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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Apr 28.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11화

계획-04

{ 벗, 미치광이 - 제2권 10화 }에서 이어집니다.


 형사가 정신을 조금씩 차리면서 꿈틀대는 통에 태호는 그의 손을 묶느라 진땀을 뺀다. 어이-하고 태호가 형사에게 말한다.

 「계속 움직이면 머리 한방 더 맞는 수가 있어. 얌전히 있어. 그렇게만 해주면 혈액순환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 만큼만 묶을게. 당신이 내 말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세게 묶을 수밖에 없어. 내 말 이해하지? 자칭 형사 양반.

일부러 묵직하고 낮은 말투로 겁박하는 태호의 의도가 먹혀들었는지, 형사는 몸부림을 멈춘다. 하지만 태호는 형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릎을 여전히 치우지 않은 채로 손을 마저 묶는다. 그가 끈을 다루는 솜씨는 마치 오래된 시장의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고등어를 검은 봉투에 담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내가 보기에는 신기하리만치 정확하고 경쾌한 동작이지만, 고등어가 얌전히 있어주는 한 봉투를 묶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쉬운 일인 것이다. 소금에 절여져 있지는 않지만 지금의 형사는 이미 뱃속이 텅 빈 고등어에 불과하다. 태호에게 사람을 묶어본 경험이 많을 리야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가 나와 같은 편이라는 것이 이처럼 든든할 수가 없다.


 「담배는 태우나?

태호가 손발이 묶인 채 엎어져 있는 형사를 옆으로 굴리며 묻는다. 바닥에 눌려 빨개진 이마와, 침과 섞인 콧물로 풍선이라도 불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나는 순간 입술이 씰룩거렸지만 용케 잘 참아낸다.

 「내가 소리 지르면⋯⋯.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형사의 질문에 태호는 언짢은 얼굴로 주머니를 뒤지면서 대답한다.

 「담배를 피우냐고 묻는데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버지니아 슈퍼슬림 레드의 끝에서 불꽃이 타들어가고, 이윽고 불사조의 입에서 뽀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 하고, 두 겹으로 가려진 커튼을 걷어 젖히고 창문 하나를 반쯤 연다. 열린 창 밖으로 연기를 한 번 뿜고, 태호는 동그란 탁자에 놓인 재떨이를 챙겨 들고 다시 바닥에 누운 형사 옆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야.

태호의 한 마디에 형사와 내 시선이 그를 향한다. 뜻밖이게도 태호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부른 거예요? 저를? 멀쩡한 내 이름을 두고 야-가 뭐예요, 야-가.

내가 볼맨 소리를 하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야. 너 이 인간 알아? 본인이 형사라고 주장하는 이 인간. 네 이름을 이 사람한테 밝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는 그럴 생각 없으니까. 어떻게, 너도 한대 태울래?

 「네, 그리고 불도 좀.」


 호텔 방바닥에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누워있는 형사의 양쪽에 나와 태호는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담배를 태운다. 형사의 모습을 곁눈질해 보니 그 역시나 나와 태호의 모습을 살펴보는 눈치다. 피차 불편하므로, 나는 시선을 돌려 방을 돌아본다. 엄청나게 넓은 방이다. 굳이 말하자면 방이 아니라 좋은 아파트에 가까워 보인다. 꼭대기 층의 호텔 방에는 거실도 있구나-하며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연홍이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기에 아직도 오지 않는 걸까-하고 고민하던 차에 형사가 입을 연다.

 「저기요, 저 좀 일으켜 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사실 혼자서도 앉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랬다가는 또 두들겨 맞을 것 같고 해서 말입니다.」

 「싫은데.」

태호가 딱 잘라 말하지만 형사는 굴하지 않는다.

 「팔이 너무 아픕니다. 등뒤로 손을 묶어놓고 바로 누워있자니 너무 아파요. 어깨가 빠질 것 같습니다.」

형사의 얼굴을 보아하니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자세는 불편함을 넘어 고문에 가깝다. 태호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대꾸한다.

 「잘 됐네. 내가 솜씨가 좋지, 아주. 내가 당신한테 호의를 베풀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말해봐.」


 형사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태호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그의 얼굴에서 땀이 맺히고, 서로 합쳐지고, 피부를 타고 바닥으로 흘러 떨어진다.

 「저는 형사입니다.」

 「어, 나는 영업사원이야.」

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태호의 말은 형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빠, 나 담배 사러 가게 돈 조금만 주세요.」

형사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나는 의문과 당혹감으로 가득한 그의 표정을 그러려니 하고 피한다. 태호가 내게 담담히 말한다.

 「됐어, 그냥 내걸 펴.」

태호는 담뱃갑을 건네고, 나는 받아 든다. 얇은 담뱃갑 안에 들어있는 라이터의 무게가 느껴진다. 담배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하는 불만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나는 금세 빈털터리인 내 주제를 상기한다. 그 자리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담뱃갑에 집어넣고, 바닥에 놓인 재떨이 옆에 나란하게 담뱃갑을 내려놓은 뒤 몸을 틀어 거실 가장자리를 따라 느리게 걸음 한다. 고풍스러운 소품들과 가구, 직접 바라보아도 눈이 불편하지 않는 조명 따위를 살피며 나는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들이마신다. 부자가 되어 값비싼 예술품을 사러 갤러리에라도 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방이 어찌나 넓은지 중간 즈음에는 공간을 구분하기 위함인 듯한 두 칸짜리 계단도 자리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 침실로 향할까 망설이다가, 나는 다시 방향을 돌려 형사와 태호의 곁으로 걷는다.


 형사가 다시 태호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제발 부탁입니다. 저를 좀 일으켜 세워주세요. 팔이 너무 아파요.

