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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Apr 21.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0화

계획-03

{ 벗, 미치광이 - 제2권 09화 }에서 이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나는 여느 누구 못지않게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왔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의 시작이 얼굴을 모르는 부모의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고 자부한다. 목숨을 걸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찬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지는 않았지만, 실수하지 않기 위한 나의 노력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 매 맞지 않기 위해서,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또다시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체념만큼이나 큰 나의 장기이다.


 위험을 직감한 나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한다. 엘리베이터 문 위에 층계를 알려주는 숫자가 '09'에서 '10'으로 바뀌는 찰나의 순간마저도 긴장한 나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인다. 이 남자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한 것인지 생각해 본다. 삼십 분을 넘기지 않는다고 했다. 오만 원은 어떠냐고 물었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생각해내야 한다. 그래, 내가 입은 옷 때문이다. 역시 연홍이가 말한 대로다. 내가 창녀로 보이기 때문에, 그에게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유는 알겠으니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빨리, 머리를 더 빠르게 굴려야 한다. 나는 매춘부가 아니에요-라고 그에게 말한다면 그는 아, 그랬군요. 죄송합니다-하고 사과할까? 나에게 무섭게, 폭력적으로 굴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달동네 트럭에서 도망쳐 나오자마자 강남 한복판의 호텔에서 멀쩡하게 생긴 이 비열한 인간에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다. 가능성이 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다시 천천히 '10'에서 '11'로 바뀐다. 더 빨리, 더 빨리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내가 매춘부인 척하고 몸을 내어주는 대가로 오만 원을 받으면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흠씬 두들겨 맞거나 죽지는 않겠지. 오만 원, 삼십 분.


 엘리베이터가 선명하면서도 조용한 종소를 내면서 움직임을 멈춘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가 몸을 빠르게 움직여 문 앞을 가로막고 선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서서 천천히 뒷걸음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더니, 바깥에서 버튼을 누른 채로 말한다. 여전히 문을 막아서고 있는 그는 이 모든 걸 치밀하게 미리 계획이라도 해둔 걸까.

 「아이 참, 농담이에요. 농담이라고요.」 

내가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말을 잇는다.

 「요즘 누가 오만 원으로 해주겠어요? 농담이었다니까⋯⋯. 

두렵다. 천진하게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여전히 엘리베이터를 막고 서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무섭다. 내가 안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 문은 닫힐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남자의 의도를 도통 알 수가 없다.


 「아가씨, 내가 지금 돈이 오만 원밖에 없어서 그래요. 아니 아니 잠깐, 끝까지 들어봐요. 

그는 끝까지 들어보라고 말하고서는 말을 멈춘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과 행동은 내게 더욱 큰 공포를 안긴다. 제발 그만, 오늘은 그만. 너무 힘든 하루였는데, 아직 오늘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건 너무 불공평하다. 조금만 쉬고, 그다음에 생겨도 충분히 끔찍한데 어째서 내게 쉴 틈도 주지 않고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으려나 싶다. 실수로 태어난 주제에 너무 끈질기게 살아있어서 운명이 계속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 무릎이 떨리고 꼭 쥔 두 주먹도 떨린다.


 「이걸 보여드리면 이야기가 좀 통할 것 같은데. 자, 어때요?」 

그는 한 손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인다. 작고 투명한 지퍼백 안에는 새하얀 가루가 반쯤 채워져 있다. 나는 바보가 아니라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약의 이름은 모르지만 분명히 마약이다. 하지만, 내가 몸을 내어주지 않으면 강제로 마약을 먹이겠다는 협박인지 혹은 내 몸값으로 마약을 주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딱 봐도 이게 필요해 보이시는데, 흥정이 길면 재미없어요.」

흥정이 짧아도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은 내가 살기에 너무 무서운 곳이다. 땅딸막한 시골 강아지를 데려다가 사자와 하이에나가 뙤약볕을 천장 삼아 지내는 초원에 던져둔 꼴과도 같다. 그래도, 이만하면 잘 버텼다. 적어도 이 약쟁이 악당은 나를 이곳에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설령 나를 죽인다고 해도 별 수 없다. 나는 실수하지 않기를 멈추고, 체념하기를 택하기로 한다. 하지만 비겁하게는 싫다. 될 대로 되라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한다. 말이 엉키지 않게, 천천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어질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머릿속 칠판에 써보고, 틀림이 없도록 또박또박 말한다.

