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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May 05.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2화

차질-1

{ 벗, 미치광이 - 제2권 11화 }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동그랗게 모은 입술에 대고 쉬잇-하며 연홍이의 얼굴을 열리다 만 문틈으로 노려본다. 태호의 말이 맞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름을 들키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하게 됐다. 연홍이에게 조금은 화가 나지만, 형사의 존재를 알턱이 없는 연홍이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짜 뭐 하는 건데? 도대체?

연홍은 방문 너머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와중에도, 태호의 외침을 듣고 내 동작을 본 것만으로 조심성이 필요한 때임을 직감했는지 짜증을 내면서도 목소리를 세심하고 조용하게 낮추었다. 똑똑한 것 같으니라고.

 「지금, 문을 열지 않은 상태로 내가 연홍에게 설명한다.

 「방 안에 다른이 사람 한 명 있어.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만났어. 나한테 오만 원에 몸을 팔라고도 하고, 그 돈으로 부족하면 마약을 준다지 뭐야.

 「이런 미친 개⋯⋯.

 「잠깐만, 아니, 들어봐. 그런데 그 사람을 태호 오빠가 때려잡았어. 아무튼 지금은 손발이 묶인 채로 오빠 옆에 있어. 그래서 오빠가 우리한테 서로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한 거야. 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니까.」

연홍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녀는 문틈으로 형사의 얼굴을 확인하려 각도를 바꿔보지만 보일리가 없다. 그녀가 말한다.

 「이름 부르지 않기. 그래, 그건 알겠어. 친구야. 그런데, 그런 이야기라면 오히려 내가 들어간 다음에 문을 닫고 조용히 이야기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네가 틀렸어. 네가 누군가한테 협박당해서, 예를 들어 방안에 묶여있는 저 사람의 동료한테 서라든가 말이지, 어쩔 수 없이 나를 잡으러 길안내를 한건지도 모르잖아. 네가 지금 방 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네 뒤가 안 보여. 나는 보육원에서 뒤통수를 당해본 경험이 많아. 그래서 나는 알아. 네가 틀렸어. 너는 착한 내 친구지만, 지금 너는 나한테 안전하지 않아. 적어도 너를 방으로 들이려고 문을 함부로 열 수는 없어.

한참의 정적이 흐른다. 문 밖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린다. 연홍이가 들고 온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인 것 같다.

 「똑똑하네. 그 생각은 못해봤어.

그녀가 문틈 사이로 편의점에서 파는 김밥을 밀어 넣으며 말한다. 그녀는 비닐봉지와 함께 복도 바닥에 앉은 모양이다. 나는 말없이 쪼그려 앉아 김밥을 손에 들고 포장을 뜯으면서 피로와 근육통으로 쑤시는 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할 방법을 찾는다. 걸림쇠가 박힌 면에서 기역자로 꺾인 벽이 매력적으로 보이기에, 나는 엉덩이를 옮겨 문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등을 기대고 앉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펜트하우스의 구석 창가에서 형사와 태호가 무얼 하고 있는지는 잠시 잊기로 하고, 길쭉하게 생긴 김밥 끄트머리를 한입 문다. 퍽퍽하게 말라버린 입속을 마요네즈에 버무려진 부드러운 참치와 쌀밥이 채운다. 매운 고추인지 고추냉이인지 모를 무언가가 들어있어 코 끝이 시큰하다. 생수를 들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네 말을 들으니까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를 않네. 뭐, 이렇게 벽을 사이에 두고 간단히 허기를 달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만⋯⋯. 그런데, 오빠는 그 남자를 하필이면 왜 이 방으로 데리고 온 거야? 오빠 방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었잖아. 경찰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 아니야. 뭣하러 그 사람을 이 방에 데리고 있는지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거든 지금?


그녀는 질문을 던지고, 빨대로 무언가를 마시는 소리를 낸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궁금하겠지.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당장 대답할 수가 없다. 방금 한 알 더 배어문 김밥을 꼭꼭 씹다가, 턱이 아파서 입이 볼록한 채로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서, 생수 뚜껑을 힘주어 연 다음, 물을 반모금 들이키고 나서야 다시 입속에서 물러진 김밥을 마저 씹고, 마침내 삼킨다. 오랜만의 섭취는 힘겹다. 잠시만-하고 짧게, 한마디 말로 연홍이를 어르고, 나는 물을 몇 모금 더 마신다음에야 입을 연다.