태호는 느긋하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술로 물고서 불을 붙이지 않은 채로 대답한다.

 「그러니까. 그건 그쪽 사정이라니깐. 말했잖아. 나한테는 당신을 배려할 이유가 없다고. 그럴 거면 애초에 내가 당신을 뭣하러 묶었겠어? 답답한 사람이네. 자칭 형사 아저씨, 머리를 굴려서 나를 설득해 봐.」

형사의 얼굴에는 증오가 번졌다가, 이내 태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음에 기인한 굴종의 표정이 증오를 대신한다. 한 가지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면 뒤로 꺾인 팔로 인한 고통이다. 그는 땀이 흘러들어 따가워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기도 하고, 턱을 비튼 채로 이를 악물기도 하고, 입술을 앙다물거나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기도 한다.

 「저기, 선생님⋯⋯.」 태호가 두 개비째 담배를 막 다 태워갈 즈음 형사가 다시 말을 꺼낸다. 형사의 옆에 앉아있는 나와 태호의 시선이 형사의 떨리는 눈동자로 고정된다.

 「선생님⋯⋯. 아까 저한테 담배 태우냐고 물으셨지요. 예, 저도 담배를 태웁니다. 많이 태우죠.」

태호가 대답한다.

 「어, 내가 물었었지. 당신은 딴소리만 했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건 왜?」

 「선생님, 저도 담배 한 대만 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려면 몸을 좀 일으켜야 할 텐데요, 걱정하실 행동은 어차피 못하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기 저쪽, 창문 쪽 벽에 기대어 앉아서 가만히 있겠습니다.」

형사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고르고 미리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고쳐 쓴듯한 문장을 읊고 나서 태호의 얼굴을 호소하듯 뚫어져라 바라본다. 태호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인지, 조금이라도 더 딱하게 보이기 위함인지, 형사는 고개를 바닥에서 뗀 채로 땀을 흘리며 목을 떨고 있다.


 「좋아.」 태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한다.

 「그래, 좋아. 아주 설득력이 있어.」

태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나서 형사의 머리맡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정신을 잃은 형사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방 안으로 옮길 때와 똑같은 자세로 형사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뒷걸음으로 창문 쪽 벽을 형해 뒷걸음한다. 바닥이 거친 탓에 태호가 힘겨워하는 모양이 딱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닥에 놓은 재떨이와 담뱃갑을 들고 형사의 발치를 따라가는 것이 전부이다.


 벽에 기대어 앉은 형사는 여전히 괴로운 얼굴이다. 뒤로 묶인 팔 때문에 벽에 등을 기댈 수 없고, 발목이 묶인 탓에 무릎을 세워 앉을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목을 길게 빼고 앉아있는 모양새가 이토록 초라해 보일 수가 없다. 태호는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켜고, 허리와 어깨를 움직여 몸을 풀더니 형사의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는다.

 「냉장고에 가서 물 좀 가져와줄래? 네가 마실 물은 따로 챙기고.」

태호는 형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지만 내게 한 말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손에 든 담뱃갑과 재떨이를 형사의 옆에 내려놓고 나는 냉장고를 찾아 나선다. 나는 아까 망설였던 두 칸짜리 계단을 올라 주변을 둘러본다. 놀랍게도 모텔에서 봐왔던 작고 네모난 냉장고가 아니라 내 키보다 큰 양문형 냉장고가 벽에 파묻혀 숨어있다. 어째서 이렇게 알아보기도 힘들게 숨겨뒀을까-하는 의문은 냉장고의 양쪽 문을 열면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한쪽에는 갖가지 술과 음료, 수입산 생수가 줄을 맞춰서 채워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쪽에는 반짝이는 금속재질의 바구니에 얼음이 채워져 있다. 김밥이나 샌드위치가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씹을 거리라고는 사과 몇 알이 전부이다. 번뜩 문득 태호의 부탁이 기억나고, 나는 생수를 꺼내든다. 그런데 두병을 챙겨야 할지 세병을 챙겨야 할지-라는 하찮은 고민이 내 발목을 잡는다. 나는 느린 동작으로 한 병을 왼손에 들고, 다른 한 병을 오른손에 든 다음 냉장고 안을 노려보며 실체가 없는 생각에 잠긴다.

 「뭐 해!」

태호의 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팔꿈치로 냉장고의 문을 밀어 닫고, 빠른 걸음으로 남자 둘이 있는 자리로 되돌아간다.


 태호는 손을 뻗어 내 왼손에 들린 생수를 낚아채듯 가져가 곧바로 뚜껑을 열고 마시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병을 비운다. 고작 생수 하나에 남자다운 모습이라니. 내가 미쳤지.

 「이 양반, 담배가 없어. 라이터도 없고.」

태호가 입술에 묻은 물을 훔치며 말한다. 이번에도 그는 형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게 말하고, 나는 잠자코 듣기만 한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걸 본 사람은 태호가 아니라 형사다.

 「신분증도 없어. 공무원증 같은 것도 없어. 이 인간이 형사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네. 그런데, 이거⋯⋯.」

태호는 새하얀 가루가 든 작고 투명한 지퍼백을 집어 들고 말을 잇는다.

 「이거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바로 알 수가 있지.」

배신감이 몰려온다. 태호가 마약을 한다니,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에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이따위 일에 흘리기가 아까워 참는다. 내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말리던 때, 호텔 방문에서 철컥하는 소리가 난다.


 「아, 이거 뭔데! 유지야, 빨리 문 좀 열어! 나 힘들어.」

반가운 내 친구, 연홍이의 목소리다. 내가 생수를 든 채로 문을 향해 달려갈 때 태호가 소리친다.

 「아무도 이름 말하지 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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