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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May 19.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4화

차질-3

{ 벗, 미치광이 - 제2권 13화 }에서 이어집니다.


 욕조에서 나와 거울 앞에 선다. 온몸이 젖었는데도, 내 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보다 낮은 곳의 피부를 스치는 촉감이 선명하다. 욕실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이 발목으로 튀어 오르는 것까지 느낄 만큼 나의 정신은 맑아져 있다. 그렇게 물을 뚝뚝 흘리며 오도카니 서서 나는 오른손을 뻗어 수건을 집어든다. 둥글게 말려있던 수건은 애초에 어떻게 개어졌는지 알아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아래로 펼쳐진다. 습한 욕실의 선반이 아닌 뙤약볕 아래 빨랫줄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다가 우연히 내 손으로 날아든 듯이 보송보송하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내가 값진 수건을 처음 써보는 탓일까-하는 생각은, 눈을 한 번 깜빡여 지워버린다. 거울 속 여자는 머리를 부지런히 비벼 말리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지저분한 옷가지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반대쪽, 수건 옆에 포개져있는 목욕가운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토록 멋진 수건으로 머리를 먼저 말렸으니, 이제는 온몸으로 느껴볼 차례다.


 목욕가운을 걸치고 양쪽 자락을 잡아당겨 앞섶을 단단히 여미고 허리끈을 세게 묶은 다음, 나는 욕실문을 열고 나선다. 실로 향하는 통로, 탁자 위에 놓인 먹다만 김밥이 나를 반긴다. 방금까지만 해도 나는 이것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순간, 멋들어진 욕실에서 귀족처럼 씻고 나온 내 본래의 위치가 무심결에 그것으로 뻗고 있는 오른손에 의해 탄로 난다. 나는 뻗던 손을 아주 잠시 주춤하다가 결국에는 마저 손을 뻗어 예의 먹다가 만 김밥을 손에 쥔다. 이 김밥을 다시 입에 가져다 댈지,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지는 정하지 않은 채로 나는 침실을 지나 공간을 구분 짓는 낮은 계단을 지나 거실을 가로질러 세 사람을 향해 걷는다. 형사는 여전히 창가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고, 태호는 쪼그려 앉아 형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무어라 말하고 있다. 둥근 탁자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한쪽 뺨을 얹은 채로 앉아 있는 연홍이는 그런 둘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중이다.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보니 기분이 좋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의 나와 그곳에서 나온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이토록 넓고 깨끗하며 우아한 곳이 원래 내가 속한 곳인양 자연스럽고도 빠르게 적응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나 또한 이런 생활을 영위할 자격이 있고, 그럴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누군가가 저기 침실과 거실 사이의 탁자에 놓인 전화기 너머에서 사업에서의 중차대한 결정을 내게 물어온다면, 나는 충분히 숙고한 뒤 올바른 답변을 해준 다음 전화를 끊을 것이며, 그런 것을 일상으로 삼는 것만으로도 매달 큰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런 내 손에는 끝까지 피우지 않아도 전혀 아깝지 않을 담배가 끼워져 있을 것이며, 담배를 피우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갈 필요는커녕 재떨이의 청소마저 다른 누군가가 해줄 것이다.


 하지만 행히도 나는 현실로부터 진정으로 도피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멍청하지 않다. 나는 얼른 맨발로 카펫의 촉감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를 깨닫고 시선을 아래로 던진다. 발톱은 길지만 미용을 위해 가꾸어진 것과는 정반대의 모양이다. 대부분이 삐딱하거나 갈라졌고, 끝부분이 두껍거나 윗면이 울퉁불퉁하다. 불현듯, 일찌감치 실내화를 찾아 신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못난 발톱뿐만 아니라 발아래로 말려 들어갈 듯이 굽은 새끼발가락의 노랗다 못해 회갈색으로 변한 굳은살도 숨길 수 있을 터였다. 발끝에 이어 손의 생김새를 살펴 다시금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해 보려다가, 이내 손에 들린 예의 김밥이 모든 것을 대신 답해주는 것 같아 울화만 치민다. 이제 와서 실내화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모양이 빠질 것 같다는 생각과 손에 든 김밥에서 기인한 울화가 뒤죽박죽 뒤섞인 탓에 지금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내 몸은 알아서 할 일을 찾아낸다. 마치, 잊고 있었지만 반드시 해결했어야 할 일을 가까스로 떠올린 것처럼 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턱을 당기고 두 눈을 크게 부릅뜨자 관자놀이와 이마의 피부가 귀 너머 뒤쪽으로 땅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얼굴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결코 초조하거나 다급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내딛는 매 걸음마다 힘을 다. 내 다리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오른손은 야구공을  투수처럼 치솟아 오르고 그대로 곡선을 그리며 이내 김밥을 쏘아낸다. 여전히 머릿속으로는 그 어떤 계획이나 생각도 또렷이 정리되지 않지만, 내 손도, 역시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김밥은 형사의 얼굴을 스치듯 피해 바로 옆의 벽에 부딪히고, 태호와 연홍이 자세를 고쳐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 둘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고개를 돌리는 동작이 선명하게 보인다. 갈마들던 걸음은 내 왼발이 형사의 바지깃에 닿기 직전에 멈추고, 쪼그려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태호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짚음과 동시에 나의 오른쪽 발바닥이 형사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물컹하는 느낌이 발바닥 가운데로 전해진다. 이제야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명쾌하게 이해한다. 두 눈과 얼굴의 피부, 그리고 두 손과 두 발이 절로 움직였던 것은 바로 이를 위한 것이었다.