 「오랜만에 음식을 먹으니까 속이 불편해서 그랬어. 미안, 질문이 뭐였지? 아, 그래. 왜 저 형사를 이 방으로 데리고 왔냐고 물었었지? 그게 왜 그랬냐면⋯⋯.

 「야. 뭐, 저 형사? 형사? 형사라고? 형사를 때려잡았다고?

화들짝 놀란 연홍이가 앉은 채로 몸을 돌려 작고 하얀 얼굴을 문틈에 들이대며 물으니 그야말로 난감하다.

 「내가 말했잖아⋯⋯. 안 했나⋯⋯?」

 「와, 얘 이거 아직도 뇌가 정상이 아니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 줄은 알고 하는 거야? 아휴, 됐고, 문 열어. 빨리.

 「안돼. 말했잖아⋯⋯. 이건 분명히 기억나. 나 말했어, 안 된다고⋯⋯.」

 「야, 내 뒤에 아무도 없어. 나 따라온 사람 같은 거 없다고. 게다가, 정말이지 너 진짜 이 씨, 이거 내 방이야! 내 호텔 방이라고! 직원 부를 거야!」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된다. 하루 종일 굶은 내게 김밥은 무척이나 고마운 선물이지만, 배를 채워준다고 해서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태어나 들어가 본 그 어떤 곳보다 멋진 호텔의 펜트하우스이지만, 이미 악당이 들어와 있는 곳에 그의 동료를 불러들일 수는 없다. 어쩔 수⋯⋯.

 「야, 비켜.

기척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태호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보면서 열리다 만 방문을 쾅-소리가 나도록 닫는다. 그 바람에 귀가 울리고 호텔 안의 다른 문과 창이 떨린다. 그는 걸림쇠를 귀찮은 듯 걷어내고서 방문을 천천히 밀어 연다. 바깥의 연홍이가 다칠까 봐 조심하는 모양이다. 부럽다.

 「내가 온 줄 알았으면 진작에 와서 열어줄 것이지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이 멍청이야!」

연홍이는 다짜고짜 태호에게 윽박을 지른다. 자상하게 문을 열어준 태호에게 고마운 줄을 모르니 딱한 일이다. 그 와중에, 낮은음에서 시작한 그녀의 말이 갈수록 높아지다가 마지막에는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멍청이'로 마무리되는 것에 나는 감탄을 숨기기 어려울 지경이다. 손에 든 김밥과 생수만 아니었다면 저절로 박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비닐봉지를 든 연홍이 느린 걸음으로 호텔 방으로 들어오고, 태호는 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핀 뒤 방문을 닫는다. 나는 안전걸쇠를 걸어 잠그려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고꾸라지고야 만다. 문에 몸을 부딪히며 쿵-소리를 내자 연홍이 또 잔소리를 한다. 엎질러진 생수와 바닥에 떨어진 김밥은 안중에도 없다.

 「답답한 남자 어른에다가 맹한 여자애 둘이서 아주 난리 법석이다.

 「미안해.

문에 등을 기댄 채, 하고 싶은 말과는 반대로 대꾸한 나는 몸을 기울여 생수통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아주 시의적절하게도 문 밖으로부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충격이 등으로 전해져 윗몸을 기울이기가 수월하다. 게다가 다행히도 김밥도 두 알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뿐, 포장지에 싸인 나머지는 더럽혀지지도 않았다. 바닥의 물은 이미 카펫에 스며들어 보이지도 않으니 청소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김밥 두 알과 생수병을 한 손에, 깨끗한 김밥을 다른 손에 든 나는 화장실을 찾아 나선다. 팬트하우스라는 방은 어찌나 넓은지, 도무지 화장실이 시야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부득이 나는 여전히 창가 벽에 기대고 앉은 형사 곁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는 태호와 연홍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저기⋯⋯. 여기, 화장실이 어디야?

 「화장실은 왜?

 「왜-라니? 화장실에 가려고 찾는데 안 보여서 그래.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나는 성실하게 이유를 설명한다. 말을 이렇게 해도 연홍이는 예쁘고, 나를 도와주는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던지, 그녀는 또다시 질문으로 되받아친다.

