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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May 12.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3화

차질-2

{ 벗, 미치광이 - 제2권 12화 }에서 이어집니다.


 제아무리 여기가 팬트하우스라고는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꽃잎과 양초로 꾸며진 욕실과는 다르다. 바닥과 벽에 붙어있지 않고 네 개의 다리가 달린 커다란 욕조는 천장에 박힌 백색 전등의 빛을 눈이 시리도록 창백하게 반사하고 있다. 꽤 무거워 보이는데, 욕조를 이리저리 옮길 필요라도 있는 걸까-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온수를 틀어 욕조에 물을 틀고 욕실 안을 살펴본다. 욕조 한 편의 작은 간이 탁자 위에는 연갈색 종이로 포장된 물건들이 정갈하게 비치되어 있다. 커다란 거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욕조의 맞은편 벽에는 허리 높이의 두꺼운 선반이 가로로 길게 뻗어있고, 선반의 가운데에는 매립형이 아닌 커다란 접시처럼 생긴 세면대가 올려져 있다. 세면대의 오른쪽에는 새하얗고 두꺼운 수건이 동그랗게 말려서 담긴 바구니가 놓여있고, 바구니의 옆에는 네모반듯하게 개어진 목욕 가운 세 장이 계단 모양으로 쌓여있다. 널찍하고 밝은 이 욕실은 구석구석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지만 뭔가가 빠져있다. 바닥에는 빨래 바구니가 없고, 세면대 옆에는 세숫비누는커녕 치약이나 칫솔도 없다. 그러고 보니 욕조 옆 간이 탁자에도 샴푸통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입고 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두면 나중에 어딘가에서 쉬고 있던 시종이 와서 가져가고, 역시나 어딘가에 놓여있을 종을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면 또 다른 시종이 치약이 발린 칫솔을 물컵과 함께 들고 올 것만 같다. 나는 내 고시원 보다 넓은 욕실을 구경을 마치고 주워 입은 옷을 벗기로 한다. 양손을 교차해 허리춤을 잡고 커다란 회색 후드티를 뒤집어 벗다가 별생각 없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시선이 고정된다.


 거울 속의 여자는 지독하게 더럽고, 초라하고, 야위었다. 배수로 구석에서 반쯤 말라죽어가는 물이끼 같은 머리칼에, 정체 모를 얼룩과 핏자국이 묻은 얼굴, 붉게 충혈된 두 개의 흐리멍덩한 눈알과 그 아래에서 이따금씩 경련하는 근육은 내게 몹시나 낯선 모습을 하고 있다. 눈을 감으면 사라지지만 다시 눈을 뜰 때면 어김없이 지독하게 추한 여자가 다시 내 앞에 선다. 하필이면 이런 사람을 빛의 속도로 바쁘게 반사해야만 하는 거울이 딱하다. 나는 팔을 소매에서 꺼내지 않은 채로 두 팔을 내려 몸을 가린다. 거울 속 여자가 한숨을 쉰다. 분명 거울 속의 여자는 분명 나일수밖에 없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너무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선 탓일까. 육교에서 추락할 때의 충격이 영향을 끼친 걸까.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지구의 중력을 누워서만 받아서일까. 혹은 오늘의 탈출과 그 직후에 있었던 강간미수범과의 사투 때문이었을까.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어진 이유를 찾으려 나는 머릿속 칠판에 문장을 쓰고 취소선으로 긋기를 반복하다가,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는 취소선 긋기를 멈춘다. 뇌를 다친 것은 아닐까-하는, 내가 미친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칠판에서 더욱 선명해지고, 나는 감히 취소선을 긋지 못한다. 확인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의 힘으로 무작위의 선택을 할 수 있다. 동전을 던지거나, 주사위를 던지거나, 머리칼을 쥐어 뽑아볼 수도 있다. 이밖에도 나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무작위의 선택을 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사람이 머릿속 생각만으로 무작위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의지, 인식, 기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무작위의 선택을 머릿속 생각만으로도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해내야만 한다. 왼쪽, 혹은 오른쪽. 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릴 것이다. 나 스스로도 모르게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릴지 정해야만 한다. 혹은, 방향의 정함 없이 내 고개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해야만 한다. 머릿속으로 왼쪽을 생각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릴까?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거울 속의 여자를 속일 수 없다. 그녀를 속이기 위해서는 혼란을 야기해야만 한다. 나 스스로도 속을 만큼 정신없도록 혼란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두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을 반복해서 읊는다. 조금씩 읊는 속도가 빨라진다. 머릿속의 말의 속도가 더 이상 빨라질 수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를 반복한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머릿속에서 말하기를 준비하는 방향과 입에서 뱉어져 나오는 방향 사이에 조금씩 시간차가 생긴다. 이때다.