 「아저씨. 저는 매춘부가 아니에요. 그리고 마약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은 죽이죠. 물론 혼자서는 못하지만요. 조금 전에도 누군가의 귓구멍에 박힌 드라이버를 쥐고 그 속에 있는 뇌를 휘젓고 왔어요. 조금 있으면 내 친구들이 이리로 올 거예요. 이미 방 안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아저씨, 자신 있어요?」 


남자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로 물러선다. 아쉬운 얼굴로 그가 말한다.

 「내가 한 농담보다 훨씬 재미없네요. 농담 맞죠? 진짜 이걸 포기한다고요? 이거 좋은 물건인데. 

나는 황급히 버튼을 눌러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차분한 걸음으로 나온다.

 「말했잖아요. 나는 몸을 팔지도 않고, 마약을 하지도 않아요. 자, 이제 어쩔 건데요? 강제로 약을 먹이고 강간이라도 할 거예요? 아니다, 나 하나 정도는 마약이 없이도 우습게 제압하겠죠. 대단하신 남자이시니까.

나의 당돌함에 기가 죽은 것인지, 실망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분노를 드러내기 전에 호흡을 고르기 위함인지, 그가 길게 한숨을 쉬고는 틈을 두어 말을 꺼낸다.

 「죄송합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예의 바른 어투와는 상관없이 사람의 행동은 언제든지 비열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자그마한 지퍼백을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을 뿐 별 다른 말이 없다.


 「그게 다예요? 

가진걸 모두 버리고 미래를 잃을 각오를 하면 몸이 따라주지 않아도 용기만큼은 하늘을 찌른다. 나는 이미 끝난 전쟁에서 상대를 도발해 본다.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답한다.

 「예, 이게 다입니다. 제 용건은 끝났으니까, 아가씨 용건이 있으면 말하던가요. 아니면 호텔방으로 들어가시거나.

겨우 이 정도로 끝난다는 것이 나는 기쁘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어렵게 꺼낸 내 용기와 분노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

 「아저씨, 나한테 돈 주고 섹스하려고 했죠. 게다가 마약도 갖고 있죠. 나,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아니다, 차라리 지금 여기서 비명을 지르는 편이 낫겠네요. 당신 같은 쓰레기들은 사람들 앞에서 놀림감이 되어야 해요. 맞아도 싸고, 제 친구의 말 대로라면, 죽어도 싸요.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외칠 준비를 한다. 변태다-하고 외칠까, 치한이야-하고 외칠까? 둘 다 외쳐보자. 내가 막 소리를 내려고 하던 찰나에 그가 순식간에 다가와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잠깐, 잠깐만요, 아가씨. 미안해요, 미안하다고요. 내가 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아악!

내가 그의 새끼손가락과 손날을 싸구려 고기를 뜯어먹듯 깨물자 그가 말을 잇지 못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내 입을 막은 손이 아플 텐데도 가만히 자세를 유지한다. 더욱 희한한 것은, 그가 내게 반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다만 한 손으로 내 뒷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입을 막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다.

