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두가 분홍이 꾸민 일

사루비아다방 '분홍반지'

by 포로리

좋아하는 허브차 중에 ‘분홍반지’라는 이름을 가진 차가 있다. 처음 이 차를 알게 된 건 책을 통해서였다.

책 <고유한 순간들>에서는 ‘분홍반지’를 탄생시킨 사루비아 다방에서 이 차를 우려 여러 번 향미를 느끼며 이름 짓던 순간을 작업노트에 기록해놓았다.


분홍반지 작업노트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그 이름을 버리라,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고 애원했다. “이름이란 무엇인가요? 장미는 이름이 바뀌어도 그 달콤한 향기는 변치 않으니, 로미오 또한 로미오로 불리지 않아도, 그 명칭이 없어도, 그 소중한 완벽함은 그대로일 거예요.” 순진한 생각이다. 장미는 이름이 장미여서 달콤하다. 로미오도 이름이 로미오여서 완벽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의 이름 없이도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그들이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든 시점은 서로의 이름을 듣고 부르면서부터다. 이름이 결정타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의 이름마저 사랑했다. 둘은 서로를 만지며 이름도 어루만졌다. 둘의 사랑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둘의 이름이 로미오와 줄리엣이어서 400년도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둘을 사랑하고 그들의 비극에 눈물짓는다.
(중략)
사루비아 다방의 차 중에서 이름이 분홍반지라는 차가 있다. 가장 사랑받는 이름이다. 분홍반지는 정확히 지은 이름이다. 분홍반지는 처음부터 분홍반지여야만 했다. 그것은 지어낸 이름이기보다 끄집어낸 이름이다. 나는 그것이 분홍반지인 줄 첫눈에 알아봤다. 그것은 루이보스와 체리, 크랜베리 등이 혼합된 허브차가 아니라 처음부터 분홍반지였다.

- 고유한 순간들(사루비아 다방 티 블렌더 노트), 김인 지음


이 작업노트를 보고 나는 이미 분홍 반지에 들어간 열매들을 먹었다. 이름만 듣고도 마법에 걸린 것처럼 새콤달콤한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 빨강 빛깔이 영롱한 히비스커스가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이름이라는 것은 예쁠수록 사람의 마음을 훔친다. 사랑하는 마음을 확신하게되는 건 로미오와 줄리엣이 창가에서 서로를 바라본 잠깐의 눈맞춤으로도 가능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집의 찻장 한 켠에는 ‘분홍반지’가 자리하게 되었다.


다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몇 번 지인에게 차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다. 차를 좋아하는 H는 내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차들을 매번 내주었는데, 항상 처음은 ‘동방미인’이라는 차였다.


“이름이 왜 '동방미인'이에요?”

“원래 이름은 '백호오룡'인데요. 차의 맛과 향이 동방의 여인처럼 부드럽고 우아하다고 해서 새로 이름 지어진 차예요. 정선님을 보면 이 차가 생각이 나서 자꾸만 꺼내게 되네요.”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입안을 마구 헹구는 듯했다. 이름을 듣고 나서는 꽃향기처럼 입안에 달달함이 퍼지기도 했다. 마실수록 더 좋아졌다. 하지만 우롱차 중에서는 ‘동방미인’이 비싼 축에 속해서 섣불리 사서 마실 엄두까지는 내지 못했다. 그런데 ‘분홍반지’가 내게 온 것이다. 이 모두가 분홍이 꾸민 일이 분명하다. ‘분홍반지’의 차에는 히비스커스의 시큼한 향이 가장 많이 느껴지고, 그런 시큼함을 달콤하고 탱글탱글한 열매들이 서포트해준다. 크랜베리와 블루베리, 오미자, 유자피. 모두 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표정이 찡그려진다면, '분홍반지'에 들어있는 하얀색, 핑크색 별사탕을 좀 더 첨가한다. 별사탕이라니. 이토록 사랑스러운 티가 또 있을까? ‘분홍반지’는 따뜻하게 마실 때도 좋지만 차갑게 마시면 더 좋았다. '분홍 반지'에 차가운 물을 부어 10시간 정도 냉침한 뒤에 마시면 분홍빛 액상 비타민을 마시는 것 같았다.


사루비아다방, 분홍반지


나는 이제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이 차를 내어주고 싶다. 요즘 커피는 너무나도 흔한 음료가 되었다. 어느 순간 커피의 향조차도 맡지 않고, 허겁지겁 목으로 넘길 때도 많다. 커피머신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쉽게 커피 한잔을 다시 뽑아낼 수 있었다. 나는 어쩌다 한 번 우리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버튼 하나 누르는 것보다는 좀 더 수고스러운 노력을 가하고 싶다. 물을 끓여 뜨거운 물이 준비되면 차를 우리는 개완에 부어 미리 온기를 더해주고, ‘분홍반지’ 티를 담은 후 3분간은 잠자코 내 마음을 우려서 붉게 물든 것을 주고 싶다. 차 뚜껑을 열고 손으로 휘휘, 상대에게 손바람을 내어 잔에 흡수되어 있는 향긋한 분홍빛 향을 전달하고 싶다. 그리곤 우리 집에 있는 가장 예쁜 잔에 어여쁘게 따라 주고 싶다.


사루비아다방, 분홍반지


가끔 카페에서 커피 대신 오미자 에이드나 딸기차, 히비스커스를 마시고 있으면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혹시, 핑크색 좋아해서 그런색 음료 시킨 거예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나는 이렇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흐뭇하게 웃음을 보인다. 이것은 커피가 아니라면 핑크의 의리를 지키는 나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어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자몽슈페너
파인애플 에이드
히비스커스 블랜딩티


오미자차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 집으로 데리고 가 내가 아끼는 ‘분홍반지’를 대접하고 싶다. 내게 운명처럼 다가오는 분홍빛 아름다움과 분홍에 반하는 순간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말이다.


keyword
이전 14화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