 「내 말은, 화장실을 왜 찾느냐는 말이야. 당연히 화장실에 가려고 찾는 거겠지. 그래, 그건 알겠어. 그런데 유지야, 다시 한번 내 말은⋯⋯.

순간 태호가 윽박지른다.

 「좀,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남자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연홍이도 이번에는 태호의 말에 입이 쏙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고 금방 목을 고치고서는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 이유를 묻는 거야. 알겠어?

 「응, 알겠어⋯⋯.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 데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한 특별한 예절이 있는 걸까? 나쁜 행동을 하거나 버릇없이 말하지 않도록 지도원 선생님만큼이나 언니 오빠들로부터 잘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는 여느 사람들이 가진 교양이나 예절의 수준에는 못 미치는 사람인가 보다.


 생수병과 먹다만 김밥을 손에 들고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해 눈을 떨구고만 있다. 그러다가 땀범벅인 형사와 눈이 마주치고, 소름이 끼쳐서 퍼뜩 고개를 다시 든다.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나를 노려보던 연홍이가 다시 말을 꺼낸다. 옆에서 입을 비죽이고 있는 태호가 얄밉다.

 「너, 볼일 보러 가니?」

 「아니야.

연홍이가 무섭다. 나한테 왜 이렇게 무섭게 굴고 있는 건지 도무지 감조가 오지 않는다.

 「그럼 왜, 왜 가니? 너 설마, 화장실에서 김밥 먹으러 가니? 그런 거야?」

세상에, 연홍이는 도대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야, 여기. 여기 봐. 떨어진 김밥을 버리러 가는 거야.」

이제 모든 것이 명료하게 설명되었겠지-싶을 때, 그녀가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또 나를 다그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잖아! 변기에다 버리려고 했어? 아니! 왜? 도대체! 왜?

 나는 그만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음식물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면⋯⋯ 벌레가 꼬이니까⋯⋯. 그러니까 변기에⋯⋯.

 「정지!

순간 연홍이가 외친다. "그만"도 아니고, "잠깐"도 아니고, "멈춰"도 아니고, "정지"라니? 순간 눈물이 쏙 들어가며 내 머릿속에서 의문이 커져간다. 딴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걸까, 연홍이 금방 동을 단다.

 「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거기서 딱 정지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서 그래. 친구야, 잘 들어. 응? 우선은 말이야, 여기는 호텔이야. 쓰레기는 그냥 아무 휴지통에나 버리면 돼. 음식물쓰레기를 분리배출하거나 하지 않아. 네가 종량제 봉투 살 돈을 아끼려고 평소에 음식물쓰레기를 변기에 버리나 본데, 호텔에는 그런 게 없어. 적어도 여기는 그래. 그리고 네 손에 들린 생수병. 그래, 그거. 플라스틱도 마찬가지야. 그냥 휴지통에 버려. 나머지는 호텔 직원이 알아서 하는 거야. 그분들은 전문가이니까, 음식물쓰레기건 재활용쓰레기건 완벽하게 처리하실 거야. 암, 그렇고 말고. 그리고 한 가지 더. 여기는 펜트하우스야. 변기가 있는 화장실, 샤워하는 화장실, 욕조가 있는 화장실, 단장을 하는 화장실이 따로 있어. 네가 똥을 누러 가는지, 그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몸을 씻으러 가는지 내가 알아야 제대로 답을 할 수가 있겠지? 그래서 물었던 거야. 이제 좀, 알아듣겠니?


 머릿속으로 그렇구나-하고 생각하며 말로 뱉으려는데, 자존심이 상한다.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다시 한번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나는 어린애처럼 올바로 쓰레기를 버릴 줄도 모르고, 혼자서 화장실도 못 가고, 지저분하다고 놀림받는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것에든 처음은 있다. 모를 수도 있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연홍 스스로도 제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아량을 베풀 차례다.

 「알아들었고, 용서할게.

 「고맙네. 이제 쓰레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똑똑하고 예쁜 연홍이를 이겼다. 그렇다고 기쁘지는 않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진 그녀이지만, 그녀가 누구보다 더 많이 가진 것들 중에는 참척의 슬픔, 엄습하는 죽음의 두려움, 태어나기 전부터 이어진 핏줄의 수치심도 포함된다. 좀 봐줄걸.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때다.

 「그럼, 나는 좀 씻고 나올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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