나쁜 짓을 하려다가 우리한테 걸린 건지. 마지막의 경우는 방금 유지가 가능성을 재기했는데, 이게 말이야⋯⋯.

연홍은 태호의 걱정에 공감하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에 놓인 물건을 고운 손으로 만지작 거린다. 태호는 그녀의 손동작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며 말을 멈추었지만 금방 하던 말을 마저 한다.

 「가능성이 높은지는 모르겠다만, 만약 그럴 경우에는 일이 심각해져. 우린 불과 몇 시간 전에 사람을 죽였어. 그런데 형사를 잡아다가 이런 짓을 한 게 사실이라면⋯⋯. 감당이 안된다고. 그렇게 되면 정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안 그래?」

연홍은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든다.

 「아까는 그렇게 서로 이름 말하지 말라고 난리더만, 오빠 방금 얘 이름 말한 건 모르지? 등신, 등신 진짜. 참, 그럼 그렇지. 암호가 있네. 오빠, 저놈한테 암호 좀 물어봐.」


 고개를 숙인 채 콧날 끝에서 끈적한 핏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남자의 머리채를 태호가 잡아들자 하얗게 질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남자는 두 눈을 뜨고 있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오싹하게 소름이 돋는다. 이상할 것은 없지만 나는 그가 두 눈을 뜨고 있으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다.

 「핸드폰. 비밀번호가 뭔지 말해.」

태호의 말에 남자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비밀⋯번호⋯?」

 「그래. 비밀번호. 빨리 말해. 더 얻어맞기 전에.」

남자는 부어오른 볼과 찢어진 입술이 따가운지 연신 얼굴을 찌푸렸다가 풀기를 반복하며 느리게 대답한다.

 「아이씨⋯⋯. 당신들 지금 내가 경찰인지 확인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뭘⋯⋯. 뭘 그렇게 복잡하게 굴어.」

남자는 대답을 하면서 중간중간 히죽거리기도, 기침을 하기도, 우리 셋을 노려보기도 한다. 그가 말을 잇는다.

 「하나만 물읍시다. 당신들, 내가 경찰이면 어쩔 건데? 아니면 어쩔 거고?」

그의 질문에 태호는 나와 연홍이를 번갈아 바라본 뒤 잡은 머리채에서 손을 떼고 남자 앞에 쪼그려 앉으며 대답한다.

 「그건 당신이 뭔지 알고 난 다음에 결정할 거야.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하게 대답해 줄 수는 있어. 비밀번호를 말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여기 목욕가운 입은 여자애가 아니라 내가 직접 때려주지.」

태호의 말에 남자는 콧방귀를 치며 키득거리더니 이내 눈물을 흘린다. 눈물이 피와 콧물에 섞여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걸쭉하게 늘어난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애처로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휴지를 가져와 남자의 얼굴을 닦아준다. 우스운 일이다. 그를 딱하게 여기던 마음은 내 손등에 그의 피와 콧물이 닿는 순간 역겨운 분노로 변한다. 나는 더러워진 휴지를 털어내듯 던져버린다. 남자가 턱을 풀듯 또다시 얼굴을 찌푸렸다가 풀기를 반복하더니 말을 꺼낸다.

 「저기요⋯⋯. 선생님들. 제가 경찰이라고 하면 살려줄 거예요?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경찰이 아니라고 하면 살려줄 거예요? 아니, 제가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요⋯⋯. 몇 시간 전에도 사람을 죽이셨다면서요⋯⋯. 시간도 늦었고, 그 다들 피곤하실 텐데⋯⋯. 저까지 죽이시려 너무 힘들지 않으시겠어요? 저 그냥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는 애원하면서도 히죽거리기를 반복하고, 보는 사람 불편하게 얼굴의 근육을 씰룩거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연홍이 역시 나와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로 향해 걷는다. 그녀가 일어서면서 의자 다리가 뒤로 끌리는 소리를 들은 태호는 무릎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일어서 자리를 옆으로 한 걸음 옮긴다. 이렇게 태호는 이따금씩 눈치가 빠르다. 연홍은 뒷짐을 진채로 태호가 쪼그려 앉아있던 자리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남자를 훑듯이 살펴본 뒤 말을 꺼낸다.

 「아저씨. 나는 다 알아. 아저씨가 아주 나쁜 사람인 거, 다 알아. 이 정도 약을 혼자서 다 빨아놓고 이렇게 멀쩡하다⋯⋯. 말 다했지 뭘. 반반한 얼굴 상하게 한건 미안해. 그렇지만 아저씨가 내 친구 속상하게 했잖아. 이 정도는 아저씨가 이해해야지. 그런데 어쨌거나 그건 아저씨랑 내 친구 둘 사이의 문제고, 내 호텔방에 지저분하게 만든 원흉은 아저씨잖아? 그럼 나한테도 더 혼이 나야지. 나는 있잖아, 아저씨를 죽이고 싶어. 살려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들어. 우리가 사람을 죽였다는 걸 들었잖아. 아저씨, 그거 알아? 우리⋯⋯. 사람 처음 죽인 거 아니야. 여기 내 남자친구, 듬직하지? 힘도 아주 세다고. 남자 중에 남자야.」

남자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운다. 여전히 씰룩거리며 히죽거리고 있지만 분명히, 그는 연홍이 다가서기 전보다 확연히 다르게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


 「살려주세요⋯⋯.」

그가 침착하게 말한다. 간식을 몰래 먹은 강아지가 주인을 바라보듯 순진한 척하는 얼굴로 그가 애원한다.

 「비밀번호, 아저씨. 비밀번호를 말해.」

연홍이 조용하게 다그치고, 그는 입술을 안으로 말며 망설인다. 그렇게, 곁에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는 태호를 제외한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멈춘듯한 시간이 흐른다.

 「됐다, 됐어.」 연홍이 말한다. 「오빠, 지금은 말고⋯⋯. 내일 여행가방 큰 걸로 하나 사와. 그때 죽이자. 어차피 죽일 거, 이 아저씨가 경찰인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체념한 듯이 말을 뱉고 숙인 고개를 들자 갑자기 남자는 발버둥을 치며 욕지거리를 쏟아낸다.

 「마음대로 해! 이런 미⋯미친 연놈들아! 내가 재수가 옴 붙어서 아주 별 미친 꼴을 다 당하지. 허세 부리지 마, 사람 죽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도 끝장인 거야, 알아? 내가 만만하지? 어차피 너희들은 어쩔 줄 몰라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죽일 거였으면 진작에 죽였겠지. 허풍을 떨 거면 제대로 해 이 미친 연놈들아! 여기요! 사람 살려요! 여기⋯⋯.」

태호가 담배를 입 가장자리로 고쳐 물고 남자의 배에 주먹을 내리꽂자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남자의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넓은 펜트하우스의 공기를 채운다.

 「목욕수건을 물에 적셔서 가져와. 얼른.」

태호가 남자를 쏘아보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서 말하자, 연홍이는 나를 바라보며 턱짓을 한다. 남자는 그런 모양을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진정으로 자신의 죽음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영⋯⋯.

남자가 두 눈을 감은 채로 뇌까린다.

 「영, 팔, 오, 이⋯⋯. 비밀번호예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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