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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Apr 14.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09화

계획-2

{ 벗, 미치광이 - 제2권 07화 }에서 이어집니다.


 연홍이도 참 싱겁기가 그지없다. 무슨 수수께끼 같은 걸까. 내가 다리를 벌리면 태호가 달려가 체크인을 하려나? 나와 태호의 행동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기에 연홍이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나를 도운 친구를 돕는 것은 좋은 일이고, 그 부탁예의 연홍이가 한 말처럼 어렵지 않을 때에는 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다. 편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고마운 일이다. 고개를 들어 연홍이를 한 번 보고 나와 연홍이를 곁눈질하는 태호에게 시선을 던진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연홍이에게로 시선을 고정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겨우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뻔히 드러난다. 착한 남자. 내가 그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기만 해도 이내 나를 좇는 그의 곁눈질이 느껴진다. 아휴, 체크인이나 하러 가세요. 나는 양쪽 무릎이 소파의 가장자리에 닿도록 다리를 벌린다. 연홍이는 나의 손목을 들어 소파의 팔걸이 끝을 부여잡도록 옮긴다.

 「딱 좋아. 이 자세를 유지해.」

 「알았어, 불편하지도 않은걸.」


 연홍은 싱긋 웃어 보이고는 내가 앉은 소파 뒤로 걸어가더니 소파를 움직이려 안간힘을 쓴다. 완력이라고는 없는 주제에 무슨 짓이람. 나는 조용히 소파에서 내려오고 이와 동시에 소파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귀까지 빨개져서 정수리를 드러낸 채로 소파를 움직이고 있는 연홍이를 돕고자 나는 슬쩍 힘을 보탠다. 곧 소파의 움직임이 멈추고, 나는 다시 소파에 올라앉는다. 이제 보니 나는 태호를 향해 정면으로 앉아있다. 내가 도와줬다는 걸 연홍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나는 소파에서 내려오기 전과 같은 자세를 취한다. 양손으로 팔걸이를 움켜쥐고, 무릎이 팔걸이 양쪽 끝에 닿도록 다리를 벌린다.

 「오빠, 고개 들어.」

주저하던 태호가 이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는 위아래로 진동하고, 동시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하긴, 저돌적인 자세이기는 하다. 수백 년 전 조상들이 입었던 옷을 입고서라도 이 자세는 매혹을 넘어 천박하리만치 저돌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스물아홉 살 남자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상기될 일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태호는 연홍이가 시키는 대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마지막에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연홍이의,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 아비의 신용카드를 주워 로비를 향해 내달리듯 걸음 한다.


 「그러게,」 연홍이가 태호에게 말한다.  「진작에, 내가 소리치기 전에 그랬으면 좀 좋아. 자세하게 보여주길 유도한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

그녀의 말은 어느샌가 나를 향하는데, 아마도 태호가 대꾸를 않아서 그런 것 같다. 태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즈음에 연홍이는 소파 뒤에서 내 앞으로 돌아와 쪼그려 앉는다. 이미 나 덕분에 태호는 체크인을 하러 갔기에 나는 이제 그만 자세를 편하게 고치려고 하지만, 연홍이가 말없이 손으로 내 왼쪽 무릎을 잡아 말리는 바람에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유지한다. 그제야 쪼그려 앉은 연홍이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일 뿐 여전히 말이 없는 연홍은 다시 고개를 숙인다.

 「후-.」

그녀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바람을 불자, 내 아랫도리가 시원해지는 게 느껴진다. 통풍이 되는 것이 기분이 좋다가도, 부지불식간에 불길함을 직감한 나는 오른손을 뻗어 아랫도리를 더듬는다. 곱슬한 털이 손 끝에 닿으면서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는 음모의 주변을 더듬어보고 식은땀이 이마에 맺히는 걸 느낀다. 손가락을 더욱 아래로 옮겼을 때, 결코 닿아서는 안될 것이 손가락 끝에 닿는다. 도대체, 어디까지 열려있는 걸까-하며 손을 더욱 뻗어보지만, 손끝에 닿는 것은 어디까지나 에나멜 소재의 바지가 아닌 그 속에 가려져 있어야 마땅할 내 속살뿐이다. 설마 여기까지는 아니겠지-하는 실낱같은 희망도 매번 배신당한다.