 태호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만 내 결연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인지 형사를 향한 폭력을 말리려 들지는 않는다. 나는 더욱 의기양양해지고, 태호의 어깨에서 단단한 팔로 손을 옮겨 쥔 채로 다시 발길질을 한다. 맨발로 잘못 걷어찼다가는 내 소중한 발가락이 다칠 수 있으므로, 나는 분비배출을 위해 맥주캔을 밟듯이 오직 발바닥의 뒤꿈치만으로 형사의 얼굴을 짓밟듯 밀어 찬다. 이번에는 물컹한 느낌과 상반되는 딱딱한 감촉이 제대로 전해진다. 형사는 창가의 벽을 기대앉아 있으면서도 오른쪽으로 벽을 낀 모서리에 앉아있으므로, 내가 발길질을 한다고 해서 넘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불편한 몸을 뒤틀며 얼굴을 돌려 모퉁이 구석으로 더 단단히 처박힐 뿐이다. 나의 폭력행사가 정당하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건장한 태호와 어린 여성 둘을 팔다리가 구속당한 상태로 대적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한쪽 눈두덩이와 볼이 발갛게 부어오르고 코와 입굴, 그리고 입안에서 흘러나오도록 그는 그만 멈춰달라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기침을 하거나 이따금 숨을 몰아쉴 뿐이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을 때리는데에서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경험한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면서도 신이 나 뛰어놀던 어릴 적 친구들이 흐릿한 기억 속에서 떠오른다. 그때의 어린 나는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긴장감과 체력적 한계에는 아랑곳 않고 즐거운 놀이 자체에 흠뻑 빠지고는 했다. 놀이가 이어질수록 체력은 고갈되어 갔지만, 즐거운 긴장감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가쁜 숨을 겨우 추스르고 있는 지금의 내가 그렇다. 감히 내 몸을 돈 몇 푼과 한 움큼의 마약으로 사려했거니와, 꼴에 저가 형사라는 둥 뉘우칠 줄을 모르는 거짓말도 그는 서슴지 않았다. 결코 몇 번의 발길질만으로 그 죗값을 치렀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을뿐더러, 내 체력이 더 좋았더라면 그의 얼굴은 이미 반죽이 되어있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첫 번째 발길질 보다 두 번째가 더 정확했고,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더욱 통쾌했다. 숨이 가쁘고 어지럼증이 일기 직전까지, 나는 발길질을 거듭하며 일종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해 내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내가 숨을 마저 고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태호가 말을 꺼낸다.

 「아마 아픈 줄도 모를 거야.」

내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발 끝으로 형사를 툭툭 건드리면서 그가 말을 잇는다.

 「이놈이 갖고 있던 약 말이야. 그걸 해보라고 시켰거든. 그 약이 진짜 마약인지 아닌지를 연홍이나 내가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순간 화가 치민다. 내가 숨이 차도록 열심히 걷어찼는데 막상 맞은 사람은 아프지 않다니, 이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다. 나는 미처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을 내뱉는다.

 「연홍이도 확인할 수 있잖아? 그랬으면 이 남자는⋯⋯.」

아차 하는 생각에 말을 멈췄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린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연홍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수치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시선을 떨군다. 사과는 빠를수록 좋다.

 「미안해, 미안해 연홍아. 나도 모르게 한 말이야. 정말 미안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말도 안 되는 건데,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정말, 그냥 말이 튀어나와 버렸어. 내 말은⋯⋯.」

그녀가 여전히 시선을 떨군 채로 내 말을 가로막는다.

 「아니야. 괜찮아, 유지야. 괜찮아. 내가 확인하려고 했었어. 그걸 오빠가 말렸고⋯⋯.」

그녀는 말 끝을 흐리며 원망과 아쉬움이 드리운 얼굴로 태호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태호는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예의 버지니아 레드를 한 개비 꺼내 물면서 말을 꺼낸다.

 「마약이라는 게⋯⋯.」

그는 말문을 열고서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연기를 코로 짧게 뿜으며 동을 단다

 「마약이라는 게 무서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겪어보니 참담하더라. 연홍이도 본인이 원해서 빠져든 게 아니겠지만, 결과는⋯⋯.」

그가  한 모금의 담배를 태우는 동안 나는 그와 연홍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태호는 마치 연홍이가 여기에 없고 나와 단 둘이 있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한 번 빠져들면 결과는 다 똑같은 거야.」

그가 똑같은-이라는 말에 유달리 힘을 주어 말을 하며 연홍이를 쏘아보자, 연홍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침실로 향한다. 이제 정말로 대화는 태호와 나, 온전히 둘의 것이다.


 창틀에 놓인 담뱃갑에 손을 뻗으며 내가 태호를 바라보자, 그는 입술을 둥글게 말아 형사에게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우아한 모습으로, 비록 실내화는 신고 있지 않지만, 턱을 조금 위로 향하고서 담뱃불을 붙인다. 그리고 태호가 그랬듯이 연기를 형사의 얼굴에 침을 뱉듯이 뿜어낸 다음 시선을 태호에게 던진다. 담배를 든 오른손은 위로 향하고, 왼손이 오른쪽 팔꿈치에 닿도록 팔짱을 끼고서 나는 가슴이 조금이라도 더 부피 있어 보이도록 팔의 위치에 신경을 쓴다. 날뛰듯 발길질을 한 탓에 목욕가운이 조금 풀어졌지만 나는 이를 모른 척 태연하게 말을 꺼낸다.

 「왜 그래, 무섭게. 연홍이가 뭘 어쨌길래 그러는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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