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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Mar 26. 2024

각인

살롱 드 북스 01.

아침부터 빗방울들의 노크소리가 요란하다. 창문에 부딪히는 봄비가 달갑지는 않아 설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옆으로 누웠다. 아파트만 살다가 주택으로 와보니 외창 두께가 얇아서인지 바깥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설리는 구겨진 이불속에서 손만 빼꼼히 뻗어 침대 주변을 더듬거렸다. 손에 잡힌 건 그녀의 곰인형. 곰인형은 설리를 보고 웃고 있다. 그녀는 곰인형을 한 손으로 껴안으며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다. 손목에 매일 차고 있던 시계도, 핸드폰도 어디다 뒀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짐을 뒤져보면 나올 것이다, 설리는 좋게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매일 똑같은 시각에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이부자리 정리를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몸에 밴 오래된 루틴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것들을 하지 않게 되었다. 집을 나서서 한강변을 따라 조깅을 하는 것, 단골 순대국밥 가게에 가서 이모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뜨끈한 국물로 몸을 데운 뒤 소방서로 출근하던 것도 마찬가지. 설리는 이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잊는 것 같다.


설리는 방금 어떤 꿈을 꿨다. 사실 빗소리보다는 꿈에서의 어떤 소리 때문에 눈을 떴을 것이다. 설리는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어디든 기록해놓고 싶었다. 아직 이삿짐을 전부 풀지 않아서 끄적일만한 종이는 보이지 않았고, 마침 전날밤 따로 빼두었던 보물상자가 생각났다.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오래된 상자. 상자 속에는 여전히 보관 중인 물건들이 있고 설리는 상자 안에서 양장본 일기장을 꺼내 오랜만에 글을 적었다.


꿈에서 깼다. 꿈에서는 엄청 울었던 것 같은데 꿈과 현실사이의 나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지 눈가에 눈물이 전달되지 않았다.

오늘 꿈은 생생했다.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 <로미오>의 한 장면인 것 같았다. 아름다운 도시 이탈리아. 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아이들이 집들마다 굴뚝을 청소한다. 굴뚝청소부 아이들의 표정이 해맑다. 굴뚝을 쓸고 나면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까만 재가 묻어 더럽혀졌지만 아이들은 아무 상관없다.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친구가 있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육체적 힘듦보다는 정신적 외로움이 언제나 한 수 위인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 봤던 만화에서처럼 꿈에서도 시간이 지나자 로미오의 친구들이 떠나간다.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는 로미오는 눈물을 흘리며 달린다. 나는 꿈을 꾸며 꿈속에서 생각을 한다. 어떡하지. 다 떠나버렸네. 이제 로미오에겐 아무도 남아있지 않네. 어떡하지. 로미오는 슬프겠다. 어떡하지? 꿈은 이렇게 끝났다.

로미오를 걱정하다 깨버렸다. 잊고 있던 만화가 꿈에서 이리도 생생하게 나오니 신기하기도 했다. 기억에서 흐려졌던 <로미오>였는데... 옛날 기억이 난다. 이 만화를 보고 슬퍼서 울고 있었을 때 아빠가 붕어빵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서러움도 잠시, 내게는 가족이 있음에 안도하며 따끈한 붕어빵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제 나도 로미오와 다를 바가 없다. 꿈에서는 분명 알려주는 거다. 이제 너는 혼자라고. 동료도, 가족도, 친구도 없이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이사 온 새 집에서 처량 맞은 꿈을 꾸다니 내 멘탈이 확실히 무너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다면 역시 휴직신청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내 마음에 빨간불이 켜졌는데, 위험 신호를 놓치는 건 소방관이 아니지. 우선 약으로 이겨내 보자. 내 마음에 불을 끄고 나면 그땐 정말 돌아갈 수 있겠지... 나는 ‘멋진 소방관 강감찬’의 딸 강설리니까.


그녀는 서둘러 일기를 마무리 지었다. 끄적이던 볼펜을 딸깍 거리며 그곳에 각인된 이름을 어루만졌다. 설리가 어릴 때 어버이날 선물로 아빠에게 드린 ‘멋진 소방관 강감찬’ 볼펜. 볼펜의 주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그날은 설리의 기억 속에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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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 2화가 곧 발행될 예정입니다. 2024년 11월 25일 월요일 발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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