 「연홍아, 머플러 좀 줄 수 있을까?」

나는 급하게 다리를 모으고 온몸을 움츠리며 연홍에게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로 부탁한다. 그녀는 느린 동작으로 일어선 뒤 발자국을 새기듯 한 걸음 한 걸음 힘을 주어 바닥에 떨어진 머플러 앞으로 걸음 한다. 머플러가 발치에 스치듯 닿는 순간 그녀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 몸을 틀어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아니, 네가 주워.」

그녀의 눈빛에서 감정이 읽히지 않는다. 다만 그녀를 설득하기란 불가능하리라는 점만이 확고하게 느껴질 뿐이다. 나는 알았어-하고 말하지만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소파에서 몸을 밀어내 바닥을 딛고 서지만, 걸음을 뗄 수가 없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랫도리에 드는 바람과, 살갗이 스치는 촉각에서 일어나는 수치심에 지배됐다.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다가도 그 촉각에 흠칫 놀라며 또다시 두 발과 무릎을 붙인 채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연홍아⋯⋯.」 내가 눈치를 보며 말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입을 더 굳게 다물뿐이다. 내가 말을 잇는다.

 「연홍아, 머플러를 조금만 내 쪽으로 옮겨주면 안 될까?」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눈빛만큼이나 확고하다. 그녀는 발 끝으로 머플러를 반대 방향으로 걷어차 버리고, 그녀 역시 걸음을 옮겨 무거운 구름처럼 자리를 옮긴 머플러 앞에서 멈춰 선다. 정말이지 너무한다. 하지만 그녀가 화를 낼만도 하다. 멍청한 친구를 돕고자 하던 그녀의 말을 제대로 따르지 않은 나의 탓이다. 그녀에게 사과부터 했어야 했다.

 「연홍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애초에 내가 네 말을 잘 들었어야 하는 건데, 내가 멍청했어.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나 정말 이대로는 못 걸을 것 같아. 부탁이니까, 제발 머플러를 조금만 내 쪽으로 옮겨 줄래? 내가 주울게.」

내 사과가 통했던지, 그녀가 싱긋하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새삼 그녀의 매력적인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그녀는 내가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 머플러를 집어 들고 로비를 향해 던진다.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내가 누구보다 잘하는 것 중의 하나가 체념이다. 어차피 부끄러운 줄 모르고 지금껏 이런 꼴로 걸어 다녔던 내가 고작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꼼짝 못 할 만큼 움츠릴 이유는 없다. 없는 셈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의 주제가 가족이었을 때, 나는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뻔뻔하게 잘만 그렸다. 처음부터 연홍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지만 시간을 되돌릴 재간은 없다. 체념은 꽤나 실용적인 수단이다.


 지친 몸으로 마음이나마 당당하게 나는 머플러를 향해 걷는다. 도대체 무얼 하느라 이리도 요란일까-하는 얼굴의 프런트 직원과 눈이 마주치지만 개의치 않는다. 어서 머플러를 두르고 연홍의 호텔방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더 이상은 지체하지 말자-라도 마음속으로 또박또박 말하면서 나는 고개를 숙여 냉큼 머플러를 집어 들고, 일어섬과 동시에 허리에 두른다. 마음이 풀렸는지 연홍이 다가와 노련한 솜씨로 매듭을 지어준다.

 「자, 여기 카드 받아. 그리고, 너 먼저 들어가서 씻고 있어. 엘리베이터는 저쪽이야. 나는 한 시간 정도 뒤에 갈 테니까 쉬고 있어.

연홍의 말에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그녀는 빠르게 몸을 틀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나한테는 엘리베이터를 타라 하고서는 어째서 계단을 오르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연홍이는 이 호텔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 이유가 있겠지. 동화 속 궁전처럼 양쪽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계단은 로비의 바로 위층에서 서로 만난다. 연홍이 그즈음에 다다를 즈음 나를 향해 말한다.