 「⋯⋯. 왼쪽.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동시에 나는 감았던 두 눈을 부릅뜬다. 거울 속 여자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려다가 거울 밖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 곁눈질로 보고서는 얼른 다시 정면을 향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태연히 내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행히 나는 미치지 않았다.


 후드티를 마저 벗어 세면대 왼쪽 선반의 빈자리에 대충 말아 던져두고, 나는 살이 빠져 더욱 작아진 거울 속 가슴을 노려본다. 더 작아질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 그 한계를 돌파한다. 이렇게나 작아졌는데도 어째서 양쪽의 크기는 여전히 다른지, 옹졸하고 이기적인 한 쌍이다. 크기에 있어 합의점을 찾되, 가급적이면 더 작은 쪽이 분발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거울 속 그녀도 내 생각에 동의하는 눈치다.


 습한 공기 탓에 에나멜 바지는 두 다리에 찰싹 붙어 피부와 하나라도 된 듯하다. 설거지를 마치고 한 치수 작은 고무장갑을 벗듯이 위에서부터 뒤집어 내리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두 발로 일어선채로는 아무래도 무리다. 뾰족한 수 없이 나는 욕실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등에 닿는 까슬한 문은 차고, 엉덩이에 닿는 딱딱한 바닥은 더욱 차다. 허리춤을 뒤집어 골반아래까지 내린 다음 바지 밑단을 잡아당긴다. 헌 옷수거함에 버려진 이유를 알 것 같다. 두 번 다시 입지 않을 옷이기에 찢듯이 벗어버리고 싶지만, 에나멜 소재는 손톱으로 눌러 잡아당겨도 뜯어지기는커녕 늘어날 뿐이다. 인내심을 갖고 세심하게 조금씩 벗겨야 한다. 마침내 무릎까지 바지가 내려오고, 나는 한쪽 발을 들어 바지의 가랑이를 아래로 밀어내는 요령을 터득한다. 바지가 양쪽 발목까지 내려오고, 나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다시 두 발로 일어선다. 신발을 벗어던지듯 지긋지긋한 바지에서 내 몸이 자유로워진다. 나는 발 끝에 걸린 바지를 손으로 낚아채고, 역시나 대충 말아서 선반의 왼쪽으로 던진다. 따뜻한 욕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욕조는 체격이 큰 남자가 편안하게 온몸을 담글 수 있을 만큼 높고, 넓고, 그리고 길다. 욕조 작은 계단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대로 나는 두 손으로 욕조를 짚고, 내 체중이 욕조의 한쪽으로 실려 자칫 넘어뜨리지 않을까 신경 쓰며 세심하게 왼발을 들어 아직 물이 충분히 차지 않은 욕조 안으로 넣는다. 따뜻한 온기가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를 지나고 이내 발목을 간지럽힌다. 왼발이 욕조 바닥에 닿고, 는 몸을 숙여 욕조의 건너편으로 손을 고쳐 짚으며 오른발을 들어 물속에 담근다. 몸을 틀어 뭉게뭉게 김을 흩트리며 온수를 뿜어내는 수도꼭지 쪽으로 다가선 나는 팔을 벌려 욕조의 양쪽 난간을 잡으며 천천히 자리에 앉는다. 엉덩이 살에 물이 닿는 순간은 유독 뜨겁게 느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온몸을 늘어뜨리듯 눕는다. 내 몸이 담기자 그만큼 물도 차올라, 배꼽이 잠기고도 남는다. 물은 계속해서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고, 나는 다리를 쭉 펴 발바닥을 욕조 안쪽 벽에 댄 채로 눈을 감는다. 다리가 달린 욕조는 훌륭한 물건이다.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새 나는 온몸으로 편안함을 느끼며 피보다 뜨거운 물에 나른하게 녹아든다.