 「아, 진짜! 제발, 제발요. 그만 깨물어요! 누가 들으면 안 된다고요!」 

그가 수업시간에 귀찮게 구는 친구에게 화를 내듯 작은 소리로 외치고, 이를 들은 나는 자비롭게 입에서 힘을 풀어본다. 내 예상과 달리 그가 나를 공격하지는 않았으므로 충분히 베풀 수 있는 아량이다. 그는 피가 흐르는 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을 세워 제 입술을 가리며 말한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선생님. 저는 마약반 형사이고요, 본의 아니게 선생님을 의심하게 됐습니다. 제발 소리치지 말아 주세요. 아직 저는 이 호텔에 더 묵으면서 할 일이 있습니다. 소란을 일으키기는 싫어요. 고생한 보람도 없⋯⋯.」 

갑자기 그의 눈이 뒤집히더니 두 팔이 아래로 쳐지고, 이내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그의 뒤로 소화기를 손에 든 태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세상에, 그는 칭찬을 바라는 어린 소년의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고마워요, 오빠.」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우선은 나를 위해 나서준 불사조에게 고마운 마음부터 전한다. 내 나름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다. 하지만 그는 형사의 손을 깨물었던 나와 마찬가지로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질렀고,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태호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야 한다. 태호가 쪼그려 앉아 형사의 몸을 손가락으로 찔러대며 말을 꺼낸다.

 「인사과에서 전화가 왔어. 해고될 수도 있다더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부장님이 말려서 경위서로 해결될 수도 있으니까 내일 일찍 출근하라네.」

이 상황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런 남자가 직장에서 무슨 일이건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나 있을지가 의문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갑갑한 인간도 직장을 구했으니 나도 편의점 보다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겠다는 묘한 안도감도 생긴다. 아니다, 나까지 이러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태호의 멍청함에는 전염성이 있다.

 「오빠, 이 남자 형사래요. 마약반 형사래요.」

 「악질이네.」

 「아니요, 오빠. 내 말 못 들었어요? 형사라고요. 경찰이라고요. 여기서 진짜 나쁜 사람을 잡으려던 거겠죠. 이해가 안 가요? 오빠가 경찰을 폭행한 거라니까요?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아니야.」

 「합리화하려는 거잖아요, 오빠가 때려눕힌 사람이 나쁜 놈이어야 하는 거니까.」

 「그럴 수도 있고. 뭐, 일단은 이 사람을 호텔 방으로 옮기자. 네 말대로 이 인간이 진짜 형사건 약쟁이건 뭐건, 호텔 복도에 눕혀둘 수는 없어. 내가 옮길 테니까, 너는 가서 방문 열고 문을 잡고 있어. 뭐 해? 어서 가서 문부터 열라니까.


다행히 방문은 엘리베이터에서 멀지 않다. 태호의 명령에 가까운 제안이 탐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게 더 나은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으므로, 나는 잰걸음으로 방문 앞에 가서 문을 연다. 옅은 숨을 쉬며 늘어져 있는 형사를 태호가 세워 앉힌 다음  뒤에서 끌어안은 모양으로 힘겹게 호텔방으로 끌고 온다. 태호가 뒷걸음을 하는 동안 나는 방문을 잡고서 기다린다. 이윽고 이마에 핏대를 세운 태호가 입술을 앙다문 채 뒷걸음으로 내 옆을 지나고, 고개를 숙인 채 늘어진 형사의  발끝도 문턱을 넘는다. 나는 얼른 호텔방의 문을 닫고, 비프음을 내며 잠기는 전자장치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문틀의 위쪽에 붙은 안전걸쇠도 걸어 잠근다. 걸쇠를 젖히기가 뻑뻑한 점이 마음에 든다. 문을 열어보려 해도 철컥하고 걸려서 고양이 한 마리조차 드나들지 못할 만큼만 열리다가 만다. 역시나 마음에 든다. 고개를 돌려보니 태호가 형사를 바닥에 엎드린 채 뉘어놓고 한창 손을 등뒤로 묶는 중이다. 발은 이미 묶여있다.

 「줄은 어디서 구했대요?」

내가 묻자 그가 이마에 땀을 훔치고 마른침을 삼키며 답한다.

 「목욕 가운에, 그 있잖아. 허리 묶는 끈. 나름 튼튼한 것 같아. 왜 깨어나질 않는지 모르겠네. 너무 세게 때렸나 싶기도 하고.」

그 순간, 형사가 꿈틀 하고 깨어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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