 「저기요, 편의점 학생. 엘리베이터 타라고. 안 씻을 거야?」

아-하고 맹하고 어설픈 대답과 함께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도 목이 다 낫지 못한 탓인지, 어지럼증이 인다. 나는 더 이상 연홍이를 쳐다보지 않고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걷는다. 하나밖에 없는 단추를 누르고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다. 젊은 연인 한쌍과 그들과는 일행이 아닌듯한 남자가 내리고, 나는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호텔이란 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불편한 점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에는 올랐지만 내가 알던 엘리베이터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연홍이의 방은 1204호인데, 정작 엘리베이터 층계 단추의 기장 큰 숫자는 11이다. 1204호라면 분명 12층을 뜻하는 것일 텐데, 12라는 숫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12라는 숫자가 있어야 할 위치에는 PH라고 쓰인 단추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역시나 아무리 세게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서 12층으로 가는 방법을 한참이나 고민하던 중에 번뜩이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정말이지 안타깝다. 11층에 내려서 계단을 찾아 한 층을 더 올라가면 그만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을 두고 괜한 걱정을 했다. 그렇게 11층의 단추를 누르는데, 희한하게도 엘리베이터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10층부터 2층까지 하나씩 층계를 내려가며 단추를 눌러보지만, 이 엘리베이터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직원에게 물어볼 심산으로 나는 하는 수 없이 1층 단추를 누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낯이 익은 남자를 마주하고 선다. 친절해 보이는 인상이다.

 「아, 역시나.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네요.

상냥한 그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낯선 이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정말이지 기쁜 일이다. 흔히 말하기를, 이런 경우를 두고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다-하는 건가 보다.


 그가 PH라고 쓰인 11층 단추 바로 위의 단추를 누르자, 희한하게도 단추에 붉은 불빛이 켜지고 아무런 움직임도 반응도 없던 엘리베이터가 덜컹하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찌나 심하게 출렁이는지, 부지불식간에 내 손은 잡을 것을 찾는다. 반짝이는 난간을 잡고 있는 내게 그가 말한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래요. 이렇게 출렁이는 것도 그렇고, 엄청 느려요. 한 번씩은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 바닥이 나란하지 않을 때도 있고요. 그래도, 봉은사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경치는 꽤나 볼만하죠.

그의 말에 마음이 놓인다. 그나저나 어째서 내가 누를 때에는 꼼짝도 않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게 된 것인지가 궁금하다. 어쩌면 이 엘리베이터는 엄청나게 세게 단추를 눌러야 할 만큼 낡은 걸까-하는 의문도 든다. 이 남자는 알겠지.


 「저기,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떤 단추를 눌러도 반응이 없던데. 어떻게 하면 엘리베이터가 움직여요?

내가 묻자 그가 화답한다.

 「여기, 네모모양 보이죠? 여기에 카드를 갖다 대면 버튼을 누를 수 있어요.

 「그렇구나⋯⋯.

나에게 세상은 여전히 많은 것들이 낯설다. 하긴, 모텔에 들를 때에도 엘리베이터는 항상 함께했던 남자가 단추를 눌렀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호텔이라는 이름을 건 모텔을 가본 적은 있어도 진짜 호텔에 온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아참, 물어볼 것이 더 있다. 서둘러야 한다.

 「저기요, 그러면 12층에 가려면 뭘 눌러야 해요?」남자는 다시금 친절한 얼굴로 화답한다.

 「제가 가는 층이 12층이에요. 팬트하우스를 줄여서 PH라고 쓰이는 거죠. 이 호텔은, 사실, 팬트하우스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만⋯⋯. 어쨌건, 대부분 PH라고 쓰인 버튼이 꼭대기 층을 뜻해요.

 「그렇구나⋯⋯.

엘리베이터 문 위의 숫자가 4층을 가리키고, 엘리베이터 안을 조용하게 채우는 단조로운 음악이 어색함을 달랜다. 문위의 숫자가 6층을 가리키고, 남자가 목을 고치는 소리와 함께 말을 꺼낸다.


 「하룻밤에 얼마예요?」 

내가 알 턱이 없다. 나는 빈털터리인 데다 호텔 숙박비용은 죄다 연홍이가 낸다. 이 남자는 얼마인지도 모르고 호텔에 온 걸까. 불사조의 말대로라면 이 호텔은 선불이니까, 아마도 이 남자는 비용을 일일이 따지지 않고 돈을 쓸 만큼 여유가 있는 모양이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처음이라서요. 그래도 터무니없이 비싸지는 않겠죠.

만족스러울 리 없는 나의 답변에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엘리베이터에 탄 두 사람 모두가 숙박비를 모르니, 우스울만한 상황이기는 하다. 엘리베이터가 9층을 지날 즈음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꺼낸다. 

 「처음은 아닐 것 같고⋯⋯. 오만 원 어때요? 삼십 분은 넘기지 않을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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