 문밖 거실의 팔다리가 묶인 남자가 형사이건 아니건, 그 문제는 나의 듬직한 불사조와 예쁜 연홍이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뜨거운 물에 녹았던 내가 다시 하나로 뭉쳐지면 내 몸은 깨끗하고 보송보송해지겠지. 새로 태어난 내가 욕실문을 열고 나가면, 어떤 식으로든지 문제는 다 해결돼 있고 걱정이라고는 없이 큰 침대와 푹신한 이불속에서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을 놓고 한참을 쉬고 있던 중, 코로 물이 드는 바람에 나는 퍼뜩 두 눈을 뜬다. 바닥에서 떨어져 욕조의 중간 즈음에 둥실 떠올라 있는 두 다리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몸을 바로잡느라 잠깐동안 꽤나 허둥거리지만, 머리가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전에 자세를 바로잡는 데 성공한다. 웃음이 난다. 여전히 웃음기를 띤 얼굴을 하고, 나는 상체를 더욱 일으켜 욕조 밖 간이 탁자에 놓인 물건으로 손을 뻗는다. 입욕제라고 쓰인 물건의 종이 포장을 뜯고, 보기보다 가벼운 비누처럼 생긴 내용물을 들고 다시 물속에 편하게 앉는다. 두 손으로 받쳐든 입욕제는 기름이라도 발린 듯이 미끄럽고, 엄청나게 빠르게 녹아내린다. 언젠가 영상으로 보았던 솜사탕을 깨끗이 씻어 먹으려던 외국 너구리가 떠오르고, 나는 또다시 헤헤-하며 소리 내어 웃는다. 수돗물과 내 몸에서 떨어져 나온 불순한 것들의 비린내가 사라지고, 입욕제의 향기가 거품과 함께 차오른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입욕제 하나를 더 뜯어 욕조 속으로 가져온다. 이번에는 손에 들고 있지 않고 발치 어귀로 대충 던져두고 만다. 알아서 잘 녹을 테니까.


 피로가 사라진 만큼 정신도 맑아진 기분이다. 나는 거품으로 일렁이는 욕조 물속에서 두 다리를 비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두 손으로는 몸의 구석구석을 문지른다. 손으로 콧구멍을 막고 잠수도 해본다. 숨이 찰 즈음에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거품이 묻어 부드러워진 머리칼을 두 손으로 비벼 감는다. 겨드랑이를 한쪽씩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몸을 숙여 가랑이도 문지른다. 아직 소변줄을 뽑아낸 상처가 낫기에는 이른 지, 요도에서 시작한 찌릿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전해진다. 차차 낫겠지. 나는 손을 옮겨 배꼽을 파고, 별로 씻을 것 없는 가슴에게 안부를 전하고, 귓구멍을 후비고, 따끔한 눈 주변을 씻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손으로 코를 막고 무릎을 굽힌 나는 둥글게 몸을 말아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름 모를 엄마의 뱃속에서도 나른 이렇게 편안했겠지. 연홍이도, 그녀의 죽은 딸도, 태호 같은 수많은 어른들도,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는 지금의 나처럼 편안한 때가 있었을 테지.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스스로 숨을 쉬어야만 하는 때가 찾아오고, 혼자서 숨 쉬며 살아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삶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억지로 숨을 참고 있지만 그럴수록 물속은 편안하고 안락한 곳과는 반대의 장소가 되고야 만다. 결국에는 그런 거다. 나는 호흡할 공기를 갈구하고, 그것의 대가로 욕실 문 밖에서 이어질 고통스러운 현실로 복귀해야 한다. 호흡의 욕구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지금, 이대로 머물러도 좋을 텐데.


 물속에서 폐 속의 공기를 코로 내뿜으며 나는 몸을 일으킨다. 여전히 물에 잠긴 두 무릎을 꿇은 채로, 물 바깥으로 몸을 일으킨 나는 크게 벌린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신다. 두 손을 둥글게 말아 이마에서 정수리, 그리고 뒷목까지 젖은 머리카락을 짜낸다. 이제 두 눈을 다시 뜬다, 아주 천천히. 유독 더 밝아진 것 같은 욕실 내부를 훑어본다. 선반 한쪽에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 같은 회색과 빨간색의 옷을 보니 절로 인상이 써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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